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디아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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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1대 |
이름 | 라울 디아뉴 (Raoul Diagne) |
생년월일 | 1910년 11월 10일 |
사망년월일 | 2002년 11월 12일 (향년 92세) |
국적 | 프랑스 |
출신지 | 프랑스령 기아나 생로랑뒤마로니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187cm | 80kg |
소속팀 | RC 프랑스 (1930-1940) 툴루즈 FC (1940-1944) FC 안시 (1944-1946) |
국가대표 | 18경기 0골 (1931-1938) |
감독 | 세네갈 대표팀 (1960-1961) |
가족 | 아버지 블레즈 디아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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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어린 시절
디아뉴의 어머니는 프랑스 출신의 백인이었고 아버지 블레즈 디아뉴는 세네갈 태생의 정치인으로 1914년에 프랑스 하원 역사상 최초로 선출된 서아프리카 출신 의원이자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온 군인과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식민지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또한 인종에 무관한 인간의 동등한 가치를 중시했으며 1934년 사망할 때까지 14년간 다카르의 시장을 맡기도 해서 2017년부터 문을 연 블레즈 디아뉴 공항에 이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디아뉴는 이런 집안 배경으로 인해 1910년,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프랑스령 기아나에 파견을 나갔을 때 생로랑뒤마로니(Saint-Laurent-du-Maroni)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는 생후 18개월부터 파리에서 성장했고 영특한 소년이었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이 더 컸다. 당시만 해도 운동으로 돈을 버는 것은 상류층 집안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인식[2]이 있었고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를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아들이 이겨서 프로 축구 선수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1930년부터 디아뉴는 RC 프랑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당시 RC 프랑스는 프랑스 디비지옹 1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던 강팀이었다. 1940년까지 디아뉴는 RC 프랑스에서 디비지옹 1 우승 1회, 쿠프 드 프랑스 우승 3회의 성적을 냈다.디아뉴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징집을 피하고 계속 선수로 뛸 수 있었지만 모든 프랑스의 리그가 취소되어 비공식 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그는 1940년부터 툴루즈 FC에서 활동하면서 자유 프랑스를 지원했다.
1944년부터는 FC 안시에서 뛰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2.2. 국가대표
1931년 2월 15일, 이날에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전은 디아뉴와 레블뢰 모두에 기념할만한 날이다. 디아뉴의 첫 A매치 출전일인 동시에 프랑스 축구 대표팀에 처음으로 흑인 선수가 뛴 날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디아뉴는 2번째 경기는 1933년, 3번째 경기는 1935년에 치러서 그가 대표팀에서 자리잡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때문에 그는 그 사이에 열렸던 1934년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 1937년 1월에서야 그는 대표팀의 주전급 선수가 될 수 있었고 총 18회의 대표팀 출전 기록을 갖게 된다.
대표팀에서도 그는 다재다능한 선수여서 팀의 사정에 따라 총 4개의 포지션에서 뛰었다. 1935년 무렵, 쥘 반도렌이 부상 등의 이유로 슬럼프에 빠졌을 땐 에티엔 마틀레르와 풀백진을 구성하기도 했고 1937년 이후에 주전으로 대표팀에서 주로 뛴 위치는 왼쪽 윙 하프였다.
디아뉴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의 2경기에 모두 레프트 윙 하프로 출전했지만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패하며 8강에서 탈락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40년 1월의 포르투갈전이었다.
2.3. 감독
은퇴 후 디아뉴는 코치 자격증을 얻어 여러 나라에서 축구 코치로 일했다. 1960년에 아버지의 나라인 세네갈이 독립하자 초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고 세네갈 축구계의 개척자로 평가된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검은 거미라는 별명으로 불린 디아뉴는 크고 우아하며 다재다능한 하프백이었다. 당시로는 꽤나 장신인 187cm의 키에 높이뛰기 주립 챔피언을 할 정도로 점프력도 뛰어나서 공중볼 다툼에선 디아뉴의 적수가 거의 없었으며 공격적인 성향을 갖춘 선수였다. 주 포지션은 라이트 윙 하프였지만 골키퍼를 포함[3]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 가능한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4. 뒷이야기
- 디아뉴는 흡연자여서 하프 타임때마다 루틴처럼 라커룸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 1939-40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서 디아뉴를 비롯한 RC 프랑스 선수들은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자신들의 홈구장에 살아있는 펭귄을 데려왔다. 그리고 우승했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1932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 프로 축구 리그가 창설되었고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에서조차 1910년대까지만 해도 선수들은 상상 이하의 열악한 환경에서 뛰었다.[3] 디아뉴는 RC 프랑스 시절 초창기인 1931년에도 주전 골키퍼 앙드레 타생의 부상으로 4개월간, RC 프랑스가 디비지옹 1에서 우승하던 1935-36 시즌에도 루돌프 하이덴이 연봉 문제로 인해 스쿼드에서 빠졌을 때 몇 경기를 골키퍼로 나선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