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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7:56:10

안톤 데니킨

데니킨에서 넘어옴

파일:러시아 국기.svg
남러시아군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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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데니킨 표트르 브란겔 }}}}}}}}}
<colbgcolor=#fff><colcolor=#0039A6> 초대 남러시아군 총사령관
안톤 이바노비치 데니킨
Анто́н Ива́нович Дени́кин
파일:Anton_Denikin.jpg
출생 1872년 12월 16일
러시아 제국 프리비슬린스키 지방 브워츠와베크
사망 1947년 8월 8일 (향년 74세)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
국적
학력 니콜라예프 총참모부 사관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중장
경력 남러시아군 총사령관
1919년 1월 8일 ~ 1920년 4월 4일
참전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1. 개요2. 생애
2.1. 러시아 내전 이전2.2. 러시아 내전2.3. 러시아 내전 이후
3. 기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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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군인.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특히 러시아 내전에서 남러시아군을 지휘해 볼셰비키의 위협이 되었다.

2. 생애

2.1. 러시아 내전 이전

러시아 제국 블로츨라베크 (현 폴란드 브워츠와베크) 출신으로 해방된 농노였던 러시아계 아버지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고 그의 아버지의 군인 연금으로 근근히 먹고 살았지만 1885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마저도 끊기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1890년 자원해서 러시아 육군에 입대했다가 적성에 맞았는지 장교를 목표로 하게 되고 이를 성취한다.

군생활 중에는 러일전쟁 중 극동에 배치되었던 잠깐을 제외하면 바르샤바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지토미르 등 제국의 서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카르파티아나 루마니아 방면에서 동맹국 군대를 격파하며 실적을 쌓았다. 특히 저돌적인 공격과 부상을 입고서도 싸우는 용맹함으로 큰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국력은 총력전을 견딜 수 없었고 1917년 3월 러시아 혁명이 터지며 러시아 공화국이 세워진다. 공화국은 구 제국의 정부가 이어진 임시정부와 민중에서 조직한 소비에트의 두 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민중이 새 정부에 기대한 것은 전쟁의 종결이었지만 임시정부는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하는 실책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브루실로프 공세로 이름이 높았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데니킨은 브루실로프의 참모가 되었다. 그러나 브루실로프도 이미 막장이었던 러시아군의 상황을 전부 개선할 수는 없었다. 정부의 명령으로 시작된 케렌스키 공세에서 러시아는 참패했고 브루실로프는 해임되었다.

데니킨은 브루실로프의 후임으로 들어온 라브르 코르닐로프 아래에서도 이전의 직위를 유지했다. 수구적인 군인이었던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고 데니킨 역시 이에 동참한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소비에트의 노동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분쇄되었고 코르닐로프와 데니킨 등 반란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2.2. 러시아 내전

코르닐로프 쿠데타로 케렌스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볼셰비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지금이야말로 봉기할 때임을 주장하며 10월 혁명을 일으켰다. 케렌스키를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케렌스키를 몰아내는 일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이 혼란 속에서 코르닐로프를 비롯한 쿠데타의 주동자들은 탈옥에 성공했다. 코르닐로프와 같이 수감되어 있던 데니킨은 탈옥 후에도 그와 함께 남러시아의 돈 지방으로 넘어갔다. 코르닐로프를 중심으로 결성된 의용군은 그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볼셰비키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더 남쪽의 예카테리노다르로 거점을 이동한다. 이 작전은 1차 쿠반 전역 혹은 얼음 행진 작전이라 명명되었다. 작전의 최종목표는 볼셰비키가 장악한 도시인 예카테리노다르의 함락이었지만 병력의 부족으로 공성은 지지부진하게 돌아갔다. 1918년 4월 13일, 공성의 와중에 코르닐로프가 작전 회의를 하고 있던 근처 마을의 민가에 포탄이 떨어지며 예카테리노다르 함락은 실패로 돌아간다. 코르닐로프의 사망 이후 데니킨은 의용군 패잔병들을 이끌고 안전하게 퇴각하면서 코르닐로프의 후임 사령관 자리에 오르게 된다.

1차 쿠반 전역은 볼셰비키의 공세로부터 안전한 거점을 확보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산발적으로 봉기한 여러 반볼셰비키 세력들에게 의용군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홍보하는 효과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드로즈돕스키는 루마니아 국경에서 돈 지역까지 행군해서 합류했고 안드레이 시쿠로의 쿠반 카자크, 특히 표트르 크라스노프가 아타만에 당선되면서 돈 카자크가 의용군과 협력하며 남러시아군이 결성되었다. 6월 하순, 8천 명까지 성장한 의용군은 2차 쿠반 전역을 개시한다. 이번 작전은 성공했고 남러시아군은 예카테리노다르에 입성해 코르닐로프의 시신을 다시 매장하며 이전의 패배를 설욕한다.

