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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0:09:27

니코마코스 윤리학


1. 개요2. 상세3. 1권요약
3.1. 제 1 장 좋음과 목적3.2. 제 2 장 최고선과 정치학3.3. 제 3 장 논의의 방법3.4. 제 4 장 최고선에 관한 통념들3.5. 제 5 장 행복과 세 가지 삶의 유형3.6. 제 6 장 좋음의 이데아 비판3.7. 제 7 장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과 행복3.8. 제 8 장 정의된 행복과 통념의 부합3.9. 제 9 장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3.10. 제 10 장 행복과 운명3.11. 제 11 장 행복과 죽음 이후3.12. 제 12 장 칭찬과 명예3.13. 제 13장 영혼의 탁월성
4. 관련 문서

1. 개요

Ἠθικὰ Νικομάχεια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 세운 학당 리케이온에서 강의한 행복에 관한 논설이다.

서양의 윤리학의 토대가 된 책으로 인류 역사상의 스테디셀러이자 가장 위대한 저작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10여 권으로 구성되는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겼던 3개의 윤리학 강의안[1] 중 하나다. 책 이름인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들의 이름이다. 그래서 아들이 편찬하고 엮은 것인지 아들에게 헌정한 것인지 기타 등등 얘기가 있지만 어쨌건 아들과 관련이 있는 이름인 듯하다.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정수를 담고 있는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정수라고 불려지고 있는 만큼 매우 복잡한 함의를 담고 있는 책으로, 스승인 플라톤의 온갖 저작, 그리고 사조부격인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다른 그리스 학자들의 주장이나 논설에 관한 저격, 해설 등이 잔뜩 담겨 있다. 또 일반적으로 강의록 형식을 취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특성상 가르쳐줬으니 제자들이 알겠거니 해서 논리 전개 과정에서 자신의 기존 학설을 적당히 언급하면서 '알아들었지?^^' 수준으로 넘어가는 부분도 많으니 당연히 초심자가 노베이스로 접근할 경우 고대인의 급발진이나 논리적인 비약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쉽고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논지를 전개해 나가며 서구 윤리학 계열에서는 시간상으로는 첫 번째 대작으로 많이들 여겨지기 때문에 쉽게 읽고 접근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많이들 생각되고 있다. 물론 노베이스 초심자가 읽어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논지를 전개해 나가며, 경험과 상식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성상 얻어나갈 것이 많고 최소한 논리적 사고의 훈련에도 좋은 책이지만 실제로는 정말이지 정신 나갈 것 같은 심정으로 건초를 씹듯이 우걱우걱 씹어나가야 하는 저작이다.

읽다 보면 뭔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윤리학과는 그 영역이 뭔가 겹치는 듯도 하면서 이게 윤리학이라고? 라는 심정을 느끼게 할 공산이 강한 책이지만, 건초를 씹듯이 읽으면 이게 왜 서구 윤리학계의 대작인지 알 수는 있게 되는 다소는 난해한 책이다.[3]

2. 상세

이 책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의 명칭(주제)은 9개 정도로 나눠지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행복에 대한 이론(인간은 좋은 것을 위해, 즉 선(善)을 추구하는데, 궁극적인 최고의 선은 행복으로 귀결된다라는 이론), 중용(인간의 이성에 바탕하여 적절히 욕망을 조절하는 것) 등에 대한 내용과, 그 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다뤄지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소개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 행복을 구성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그 목적에 다다르는 방법은 무엇인지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범주론적 방법을 통해 탐구해 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마음가짐 뿐만 아니라 인간의 활동 이 수반될 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 행복에는 조건이 있는데 첫째,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며, 둘째, 행복은 활동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혹은 쾌감)은 활동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객관화와 계량화가 어려운 행복이지만 의지만 있으면 반복할 수 있는 일생에 걸친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말했던 행복에 대한 내용은 중학교 1학년 도덕 교육과정에서도 일정부분 다뤄지고 있으며, 이외 분야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족적이 굉장히 넓고, 그만큼 모든 교육과정과 인간생활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그의 윤리학 강의안인 에우데모스 윤리학, 대윤리학 등도 간간이 읽히고 있지만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높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서인 정치학 등과 함께 많이 읽히고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정치학의 입문으로 간주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마지막 10권 마지막 문장은 '이제 논의를 시작해 보자'로 끝나는데, 여기에서의 '논의'란 정치학을 논의하자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으로 연결된다

