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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관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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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건축물4. 동관왕묘 소장유물5. 외부 링크6. 보물 제142호7. 관련 문서
7.1. 동묘시장

1. 개요

東關王廟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 또는 동묘(東廟)는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 즉 관왕을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묘앞역[1] 근처에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줄임말을 써 '동묘'[1][3]라고 부르기도 하고 공자를 모시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줄여 부르는 문묘(文廟)에 대응해 무묘(武廟)라고도 불린다.

2. 역사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들은 이후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 땅에 관왕묘를 세우고자 하였다. 조선 조정에도 협력을 요청하고 명나라 조정은 이에 호응하고 적극 지원을 하면서 명나라는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고 하였다. 이중 동관왕묘는 경리장수 양호의 후임으로 와 있던 명 장수 만세덕(萬世德)이 권유하여 만든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선조 32년(1599) 공사를 시작하여 선조 34년(1601)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4] 명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사를 짓는 중에 신하와 유생들, 그리고 언론삼사는 백성들이 고생한다고 관왕묘를 짓는 것을 반대하였다. 아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관왕묘 건축을 두고 사헌부가 올린 상소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동관왕묘(東關王廟)를 건립하는 일은 중국의 분부에서 나왔으니, 이는 부득이한 거조였습니다. 역사를 기해년(1599) 8월에 시작하여 지금 20개월이 되었는데, 한 달 동안의 역군(役軍)이 2백여 명에 달합니다. 그 동안에 약간명이 미처 도착하지 않은 적도 있지만 매월의 역군을 합하면 그 숫자가 과연 얼마이겠습니까. 목재와 철물 등 소용되는 잡물(雜物)을 분정(分定)한 숫자가 한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지은 간수가 많지 않고 역사가 한창이어서 아직도 준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군들이 철수한 후에도 백성들이 쉬지 못하니, 소동과 원망이 이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전후 감독관이 군인들을 부리고 재료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외람되고 추잡한 일이 많았는데 항상 중국 장수를 핑계하면서 일부러 지연시켜 세월만 끌고 있으므로 공사가 끝날 기일이 전혀 없는 채 사람들의 말만 많으니, 뜻 있는 사람들이 분통해 한 지 오래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힘이 탕갈된 때에 군사 하나를 내고 돌 하나, 나무 하나를 운반하는 것이 모두 백성들의 고혈에서 나오는 것인데, 관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에만 힘을 쓰고 공(公)은 돌보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속이고 백성을 해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직임에서 체직되었다 하여 벌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뒷사람들을 경계하고 장래를 경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금년 이후에 맡은 사람은 날짜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경자년 이전의 낭청(郞廳)과 감역관(監役官)은 파직을 명하소서. 도청 당상(都廳堂上) 역시 검칙을 잘못한 과실이 없지 않으니, 아울러 추고를 명하소서. 시전(市廛)의 백성들이 난후에 겨우 모였는데 첫째로는 중국 장수들의 가렴주구에 곤란을 겪었고 두 번째로는 국휼(國恤)의 수요에 응하느라 곤란을 겪었는데, 심지어는 저포(苧布)를 바치고 일체 공무역(公貿易)의 일까지 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재력이 탕갈되어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평시서(平市署)의 관원은 사리상 무마하여 너그럽게 돌보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데도 감히 각색(各色) 시전에서 매달 명목없는 쌀을 거두어 사적으로 쓰기 때문에 원성이 자자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장무관(掌務官) 직장(直長) 송희성(宋希聖)은 파직시키고 영(令) 윤기정(尹起禎)은 추고하소서.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양성해(梁成海)는 인물이 용렬하고 글을 몰라 양곡을 관리하는 직임에 맞지 않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동관왕묘의 일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당 파직해야 할 인원은 서계(書啓)하고 나머지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38권, 선조 34년(1601) 6월 19일 2번째 기사