거점을 확보한 남러시아군은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세력을 확장한다. 카자크들을 통해 장악한 돈, 쿠반 지역 외에도 캅카스 북부에서 승리하며 소치까지 정복하고 캅카스의 볼셰비키를 모스크바에서 고립시키는데 성공한다. 흑해를 접하면서 영국 등 외국과 접촉해 해상을 통해 무기를 지원받으며 병력의 질적인 수준 역시 상승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데니킨의 부관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포격에 맞아 전사, 기갑과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꿰뚫어본 명장 미하일 드로즈돕스키는 상처가 덧나 전사, 서부 백군에서 행정을 맡았던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데니킨에게로 합류하러 가던 중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는 등 유능한 인사들이 차례대로 사망한다. 한편 새롭게 합류한 크라스노프나 표트르 브란겔은 동쪽의 차리친을 뚫어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러시아국[1]과 합류하는 것을 우선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데니킨과의 불화만 생기게 된다. 크라스노프는 일단 단독으로 수차례 차리친을 공격하지만 그루지야 출신의 콧수염난 정치장교가 방어하는 차리친은 모스크바의 지원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뚫리지 않는다.

해를 넘겨 1919년 초 남러시아군은 병력은 8만명까지 달하고 영토로는 크림반도를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흑해 함대가 백군에 합류하면서 외국으로부터의 보급 역시 꾸준히 공급받을 수 있었다. 말 안듣는 크라스노프는 아타만 선거에 떨어져서 해외로 망명했고 데니킨에 충성하는 아프리칸 보가옙스키가 후임으로 당선되면서 명령 계통 문제도 일단은 해결되었다. 브란겔은 계속해서 동쪽의 콜차크 제독과 합류할 것을 주장했지만 데니킨은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데니킨의 최악의 실책이 된다.

데니킨은 모스크바까지 가는 경로로 우크라이나를 정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일단은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파울로 스코로파즈키를 헤트만으로 하는 독립국 (실상은 친독 괴뢰국) 우크라이나국이 세워졌지만 그 뒷배인 독일 제국이 망하면서 해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말그대로 무주공산이 된 우크라이나에는 볼셰비키 세력뿐만 아니라 마흐노우슈치나(흑군), 지역 공동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홀로드니야르 공화국(녹군), 시몬 페틀류라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우크라이나 인민군)에 기타 군소 세력들까지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의 분열을 이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강경한 러시아 제국주의자였던 데니킨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남러시아군은 이들 모두를 공격한다.

데니킨의 우크라이나 공략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7월 초부터 쾌진격을 펼쳐서 하리코프, 예카테리노슬라프, 폴타바를 거쳐 8월 중순에는 키예프까지 도달한다. 데니킨은 그대로 고삐를 늦추지 않고 모스크바로의 돌진을 시작했다. 쿠르스크, 보로네시, 체르니히우를 거쳐 10월 중순에는 모스크바 남쪽으로 100여 km 남은 오룔툴라까지 다다른다.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병력만 4만 명이었고 다른 방면의 군사까지 전부 합하면 15만명까지 달했다. 이 시점이 남러시아 백군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이렇게 빠르게 진군하는 동안 그다지 양호한 편은 아니었던 남러시아군의 보급선은 더더욱 늘어졌다. 또 우크라이나의 군소 세력들은 패배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캐치한 트로츠키는 마흐노와 접촉했다. 동맹이 체결되며 마흐노가 데니킨 군의 후방을 급습해 보급선을 차단했다. 데니킨도 다른 세력과의 연계로 이를 돌파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국 측에 접촉했지만 데니킨이 이전에 보여줬던 러시아 제국주의자로서의 모습과 수구성 때문에 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데니킨은 보급선을 지키기 위해 정예 부대를 후방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트로츠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원래부터 병력의 숫자는 적군이 훨씬 많았고 트로츠키가 강제 징집령을 내리며 그 격차는 훨씬 커졌다. 게다가 소비에트 정부는 철도를 장악하고 있었고 데니킨이 돌격하는 사이 시베리아와 발트 방면에서 승리하며 생긴 여유 병력들이 철도를 통해 남러시아군을 향해 빠르게 재배치되었다. 데니킨이 직접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수만명 정도였지만 적군은 한번에 수십만의 병력까지도 동원할 수 있었다. 일선 지휘관도 무능력한 인물들에서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같은 유능한 인재로 대체되었다. 적군의 공세는 대성공이었고 남러시아군은 진군한 것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후퇴했다.

12월, 시베리아 방면에서 후퇴하고 있었던 콜차크는 러시아국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데니킨에게 양도할 것을 제안하나 역시 후퇴하느라 정신이 없던 데니킨은 이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하지 못한다. 그 와중에 브란겔과의 불화는 더욱 커져서 결국 브란겔은 사퇴하고 코스탄티니예로 망명했다.

