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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09:14:53

동양척식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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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척식주식회사
[ruby(東洋拓殖株式會社, ruby=とうようたくしょくかぶしきがいしゃ)]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파일:동양척식주식회사 마크.png
국가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설립 1908년 12월 18일
해체 1945년 9월 30일
업종명 식민지 개발 사업, 국제 무역 사업
기업 분류 주식회사
창립자 이토 히로부미
주요 주주 조선총독부 (40%)
본사 소재지 일본 도쿄

1. 개요2. 역사3. 해방 이후4. 동척 지점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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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riental_Development_Company.jpg
경성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옥
일본 제국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 이득 착취를 위해 설립한 국책 회사. 줄여서 '동양 척식회사' 또는 '동척'(東拓, とうたく)이라고도 한다.

'척식'이란 "한 국가에서 국외의 미개지를 개척하여 자국민의 이주와 정착을 정책적으로 촉진하는 행위"를 뜻한다.(#) 즉, 식민지 개척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조선뿐 아니라 대만, 오키나와, 홋카이도, 남양 군도 등을 대상으로도 쓰였다. 동척을 본떠서 1935년 '만주척식공사(満州拓殖公社)', 1936년 '대만척식주식회사(台湾拓殖株式会社)', '남양척식주식회사'(南洋拓殖株式会社)도 세워졌다. 그리고 패전 이후 전부 해산되었다. 홋카이도에는 1968년 폐지된 '홋카이도 척식철도(北海道拓殖鉄道)', 1997년에 파산한 '홋카이도 척식은행'이 존재했다.[1] 오늘날까지 이 단어가 사용되는 곳은 척식대학과 홋카이도 지역 버스 회사인 홋카이도 척식 버스뿐이다.

2. 역사

1905년 한국통감부가 설치된 지 3년 후인 1908년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토지 및 자원 수탈 목적으로 인도 제국을 식민지화했던 대영제국동인도 회사를 참고하여 세워진 회사이다. 식민지 개척회사를 세워서 조선을 수탈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1908년 일본 정부의 훈령 및 내각 의회의 승인 하에 따라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 통과되자 조선에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한 척식(拓殖) 사업하에 본 회사를 설립하였다.

본 회사는 조선이 식산(殖産) 진흥을 담당하고 일본에서 근면(勤勉)하고 농업에 전문성을 가진 농민을 육성하여 진보된 농법 전수와 식산사업에 이바지한다는, 듣기 좋은 목적으로 설립되었다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조선의 농광산물 등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역할을 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된 토지 조사 사업에서 토지를 직접 관리하거나 싼 값에 지주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직접 관리하는 토지의 소작인에게는 50%가 넘는 소작료를 부여했다.

경술국치 이후 동척은 조선으로부터 출자받은 토지를 매입하고 국유지를 인수했으며 막대한 면적의 삼림지를 매입하였다. 삼림지는 임산물 개발에 쓰였고, 국유지를 포함한 농토는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이나 조선인 대지주 등에 불하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에서의 각종 사업을 추진하면서 사세를 빠르게 불렸고, 경성부에 세웠던 본사를 1917년 도쿄부 우치사이와이초(内幸町)로 이전하였다.[2]

동척이 영위한 사업 분야는 소작을 부리는 것부터 광공업, 제철, 철도, 금융, 유흥 등 여러 분야에 손을 뻗었고, 브라질이나 프랑스령 동인도에 투자하고 은행을 개설하는 등 해외진출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동척은 조선의 식민통치를 위해 정부 차원에서 세워진 국책회사였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를 가진 초거대 기업이었다. 공기업이라 일대일 비교는 의미가 없지만 시가총액은 미쓰비시, 미쓰이 같은 일본의 대표 거대재벌보다 높다고 평가된다.

1922년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장에서 조선인 소작농을 중심으로 생존권 투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동척은 이를 무시하고 한반도에 이민을 왔던 일본인들을 동원하여 총을 지급하고 투쟁을 진압한 바 있다. 이 때 1926년 북률 출신이었던 나석주 의사(義士)가 경성부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식산은행 사옥에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3]

3. 해방 이후

1945년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동척도 해체되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45년 9월 30일에 식민지 기관에 대한 해체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동척도 법적으로 해체되었다.

38선 이남 조선에 있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모두 몰수되었고, 조선 내 일본인 소유 재산과 함께 미군정 훈령에 따라 설립된 공기업인 '신한공사(新韓公社)'가 관리하였다. 신한공사는 그렇게 보유한 재산을 조선의 농민들에게 매각했다.

이후 남조선과도정부의 중앙토지행정처로 개편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농림부의 특수토지행정처에서 흡수되어 소멸하였다. 이후 동척에서 관리하던 국유 토지 관련 업무는 기획재정부로 이관됐고, 기획재정부는 조달청을 통해 국유재산 총괄 관리하는 공기업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설립하여, 토지 관련 기능을 모두 캠코로 이전하였다.