3. 1권요약

3.1. 제 1 장 좋음과 목적

우리의 모든 활동(탐구, 행동, 기예)과 선택은 모두 선을 목적으로 한다.
활동들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기에 각 종류마다 추구하는 목적 또한 다양하다. 예를들면 의술(기예)의 목적은 건강, 조선술(기예)의 목적은 배, 병법(탐구)의 목적은 승리다.
말의 굴레 제작의 목적은 승마이며, 승마의 목적은 병법이며, 병법의 목적은 승리인 것처럼 낮은 단계의 활동들이 그보다 높은 단계의 목적에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높은 단계에 있는 활동의 목적은 낮은 단계보다 더 추구할만하고 으뜸가는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에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 있고 수단으로 목적인 것이 있다.

3.2. 제 2 장 최고선과 정치학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을 최고의 선이라고 하며 이것은 정치학에서 다뤄진다. 정치학은 학문연구, 교육, 경제, 규칙, 제정 등 다른 모든 학문들의 목적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학은 인간에게 최고의 선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치학은 여러 사람의 행복을 실현함에 목적을 두고있다. 따라서 선은 정치학에 속한다.

3.3. 제 3 장 논의의 방법

정치학에서 훌륭한 행동, 옳은 행동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데 그것에 대해서 사람마다 견해차이고 있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게 많다. 따라서 특별히 잘못되지 않는다면 대부분 인간에게 좋은것 정도로 개연적으로 파악하는게 낫다.
정치학은 인생과 인간의 행위에 관한 것으로 적은 경험을 가진 젊은이보다 경험이 많은 어른에게 적합하다.
오로지 이성에 따라 욕구하고 행동하는 이에게만 선을 추구하는 정치학은 커다란 이득을 줄 것이다.

3.4. 제 4 장 최고선에 관한 통념들

최고의 선은 행복이다. 행복 또한 무엇인가에 대해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른 의견들이 나오는 것 같다. 혹자는 쾌락 혹자는 부 혹자는 명예 혹자는 건강 혹자는 지성이라고 말한다.
모든 의견들을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일리 있다고 알려진 의견만을 검토해보자.
'알려진'은 본성적으로 알려진 것과 우리의 견해에서 알려진 것으로 구분되는데 의견들은 후자로 추상화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있는 원리에서 출발해 본성적으로 알려진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러한 연구과정을 통해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3.5. 제 5 장 행복과 세 가지 삶의 유형

인간의 삶의 형태는 크게 세가지다.

첫째, 향락적 삶이다. 쾌락을 행복으로 여기며 말초적 즐거움에 의존하는 삶으로 짐승들의 삶이다.

둘째, 정치적 삶이다. 명예를 행복으로 여기는 삶이다. 그러나 명예란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자족적인 것이 아니며 타인의 인정에 달려있으므로 행복이라고 말하기에 불완전하다. 만약 명예를 당사자의 탁월성(덕)에 근거하며 그것은 당사자와 불리될 수 있는 내적 좋음(internal good)이며 이는 곧 자족적이기 때문에 행복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 탁월성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외부로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고 발현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나쁜 일을 당하거나 불행을 겪을 수도 있다.

셋째, 관조적 삶이다.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삶이며 자족적이고 참된 행복에 이르는 최고의 선이라 할 수 있다.