논란이 많았음에도 공사는 강행되었고, 건축은 무사히 끝났지만 선조와 신하들은 동관왕묘를 홀대했다. 선조의 왕위를 이은 그 아들 광해군은 선왕과 달리 동관왕묘의 수리를 명하고 제례를 지내도록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동관왕묘에 관한 기록은 실록에 나오지 않다가 숙종 때에 가서야 나온다. 숙종은 관우의 충절로 시도 지었고[5] 동관왕묘에 참배도 하였다. 숙종 17년(1691) 2월 17일에는 무안왕묘(동관왕묘)를 보수하라고 하기도 하였다.[6] 이후의 왕인 영조도 동관왕묘에 자주 참배를 했고, 영조 15년(1739) 6월 9일에 동관왕묘를 중수하도록 하였다.[7] 정조도 관왕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정조는 동관왕묘에 비석을 세우가 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제국 때에는 고종이 관왕묘를 적극 지원하고 관왕을 관제(關帝)로 높여 관제묘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수많은 관왕묘들이 훼손, 철거되었다. 원래 동대문 밖에 동관묘,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묘, 명륜동에 북관묘,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묘, 종로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묘의 다섯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관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고 남관묘는 일제가 목멱산(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헐어버린 것을 지금의 사당동으로 옮겨지어 지금에 이르고, 다른 세 곳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2011년 10월 동묘의 금동 관우상 뒤편 일월오악도 뒤에서 운룡도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운룡도는 조사를 받고 원래대로 일월오악도로 가려졌다.

3. 건축물

고종이 추증한 관우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가 현판에 적혔다. 동관왕묘는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전쟁 이후에 명나라와 조선에서 우호를 다지면서 굉장히 공을 들여서 지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수준 높은 문화재다.
동관묘는 특히 성균관의 문묘와 나란히 무묘(武廟)라 불릴 만큼 격이 높았는데, 춘추로 치러지는 대제(大祭) 때에는 임금이 손수 무복(武服)을 입고 참례를 할 정도였으며 지방에도 성주, 안동, 남원, 강진의 네 곳에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세운 관왕묘가 있었다.

동관왕묘는 크게 5개 건물로 구성된다. 금동관우좌상 뒤에 세우는 일월오봉도는 병풍 일고 폭에 490×259 (cm) 크기로 그렸는데 일월오봉도 중 가장 크다. 전례와는 달리 병풍의 폭이 홀수이고 붉은 해가 왼쪽, 흰 달이 오른쪽에 배치된 특이한 작품이다. 일월오룡도 외에 황적청백흑의 다섯 오조룡을 묘사한 구룡도 등의 회화, 석조, 편액 등도 조화롭게 만들어져 있고, 신상에 입히기 위한 면류관, 조복, 옥대 등의 희귀한 의복 유물도 함께 소장했다.
사진 설명
파일:외삼문.jpg
외삼문(外三門)
서울 동관왕묘의 정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면서 가운데 3칸의 지붕이 양옆의 1칸보다 높은 솟을지붕이다. 정면 5칸 가운데 중앙의 3칸은 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고 좌우 한 칸에는 벽돌로 옆면을 막고 살문을 단 마루방을 들였다. 지붕마루에는 모두 양성을 하고 취두와 용두를 올려놓았다. 대문 좌우로는 작은 일각문을 두었는데 이 문은 바로 담장으로 연결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묘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한미자,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파일:내삼문.jpg
내삼문(內三門)
서울 동관왕묘의 중문(中門). 정전 앞의 문이자 외삼문 뒤의 문이다. 문이 3개 뚫려 있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초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가로보다 세로가 칸수도 많고 길이도 정면과 비슷하여 문으로서는 특이한 평면 구조를 보인다. 측면 벽의 가운데 2칸에만 창방 높이까지 벽돌벽을 쌓아올린 모습이 특이하다. 지붕마루는 대문과 마찬가지로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았으며, 사래에는 토수를 끼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묘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한미자,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파일:정전.jpg
정전(正殿)
서울 동관왕묘의 정전. 이곳에 관우의 동상이 있다. 정면은 5칸, 측면은 6칸으로 측면이 정면보다 길다. 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9,315m²로 되어 있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정(丁)' 자 모양과 '일(一)'자 모양이 합쳐진 '공(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그 밖에도 동무, 서무가 각각 정전의 동쪽, 서쪽에 있고, 사조어제무안왕묘비와 같은 비석들이 있다.

파일:동무.jpg 동무
파일:서무.jpg 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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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관왕묘 소장유물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 동관왕묘 금동관우좌상(東關王廟 金銅關羽坐像)