광복 후 관리 소홀로 땅의 등기가 말소되지 않아서, 전국 18군데의 땅이 2013년까지도 동척의 명의로 되어있다. 다만 8.15 광복과 그 이후 GHQ의 조치로 한반도에 잔류한 일본인 자산은 모두 몰수해 한국인에게 넘겨주기로 했으므로 이 땅은 자동으로 국유지가 된다. #[4]

한편 동척이 38선 이북에서 소유한 자산들은 일본의 항복 이후 들어선 소련군정이 몰수하였고,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이후 들어선 북한 정부가 보유하게 되었다.

4. 동척 지점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134758828.jpg

서울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 지사 건물은 6.25 전쟁 이후 내무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1970년 외환은행에서 매입한 후 1972년에 철거되고 1981년 1월 30일에 본점을 신축하였다. 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 영업부 건물이 옛 동척 경성지사 건물이 있던 곳이다. 동척 경성지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 자리는 병원인 제중원이 있었다.

부산목포, 대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잔재인 지사 건물이 남아있다.

파일:external/bto.or.kr/2a6a954c921393804751.jpg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은 한때 주한(駐韓) 미국 영사관으로 사용되었고, 1982년 발생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복구해서 쓰다가 문화원은 1996년, 영사관은 1999년에 각각 철수했다. 이후 건물은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되어 2003년에 부산박물관 산하 박물관인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뀌었다. 2023년 3월 1일부터는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이 되어 근현대 부산항원도심 관련 전시를 하고 있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광복 후 해군이 접수하여 기지로 사용했다. 해군이 떠난 이후 빈 건물이 되어 1998년에 철거 계획이 세워졌으나 일제의 만행을 후세에도 전하는 목적으로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지역 보존물로 존치하고 있으며, 부산과 마찬가지로 목포근대역사관 별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은 1922년 세워졌으며, 광복 후 체신청과 대전 전신 전화국으로 사용되었다. 1984년 신한 철강에 매입되었고, 이후 개인에게 매각되어 1층은 건자재상, 2층은 사무실로 쓰였다. 2021년 3월쯤에 또 다시 매각되었고, 공사를 거쳐 현재 헤레디움 미술관[주소][6]으로 새단장했다.

이외 나주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주소]가 남아 있다.

5. 기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1927년부터 1932년까지 5년간 근무한 뒤 무려 2만평의 땅을 불하받고, 이 땅을 기반으로 또 다른 식민지 수탈기구인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일제를 위한 군수사업을 하여 막대한 부를 일군 김지태의 친일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역사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나석주 의사의 동척 폭☆8 공격을 다룬 적 있었다. 어린 김두한이 일본 경찰에 쫓기다 나석주의 도움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나석주의 의거를 지켜본다. 이때 실제 역사와 달리 동척 내부에 위력이 강한 폭탄 두 방이 제대로 터져 여러 일본인들이 끔살당하고 공격이 일어나자 출동한 일본 제국 경찰 기마경찰대 및 형사대가 나석주와 교전을 벌인다. 미와 경부는 '사로잡아야 한다'며 다리를 쏘라고 명령하지만[8] 일본 경찰들도 나석주의 총에 하나둘씩 사살당하자 급해져서 여러 부위에 소총을 난사하고 결국 나석주는 총탄이 떨어지자 죽게 된다. 실제 역사와는 좀 달리 각색된 부분이 있지만 대중매체에서 동척 폭탄투척 의거를 다룬 작품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9]


[1] 현지에서는 '다쿠긴'(たくぎん, 척은)이란 약칭으로도 불렸다.[2] 해당 건물은 패전 이후 한동안 일본 국세청이 사용하다가 1976년에 철거되고 1980년다이이치칸교은행(현 미즈호은행)의 본사로 재건축되었다.[3] 다만 폭탄은 모두 불발에 그쳤고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폭탄 자체보다도 누군가가 과감히 식민지배의 중추 역할을 하는 기관을 공격한 그 자체가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야인시대에서 폭탄을 터뜨리고 미와 경부 패거리와 교전하는 모습은 각색된 것에 가깝다.[4] 영상에 등장하는 '東京市 麹町区 内幸町'이라는 일본 주소는 지금의 도쿄도 치요다구 우치사이와이초에 해당한다. 도쿄 23구로 개편하면서 옛 국정구(코우지마치구)와 칸다구를 병합해 치요다구로 만든 것.[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대전로 735 (인동)[6] 대전광역시를 공급권역으로 하는 도시가스회사 씨앤씨티에너지가 세운 재단법인 씨앤씨티마음에너지재단 운영한다.[주소] 전남 나주시 주면2길 28, 카페 영산나루 내 위치[8] 그럴것이 의열단은 점조직이라서 여기서 나석주가 사살당하면 조직의 전모를 알 길이 없게 된다.[9] 실제 역사에서 나석주 의사가 일경과 교전하여 경찰간부 여럿을 사살한 건 맞지만 현장에서 사살당하진 않고 총상을 입고 이송되어 총독부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야인시대에선 총탄이 떨어지자 일본 경찰에 끔살당한 것으로 나온다. 임동호 병원에 신원확인을 위해 이송되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직후여서 신원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