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9:15:14

도요토미 히데카츠

이름 도요토미 히데카츠
豊臣秀勝
생몰년도 1569년 5월 2일 ~ 1592년 10월 14일 23세
1. 개요2. 상세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 도모(日秀)[1]의 아들이자 히데요시의 조카이다. 친형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와 같이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다. 하시바(羽柴) 성을 받아 하시바 히데카츠라고도 불렸다가 1588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오다 노부나가의 4남 등의 인물과 동명이라 도요토미 히데카츠로 주로 통용된다.

2. 상세

1590년에는 오다와라의 정벌에 참가했다. 카이와 시나노 영지를 하사받았으나 미노기후로 전봉되었고[2] 히데요시의 1592년에 히데요시의 측실인 요도도노(淀殿)의 여동생인 아자이 고우(浅井江)와 결혼하여 딸 사다코(完子, 1592 ~ 1658)를 두었다.

1591년 3월 히데요시에 의해 기후성의 성주가 되었고, 동년 11월에 참의가 되면서 기후 중납언(岐阜中納言),[3] 기후재상(岐阜宰相)이란 별명으로도 불리기도 했다.[4]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는 태합이 된 히데요시가 관백인 조카이자 양아들인 히데츠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데츠쿠는 중국의 관백으로 삼고 히데츠쿠의 친동생인 히데카츠는 조선의 국왕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실려있어 히데요시가 히데카츠를 총애했음을 알 수 있다.[5]
조선의 서울이(음력으로) 이달 22일에 점령되었다. 이 때문에 나는 조선으로 건너가는 일을 더욱 서두르고 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전 중국을 남김없이 복종시킬 생각이다. 따라서 너는 중국의 관백으로서 그 땅으로 건너가거라. ... 세계를 나누어 가진 세 나라. 곧 일본·중국·인도 가운데에서 나에게 거스를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어쨌든 명예와 명성을 존중하는 까닭에 병사들이 매우 화려하게 꾸미고 올 필요가 있다. ... 일본의 고요제 천황을 중국의 수도인 북경으로 옮길 것이니, 그것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까닭에 필요한 준비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천황이 중국으로 출발하는 것은 내년이 아니면 그 다음 해가 될 것이다. ... 일본의 천황 자리에는 황태자나 하치조궁을 임명하게 될 것이다. 조선의 국왕 자리에는 기후의 재상을 앉히게 될 것이다.[6]

1592년 4월 하순 9번대의 대장으로 나가오카 다다오키[7] 등의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나 10월 거제도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기집 재상(岐集宰相) 평수충(平秀忠)이란 자로 등장하며 경상도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

당시 거제에서는 옥포 해전에서 배를 잃은 일본군들이 송정고개 전투 이후, 고현성을 함락시켰다가 거제 주민 및 의병들에 의해 지속적인 전투를 겪었다. 이후 일본군은 고현성을 포기 퇴각하면서 하청장터 전투, 밀바대들 전투 등으로 패퇴하기도 했다. 죽토리 돌틈에서는 윤영상이 활로 왜장을 쏘아 쓰러뜨렸고, 원균의 장계로 선무원종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다.[9]

오다 히데노부는 히데카츠의 양아들로[10] 히데카츠가 죽자 기후성주와 참위를 계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1] 이에 오다 히데노부 역시 참위의 별칭을 따라 기후중납언과 기후재상으로 불렸다.

3. 대중매체에서

2011년 NHK 대하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에서 고우의 남편으로 등장한다.

고우의 다정다감한 남편으로 나오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우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감행한다.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으며, 거제도에서 징발에 항거하는 조선백성을 베려던 부하를 제지하려다 자신이 칼에 맞아 부상을 입고 회복하지 못해서 병상에서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1] 법명이 즈이류인묘에닛슈니(瑞龍院妙慧日秀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동복 누나이다. 생몰은 1534 ~ 1625[2]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고쿠다카가 적다고 불평했다가, 히데요시를 노하게 만들어 고쿠다카가 줄어들었다.[3] 분로쿠의 역으로 기후 하시바 가문의 도요토미 히데카츠(岐阜中納言)가 죽자 히데요시는 그 유령인 미노국 13만 석과 기후 성을 오다 히데노부에게 주었다. 이때 히데노부(秀信)는 히데카쓰(秀勝)의 양자로 계승했다.#[4] 이어 11월 참의에 맡겨졌기 때문에 기후재상이라고 불렸다.#[5] #[6] #[7] 長岡忠興 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8]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2511011_006[9] # # #[10] 세주군기[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