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송팔대가 관련 틀 | |||||||||||||||||||||||||||||||||||||||||||||||||||||||||||||||
|
唐宋八大家
1. 개요
중국 당나라, 송나라 때 활동한 문학가 8명. 중국 근현대 이전의 문장 형식과 내용, 산문 이론을 정립하여 퍼트린 업적이 있는 인물들로, 당송팔대문학가(唐宋八大文學家)라고도 불린다.2. 상세
중국의 산문은 춘추전국시대 굴원의 초사(楚辭)에서 시작되어 한나라 때 황제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행간의 음절 수를 정하고 압운(押韻)을 적극 활용한 형식주의적 글인 부(賦)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중국 산문은 삼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산문의 내용을 더욱 경시하고 적절한 미사여구나 문학적 표현의 사용만을 중시하는 변려문(騈儷文)으로 변화하였다.
변려문은 수필임에도 4자 · 6자의 대구를 많이 사용하여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칭했는데, 대우(對偶)[1]와 대구(對句)[2]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각 글자를 음률(성조)의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배열하여 노래처럼 읊을 수 있도록 한 수필이다. 격식과 수식을 차려 지배층 간의 소통에 사용하기에 좋은 문체였으나 형식에만 신경을 써서 문맥이 뚜렷하지 않고 글 뜻은 애매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문체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조금씩 생겨났으나 상당수의 학자가 모두 변려문에 익숙하여 문체 개혁의 움직임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8세기 중엽 안사의 난 이후 변려문의 주 사용 계층이었던 귀족과 상류층이 몰락했다. 반대급부로 상인·부농 등 중하위 계층 출신 인물이 글을 배워 출세하는 경향이 늘어나자 변려문을 대체할 이해하기 쉬운 글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때마침 한유와 유종원이 등장함으로써 중국 산문은 전환기를 맞았다. 문장력이 뛰어났던 한유는 옛 문인들이 정립한 문학 이론을 집대성하여 문장으로서 유교의 전통을 회복하는 고문(古文)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유종원 역시 그와 함께 고문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다만 유교만을 숭상하고 글의 내용만을 중시하여 문장의 미적 형식을 배척하고 유교적 도리가 글의 내용에 담겼는지만을 고려한 한유와 달리, 유종원은 문장을 접하는 이로 하여금 그 내용을 오래 간직하도록 하려면 문장의 일정한 형식을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비단 유교가 아니어도 올바른 도리를 포괄한다면 불교나 도교와 관련된 내용을 품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이토록 사상에 큰 차이가 있던 두 사람이었으나 한유와 유종원은 서로를 최고의 벗이자 협력자로 여겼으며, 그들의 고문운동은 당 말기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으로 다시 유미주의가 확산되며 잠시 주춤하였으나 북송대에 이르러 구양수가 다시 유미주의를 비판하며 한유의 문집을 모범으로 삼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유창하게 읊고 쓸 수 있는 산문을 유행시킴으로써 다시 주목받는다. 또한 소순, 소식, 소철이 그에 동조하여 각자의 스타일로 고문을 집필하여 고문운동의 주도권을 이어받고, 또 왕안석, 증공이 임천(臨川)[3] 출신 학자들과 교류하며 고문운동을 독자적으로 이해하여 확산시켜 완전히 성공시켰다.
이들이 활동한 이후 송나라 때의 진덕수(眞德秀, 1178-1235)[4] 처음으로 이들 8인을 대가라고 평가했고, 이 평가가 그대로 명나라 이후의 문인들에게 수용되어 모곤(茅坤)이라는 문인이 이들의 산문들을 약간 편집하여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라는 160권짜리 문집을 만들어 보급한 이래 지금의 당송팔대가라는 명칭으로 남았다.
현재 중국은 소프트 파워 융성을 위해 이 당송팔대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바이두 등 중국 웹 사이트에서도 이들에 대한 자료가 많이 올라온다.
3. 문제점
진덕수가 무슨 근거로 당송팔대가를 선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무늬만 당송이지 여덟 명 중 당나라 사람은 두 명뿐이고, 소씨 가문에서 세 명이나 차지하고 있다. 이 셋 중 소식의 문학적 성취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소순, 소철은 소식의 가족이라는 것 외에 크게 대단한 업적이 없는데도 한유, 유종원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따져보면 당나라는 산문이 아닌 운문의 전성기였고 다양한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유교적 산문을 기준으로 뽑자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당나라는 시성 두보, 시선 이백, 시불 왕유, 시귀 이하, 시마 백거이 등 쟁쟁한 시인들이 많았던 시대이다.