3.6. 제 6 장 좋음의 이데아 비판

우리는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친구[5]와의 친분에 금이 간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데아란 감각기관인 눈을 통해 볼 수 있는게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볼수있는 형상을 의미한다.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영혼불변한 참된 세계이다.
플라톤은 '보편적 좋음' 즉 모든 좋음의 본이 되는 '좋음의 이데아'를 지안하였지만 몇가지 이유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

첫째, 인간의 이데아와 개별적인 인간이 똑같은 인간으로 설명되고 있다면 굳이 인간의 이데아를 상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인간의 이데아나 인간은 모두 인간인 한에서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음의 이데아나 좋음 역시 좋음인 한에서 아무 차이가 없을것이다.
또한 선의 이데아가 영원하다고 해서 개별적인 선보다 더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오랜 시간동안 하얀것이 잠깐 하얀것보다 더 하얗다고 할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이것들을 생각핼 볼때 선의 이데아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

둘째, 우리가 무엇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는 다양하다. 이를테면 지성이 좋다. 탁월성이 좋다. 적당량이 좋다.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가 있다라고 한다면 서로 다른 종류의 대상이 같은 좋음의 이데아를 따라야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단일한 좋음의 이데아를 따른다고 한다면 다른 종류마다 공통점이 있어야하는데 서로 구별되고 차이가 난다. 따라서 다른종류의 대상은 단일한 이데아를 따르지 않는다.

셋째, 하나의 이데아에는 하나의 학문만 존재하므로 좋음이라는 하나의 이데아만 있다면 좋음에 관한 학문도 하나만 있어야하지만 여러 학문들이 존재한다.

넷째, 선은 그 자체로 선한것과 수단으로 선한것이 있다. 만약 그 자체로 선하며 다른 선들과는 독립되어있는 선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논의하는 중이기에 불필요하다.

다섯째, 선의 이데아가 있고 그것을 획득한다고 해도 그것이 여러 학문들에 실제로 도움이 될지도 미지수다. 의사가 선의 이데아를 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치료에 도움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개별적인 인간 건강을 다루며 연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좋음은 실체(그 자체로 선)와 관계(도구적 선)로 이야기 되는데 실체는 관계보다 본성상 먼저이다. 왜냐하면 관계는 실체의 파생물이거나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체와 관계로서의 좋음은 공통적인 하나의 이데아를 따른다고 보기 어렵다.

일곱째, 숫자 1은 숫자 2의 앞에 존재해야 한다. 2가 있다면 반드시 1이 있어야하며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미뤄생각 해 볼때 수에는 선과 후가 있다. 그런데 수의 이데아가 있다면 이것은 1보다 더 먼저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6]

3.7. 제 7 장 우리가 추구하는 좋음과 행복

선은 모든것이 그것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다. 의술은 건강이라는 선을 위해 행해지며 병법은 승리라는 선을 위해 행해진다.
선 중에서 최고의 선이란 그것때문에 행해지는 것이고 완전하며 자족적인 것이다.
여기서 완전이란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 다른 것 때문에 추구되지 않는 것을 뜻하며 자족성이란 어떤 목적이 다른 좋음(선)을 더하지 않고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상 폴리스적 동물이기에 자족성이 혼자만을 위한 것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 자식,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와 동료 시민들을 위한 자족성이다.
조각가와 연주가가 우리보다 낫다(선)고 할때 바로 그들의 기능(조각과 연주)때문이듯 인가의 선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것을 탐구하면 좋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영양섭취와 성장을 한다. 그러나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물들에게 공통적이므로 인간만의 선이라고 보기 어렵다.
둘째, 우리는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물들 또한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만의 선이라고 보기 어렵다.
셋째, 우리는 이성을 지니고 있다. 이성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와 이성 그 자체를 가지고 사유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우리의 전유물이므로 인간이 동물보다 선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인간의 기능을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상정하자. 이런 기능이 훌륭하게 수행된다는 것이 선이며 선을 행한다는 것이 행복이다.

3.8. 제 8 장 정의된 행복과 통념의 부합

좋음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외적인 좋음
둘째, 육체와 관련된 좋음
셋째, 정신과 관련된 좋음
선을 지니고 있는 것과 이를 행동으로 실천해서 선을 실현하는데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고 정신과 관련된 좋음이 행동과 결합해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날때 진정 선이라 하겠다.
즉 선이란 탁월성을 소유한 품성상태가 아니라 탁월성을 사용하는 활동에서 성립한다.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며 이렇게 덕을 발휘해 선을 실현하는 삶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받침이 없으면 고귀한 일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기 때문에 행복은 추가적으로 외적인 좋음도 필요하다.[8]

