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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21:57:24

니콜라이 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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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ge_NKh.jpg
본명 니콜라이 흐리스티아노비치 분게
Никола́й Христиа́нович Бу́нге[1]
출생 1823년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키예프
사망 1895년 (향년 72세)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상트페테르부르크
학력 성 블라디미르 제국 대학 (정치학 / 박사)[2]
약력 러시아 제국 재무장관 (1881 ~ 1887),
장관위원회 의장 (1888 ~ 1895)
종교 루터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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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학자이자 정치인이다.

당대 저명한 경제학자로써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 명예회원이자, 본인의 모교[3]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니콜라이 2세의 젊은 시절 경제 분야를 가르쳤다.

학문적으로 초창기에는 아담 스미스의 영향을 받은 자유무역의 지지자였으나 훗날에는 비판자로 전향한다.

정치인으로서는 재무장관, 장관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이반 비시네그라드스키-세르게이 비테-표트르 스톨리핀-블라디미르 코콥초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제국 말기의 국가 주도의 통화 개혁[4], 농업 개혁[5], 공업 성장으로 대표되는 경제 정책의 기본적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무엇보다 국가사회주의의 지지자로서 재무장관 시절 알렉산드르 3세에게 비스마르크처럼 혁명가들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받아들여져서 러시아 제국에서 근대적인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한다.[6]

그러나 분게의 국가주의적 정책은 귀족층[7] 및 타 파벌[8]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여론의 압박에 몰린 그는 결국 재무장관직을 내려놓고 장관위원회 의장이 됨으로서[9]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1892년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의 부의장 직책을 맡긴 한다.

니콜라이 2세와 긴밀한 사이였다. 황태자 시절 경제학 교사였던 데다가, 알렉산드르 3세가 황태자에게 실무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겼는데 그 황태자를 보좌하기 위해 부의장으로 임명된 이가 분게였다.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황제는 자신의 일기장에 '충성스럽고 경험 많은 내 조언자 중 하나가 줄었다. 그의 죽음은 나를 어려운 처지로 만들었다'고 적었고, 분게가 제출한 보고서를 복사하여 다른 황족, 장관, 소비에트 의원들에게 배포했다.
[1] 독일어: 니콜라이 카를 파울 폰 붕게(Nikolai Karl Paul von Bunge).[2] 석사 논문은 '표트르 대제의 상업 원칙 연구(Исследование начал торгового законодательства Петра Великого)', 박사 논문은 '신용 이론(Теория кредита)'.[3] 이쪽은 총장까지 했다.[4] 이는 니콜라이 2세 시대에 세르게이 비테에 의해 완료된다.[5] 농민공동체를 해체하고 농민의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을 강화시키는 것[6] 편견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제도는 그 시대 기준으론 좋은 편이었다. 단지 땅이 너무 커서 그게 제대로 시행되는지 감독하기가 힘들었던게 문제다.[7] 1860년대의 대개혁 이후 러시아 귀족계급 전반이 몰락하고 있었고 분게가 귀족 토지 은행을 창설하고, 직접 농사를 짓는 귀족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을 시켜줘야 한다 주장하는 등 나름대로 이를 지연시키고 귀족의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을 촉진하긴 했다. 다만 지주귀족의 몰락은 그 시대의 역사적 흐름이었다는게 문제였다.[8] 주로 농민공동체의 급진적인 해체에 반발하는 파벌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똑같이 니콜라이 2세의 교사였던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9] 장관위원회 의장이 명목상으로는 황제 바로 아래의 최고위직이지만 정치 운영에서 담당하는 실무 분야가 적었기 때문에 사실상 명예직이었고 당시에도 '명예로운 좌천' 정도로 여겨졌다. 물론 이런 최고위직에 오를 정도면 그동안의 짬밥과 인맥이 있으니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하는게 아예 불가능한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