1920년 1월이 되자 남러시아 정부의 영토는 모스크바 공세 이전의 돈 지방과 크림반도까지 축소되었다. 여기서 후퇴를 멈추고 영국 등 해외 열강의 추가적인 지원을 기대하며 버티지만 세묜 부됸니의 기병에 패배한다. 외국의 입장에서는 시베리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안전을 보장받고 모국으로 철수하며 개입 명분이 사라졌고 1차대전이 종료되고 데니킨의 폭압적인 정책이 알려지며 내부 여론도 좋지 않아졌다. 결국 3월에는 돈 지방에서도 대패하면서 노보로시스크 항을 통해 크림반도로 후퇴를 시도한다. 이 과정은 무질서로 점철되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배에 오르려다가 깔려 죽거나 물에 빠지거나 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4만명 정도가 배에 오르지만 말이나 중화기는 챙기지도 못하고 소총만 겨우 들고 있는 맨몸이었다. 무엇보다 탈출하지 못한 2만명(대부분 녹군이나 카자크, 민간인)의 운명은...

백군의 다른 장군들도 데니킨의 독단과 무능에 질려버렸고 반감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결국 데니킨은 4월 17일 브란겔을 후임으로 지명하며 사퇴했다. 사퇴 후에는 극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코스탄티니예로 망명했다. 브란겔이랑 인사는 했을려나

2.3. 러시아 내전 이후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한 데니킨은 다시 영국으로 망명했고 영국에서 벨기에, 헝가리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다른 망명 백계 러시아인들이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루었던 반면 데니킨은 이들과 교류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정치적으로도 은퇴를 선언하고 전업 작가가 되어 러시아 내전 회고록, 러시아 제국의 역사, 군사학 등의 책을 저술했는데 글재주가 있었는지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그가 망명해 있는 사이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발흥했고 백계 러시아인들은 반공주의라는 구호에 혹해 파시즘을 지지한다. 그러나 데니킨은 반공주의자임에도 파시즘을 매우 싫어했다. 1940년 프랑스가 함락당하자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던 데니킨은 프랑스국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독일군에 붙잡힌다. 망명 백계 러시아인들을 모아 부대를 조직하려던 나치는 데니킨도 회유하지만 데니킨은 끝까지 협력을 거부했고 온 가족이 독일까지 끌려가서 수감되기도 한다. 명분이 영 부족한지라 금방 풀려나긴 했지만 데니킨은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으며 사실상 연금상태에 들어간다. 그는 소련은 밉지만 러시아의 해방은 러시아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치와 협력하는 길을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1947년에 교수형으로 죽인 표트르 크라스노프나 안드레이 시쿠로와는 다르게 데니킨을 기특하게 여겨 데니킨을 처형 대상에서 제외한다. 그런데 이 소식이 거꾸로 전해져서 데니킨이 소련의 목표 중 하나라는 잘못된 정보가 데니킨의 귀에 들어왔고 데니킨은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망명 러시아인은 비자 받기가 힘들어서, 제2공화국 임시정부가 전후 폴란드에 잠시 설립된 시기에는 폴란드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폴란드 국적이라 주장하며 망명을 신청했다.

1947년 8월 7일 미국에서 사망했다. 소련 붕괴 이후 2005년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러시아의 돈스코이 묘지로 이장되었다.

3. 기타

4. 둘러보기

<colbgcolor=#666633> 파일:러시아 국기.svg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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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원수
Генерал-фельдмаршал
육군
원수
명예 파일:몬테네그로 왕국 국기.svg 니콜라 1세 | 명예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카롤 1세
대장
Генерал
파일:러시아 제국 보병대장(1차대전).png/파일:러시아 제국 기병대장(1차대전).png
육군
병과대장
알렉세이 쿠로팟킨보병 | 라브르 코르닐로프보병 | 니콜라이 유데니치보병 | 미하일 알렉세예프보병 | 알렉세이 칼레딘기병 |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기병
해군
대장
-
중장
Генерал-лейтенант
육군
중장
안톤 데니킨 |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 표트르 브란겔 | 표트르 크라스노프 |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 니콜라이 유나코프 | 이오시프 도브보르무스니츠키 | 파벨 스코로파드스키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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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콜차크
소장
Генерал-майор
육군
소장
다비트 시만손 | 이반 부이비트 | 실베스트르 주콥스키 | 이반 벨랴예프 | 안드레이 아우잔 | 미하일 디테리흐스
해군
소장
게오르기 스타르크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 :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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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콜차크 제독의 쿠데타 이후 흩어져 있던 각지의 백군 세력들은 일단은 러시아국 휘하에 있었다.[2] 러시아 백군 군벌 장교와 병사들도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꽤 있었다. 특히 데니킨의 세력인 남러시아군에서 이러한 포그롬은 극우 성향의 자원병들이나 카자크병들에 의해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편이다.[3]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에 개입한 독일군 및 폴란드군도 러시아 백군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낮은 비율이다.[4] The Pogroms in Ukraine, 1918-19: Prelude to the Holocaust에서 로솔린스키리베가 요약한 해설#[5] 본인이 폴란드계 귀족혈통이라는 자각도 있었고 구 폴란드 지역에는 러시아 영토뿐만이 아니라 동맹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역 부분도 있었으니 협상국인 러시아령 폴란드 지역은 제외하고 패전한 동맹국 영역에 한정에서만 독립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