4. 인물 명단
- 한유愈之爲古文,豈獨取其句讀不類於今者耶? 思古人而不得見,學古道則欲兼通其辭。通其辭者,本乎古道者也。유(愈)가 고문을 하는 것이 어찌 그 구두(句讀)가 지금의 것과 같지 않음만을 취하련가? 고인을 생각해도 뵐 수가 없으니, 고도(古道)를 배움에 그 문사에까지도 통하고자 함이라. 그 문사에 통하는 것은 본디 고도에 뜻을 둠이라.- 제구양생애사후(題歐陽生哀辭後)
고문운동을 본격적으로 촉발시킨 인물. 스스로 맹자의 가르침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할 정도로 유교를 크게 숭상하였고, 그의 고문운동 또한 변려문의 지나친 형식미가 유교의 도리가 세상에 퍼지지 못하도록 하므로 유교의 도통을 복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진행된 것이다. 그 때문에 도교, 불교 등의 가르침은 이단시[5]하였고 유교의 오경, 자사, 그리고 한나라 때의 책이 아니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토록 곧고 일관된 주장과 사상 덕에 후세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 유종원文之用,辭令褒貶,導揚諷諭而已。雖莫言鄙埜,足以備於用,然而闕其文采,固不足以竦動時聽,夸示後學,立言而朽,君子不由也。문장의 쓰임은 사령(辭令), 포폄(褒貶), 도양(導揚), 풍유(諷諭)[6]에 있을 따름이다. 비록 그 말이 비루하다 해도 쓰임에 대비하기에는 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채가 없다면 본디 세상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여 뒷날에 배우려는 이들에게 뜻을 드러내는 수가 없어 생각을 표현한 말이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군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양평사문집후서(楊評事文集後序)
한유와 더불어 간결하고도 산뜻한 고문체의 글을 지어 고문운동을 이끌어 나간 인물. 그러나 형식미를 완전히 배제한 한유와 달리 꾸밈없는 문체는 읽는 이의 관심을 끌지 못하여 그 도리를 전파하지 못한다고 여겨 어느 정도의 미사여구는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사상적 측면에서도 유교 외길을 걸었던 한유와 달리 불교나 도교 등 다른 학문의 가르침이라도 사람의 행동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수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
- 구양수唐之文涉五代而弊,至修復起당대의 문장이 오대를 거치면서 피폐해졌는데 구양수에 이르러 다시 일어났다.-《사조국사(四朝國史)》
한유와 유종원이 활동한 당 중기 이후 오대십국시대에 이르러 또다시 유미주의적 문체인 태학체(太學體)가 확산되어 북송대까지 이어지자, 당대의 고문운동에 다시금 주목하여 한유[7]의 산문을 참고하여 명확한 산문이론을 정립하고 실제 창작을 통해 그 이론을 실천함으로써 중국산문사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과거 시험관 등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인재들을 발굴하였는데, 아래의 나머지 당송팔대가 일원들이 모두 구양수의 도움을 최소 한 번쯤은 받은 인물들이다.
- 소순
아래의 소식과 소철의 아버지로, 자식들과 함께 삼소(三蘇)로 엮이며 이에 따로 노소(老蘇)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책(幾策)', '권서(權書)', '형론(衡論)' 등 22편의 문장을 구양수에게 보여 주고 그의 추천을 받아 정계에 진출했다.
- 소철
위 소식의 동생으로 마찬가지로 구양수의 제자였다.
- 증공
가족들 중에도 이름난 문인이 6명 더 있었기 때문에 남풍칠증(南豐七曾)의 일원으로도 불린다. 주요 저서로 월주조공구멸기(越州趙公救災記) 등이 있다.
[1] 뜻이 같은 글을 나열함[2] 글자 모양 혹은 발음이 똑같거나 비슷한 단어로 구성된 글을 나열함[3] 현 장시성 푸저우시[4] 남송 때의 경학가이자 관료. 복건(福建) 포성(浦城) 사람으로 자는 경원(景元), 혹은 경희(景希)이며 호가 서산(西山)이기 때문에 진서산(眞西山)이라는 호칭으로 자주 불린다. 주희(朱熹)를 사숙(私淑)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대학연의』(大學衍義), 『심경』(心經)이 있다. 두 저작 모두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5] 한유의 이와 같은 시각은 당송팔자백선(唐宋八字百選)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논불골표(論佛骨表)에서 극명히 드러난다.[6] 각각 '물음에 답함', '칭찬함과 꾸짖음', '서로 소통함', '비유를 들어 타이름'을 뜻한다.[7] 구양수 또한 유학자로서 유교의 사상을 고집한 한유를 비교적 더 숭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