3.9. 제 9 장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

덕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최고의 것이고 신적이며 축복된 것이다. 행복은 그것에 대한 보상이다. 따라서 누구나 덕을 추구하며 실천함으로써 행복해 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종류의 배움과 노력이 필요하며 우연적으로 행복해 질 수는 없다.
우리는 행복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규정했으며 그렇다면 동물들은 그러한 활동이 불가능하고 어린이 또한 그러한 활동이 잘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행복한 동물 행복한 어린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은 완전한 탁월성과 완전한 생애를 함께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3.10. 제 10 장 행복과 운명

운을 통해 행복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운은 재산이나 미모와 같이 행복의 부가적인 것이고 덕의 발휘가 행복의 핵심이다. 덕을 따르는 활동들만큼 안정성을 갖는 것은 없으며 덕의 추구로 행복한 이는 안정성을 갖게 될 것이며 인생 내내 행복한 사람으로 살 것이다. 큰 불운이 닥쳐오더라도 그들은 고결하고 담대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고통을 침착하고 품위있게 견뎌 낼 것이다. 그들이 불운들에 의해 흔들리더라도 어느 시간 안에서 고귀한 일들을 성취한 후에 다시 행복해지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절대 비참해지지 않는다.

3.11. 제 11 장 행복과 죽음 이후

어떤 사람의 죽음 이후에 친구나 후손이 겪는 행운과 불운이 그 사람의 행복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즉 친구들이 잘하든 못하든 죽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행복한 사람을 행복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 정도는 아니다.

3.12. 제 12 장 칭찬과 명예

행복은 제1원리이므로 명예롭고 신적이며 따라서 행복한 이를 칭찬의 대상보다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이것은 칭찬보다 더 크고 좋은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3.13. 제 13장 영혼의 탁월성

앞서 말했듯 행복이란 완전한 덕을 따르는 정신의 활동이다. 인간의 덕이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의 덕(영혼의 덕)이다. 영혼은 '이성이 없는 부분'과 '이성이 있는 부분'으로 나뉜다.

이성이 없는 부분은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 식물적인 부분으로 영양과 성장을 가리킨다. 이 능력의 탁월성은 모든 생물에 공통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탁월성이 아니다.
둘째, 욕망적인 요소로 이성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이성에 복종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욕망적인 요소는 이성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이성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거나 이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을 가진 부분도 마찬가지로 두가지다.
첫째, 이성을 자체적으로 가진 것 이성적 원리는 가진 것이다.
둘째, 이성을 듣고 따를 수 있는 것이다.

탁월성 또한 이성의 유무로 나뉜다. 이성을 가진것과 관련이 있는 탁월성은 지적탁월성이고 지혜, 이혜력, 실천적 지혜를 포함한다. 이성을 듣고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는 탁월성은 성격적 탁월성이다. 절제와 자유인다움을 포함한다.
정리하자면 영혼은 이성 욕구 영양으로 삼분되어 있고
이성의 덕은 지적인 덕
욕구의 덕은 품성적 덕이다.

4. 관련 문서


[1] 에우데모스 윤리학, 대(大)윤리학, 그리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2] 예를 들자면 무슨 행복이 활동이니 영혼이 어쩌니 하는 부분은 초심자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기서 언급한 수준으로는 왜 무슨 말을 저런 식으로 하는지 절대로 절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결론 부분의 관조가 최상이니 지고니 어쩌고 하는 것도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러운 난이도인 형이상학에서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터트리는 얘기인데 이 책만 읽으면 관조가 최고라는 게 나름대로 근거는 대고 있다 하여도 당연히 고대인의 급발진이자 비약에 불과할 뿐이다.[3] 그러나 유명 외국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정말 그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지 자기도 의문시된다는 말처럼, 물론 그의 1/10도 노력을 기울일 수는 없겠지만 어쨌건 이게 정말 그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가치가 있는지라는 의문도 들게 만들기도 한다.[4] 이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으로 연결된다.[5] 그의 스승인 플라톤을 말한다.[6] 당시 숫자의 한계가 1이였고 1 이전의 수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표현 한 것이다.[7] 다른 이유가 없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끌어와 설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8] 좋은 태생 훌륭한 자식 준수한 용모 좋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