파일:관우상.jpg

관우(關羽, 160~219)는 중국 촉(蜀)의 장수이지만, 그의 사후 당송대 이후 신(神)으로 숭앙되어 중국 각지에 관제묘(關帝廟)가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1597년 정유재란 이후 관왕묘가 세워지기 시작하였고, 동관왕묘는 명 황제와 조선 선조의 합심과 한중 장인의 기술로 1601년 완공되었다. 동관왕묘 정전 내부 중앙에는 화려한 단청이 칠해진 당가(唐家)가 세워져 있고, 당가의 내부 중앙에는 도금된 <금동관우신상>이 용상(龍床) 위에 앉아 있다. 관우상은 정전 중앙에 있으며 앞쪽 좌우로는 형주에서 관우를 모신 관평, 조루, 주창, 왕보가 관우상을 호위하듯이 서 있다. 특히 동관왕묘에서 모셔지는 금동관우좌상은 구리 4천여 근(약 2.4 t)을 들여 만든 높이 2.5 m 미터짜리 거대한 황금색 금동신상으로, 조선시대 관우상 중 가장 크다. 1601년에 제작되었는데, 영조통기(營造通記)에 따르면 명나라 장수 10명이 풍로 10개에 구리 3800근을 녹이려다가 한 번 실패하고, 감관 한빈(韓斌)이 조선의 구리장인을 모아 300근을 더 넣고 녹여서 제조했다고 한다. 즉, 한중합작으로 만들어진 명작인 셈이다.

● 동관왕묘 소조시녀입상(東關王廟 塑造廟侍女立像)

● 동관왕묘 소조배위입상(東關王廟 塑造拜位立像)

● 북관왕묘 소조관우좌상(北關王廟 塑造關羽坐像)

● 북관왕묘 소조배위입상(北關王廟 塑造拜位立像)

● 서관왕묘 감실 및 목조관우, 유비, 장비좌상(西關王廟 龕室 및 木造關羽, 劉備, 張飛坐像)

● 보정대사감실 및 소조보정대사입상(普淨大師龕室 및 塑造普淨大師立像)

● 동관왕묘 일월오봉도(東關王廟 一月五峰圖)

● 동관왕묘 구룡도(東關王廟 九龍圖)

● 동관왕묘 내삼문 판벽화(東關王廟 內三門 板壁畵)

● 충진사 감실(忠眞社 龕室)

● 용문양 감실(龍紋樣 龕室)

●동관왕묘 옥대 및 옥대함(東關王廟 玉帶 및 玉帶函)

● 북관왕묘 옥대 및 옥대함 (北關王廟 玉帶 및 玉帶函)

● 동관왕묘 면류관(東關王廟 冕旒冠)

● 동관왕묘 황룡선(東關王廟 黃龍扇)

● 북관왕묘 황룡선(北關王廟 黃龍扇)

● 동관왕묘 북 일괄(東關王廟 북 一括)

● 동관왕묘 청룡언월도 일괄(東關王廟 靑龍偃月刀 一括)

● 동관왕묘 석조해태상(東關王廟 石造獬豸像)

● 동관왕묘 석조사자상(東關王廟 石造獅子像)

● 동관왕묘 석제드므(東關王廟 石製드므)

● 東關王廟 등롱석(東關王廟 燈籠石)

●북관왕묘 등롱석(北關王廟 燈籠石)

●동관왕묘 향로석(東關王廟 香爐石)

● 북관왕묘 향로석(北關王廟 香爐石)

● 동관왕묘 용두석(東關王廟 龍頭石)

● 동관왕묘 당간지주(東關王廟 幢竿支柱)

● 동관왕묘 금잡인비 (東關王廟 禁雜人碑)

● 동관왕묘 하마비(東關王廟 下馬碑)

● 현령소덕무안왕묘 편액(顯靈昭德武安王廟 扁額)

● 현령소덕무안왕묘 편액(顯靈昭德武安王廟 扁額)

● 동관왕묘 서무 무안왕비(東關王廟 西廡 武安王碑)

● 동관왕묘 동무 무안왕비(東關王廟 東廡 武安王碑)

●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 편액(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扁額)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 편액(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扁額)

●만고충절 천추의열 편액(萬古忠節 千秋義烈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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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외부 링크

6. 보물 제142호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밖에 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이다. 동관왕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동관왕묘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7. 관련 문서

7.1. 동묘시장

이곳에서 명칭이 유래된 시장으로, 통칭 '동묘'라 지칭되는 벼룩시장이다. # 이곳에서 구입한 보세 옷이나 고령층의 등산복 차림을 최근 동묘 패션으로 지칭하는 일이 잦아졌다.
[1] 동묘앞역의 동묘가 바로 이 동관왕묘다.[1] [3] 고종 연간에는 진령군의 주청 등으로 서묘, 북묘 등도 건립되었다. 북묘는 명륜동 소재로 알려졌고, 갑신정변 당시 고종의 피신처이기도 했고 동묘에 합사된다.[4] 건축 이유에 관한 서술은 뒤에 나와있다.[5] 숙종실록 24권, 숙종 18년 9월 15일 신유 1번째기사 관련 기사[6] 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2월 27일 계미 1번째기사 관련 기사[7] 영조실록 49권, 영조 15년 6월 9일 갑신 1번째기사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