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루돌프 하이덴 (Rudolf Hiden[1]) |
생년월일 | 1909년 3월 9일 |
사망년월일 | 1973년 9월 11일 |
국적 | 오스트리아 |
출신지 | 그라츠 |
포지션 | 골키퍼 |
신체조건 | 184cm / 82kg |
등번호 | -[2] |
소속팀 | 빈 AC (1927-1933) RC 프랑스 (1933-1940) |
국가대표 | 20경기 (오스트리아 / 1928-1933) 1경기 (프랑스 / 1940) |
감독 | US 살레르니타나 1919 (1951-1952) ACR 메시나 (1952-1953) SSD 팔레르모 (1953-1954) 카라레제 칼초 (1954-1955) ACR 메시나 (1956-1957) US 살레르니타나 (1963-1964) |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전(前)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이다.2. 생애[3]
2.1. 선수 생활
2.1.1. 클럽
그라츠의 제과점 견습생이던 루디[4] 하이덴은 16살의 나이에 그라처 AC(Grazer AC) 유스팀에 입단하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골키퍼와 센터 포워드로 뛰었으며 18살 때 비너 AC로 500 실링에 이적했다.하이덴은 비너 AC에서 성인팀에 데뷔했고 곧 팀의 중요한 선수로 입지를 다졌다. 그와 함께 비너 AC는 1930년대 강팀으로 발돋움했다. 데뷔 시즌부터 ÖFB-컵 준우승을 차지했고 1931년에는 ÖFB-컵 대회 우승과 미트로파 컵 준우승의 성과를 올렸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골키퍼이자 분더팀의 주전 골키퍼답게 하이덴은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외국의 클럽들도 그의 활약에 주목했다. 하이덴의 활약을 지켜본 아스날은 1930년부터 하이덴을 영입하려 공을 들였지만 잉글랜드 축구계의 빡빡한 워크 퍼밋이 발목을 잡았고 아스날 이적은 무산되었다. 하이덴은 결국 1933년 프랑스의 RC 프랑스에 8만 프랑의 이적료로 이적했다.
프랑스에서의 첫 시즌은 11위라는 다소 실망스런 성적으로 마쳤고 이듬해엔 28경기에 출전하며 3위로 팀 순위를 끌어올렸다. 1935-36시즌의 RC 프랑스는 프랑스 축구 역사상 2번째[5]로 더블을 기록했고 그 이후에도 1939년과 1940년의 2년 연속 컵대회 우승에도 기여했다.
2.1.2. 국가대표
하이덴은 19세 되던 해인 1928년에 대표팀에 선발되기 시작했다. 그의 데뷔전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고 오스트리아는 3대0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하이덴은 첫 경기부터 클린시트를 기록하게 되었다.하지만 당시 대표팀 감독 후고 마이슬은 이후 2년간 하이덴을 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았고 1930년 3월, 하이덴은 체코슬로바키아와 2번째 시합을 치렀다. 이 프라하 원정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와 2대2로 비겼지만 하이덴은 뛰어난 퍼포먼스로 눈도장이 찍혔다.
다음 A매치인 잉글랜드전에서 오스트리아는 0대0으로 비겼지만 인상적인 세이브로 프란츨 등을 밀어내고 21살에 대표팀 주전 골키퍼가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1931년부터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분더팀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이덴 역시 대표팀의 골문을 든든히 지키며 전력에 큰 보탬이 되었고 1932년의 스탬퍼드 브리지 원정 경기에서 잉글랜드와 호각으로 싸우며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했다.
1933년 2월, 프랑스 원정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신델라, 치셰크, 샬 등의 골을 앞세워 4대0으로 대파했는데 하이덴은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에서 최고로 꼽힐 만한 활약으로 프랑스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 활약으로 하이덴은 프랑스 디비지옹 1으로 이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대표팀은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을 선발하지 않았고 하이든의 오스트리아 대표팀 커리어는 그렇게 끝났다. 1934년 월드컵에 참가조차 할 수 없었고 1937년에 하이덴은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프랑스 축구 연맹은 끊임없이 하이덴이 프랑스 대표팀에서 뛰도록 설득했고 결국 하이덴은 1940년 포르투갈을 상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랑스 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경기는 프랑스가 3대2로 이겼다.
2.2. 이후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이탈리아에서 여러 팀의 감독을 맡기도 하고 여러 사업을 시도했지만 손 대는 사업마다 망해버리는 바람에 돈을 모으는데는 실패했다. 프랑스에서 선수로 활약할 때부터 바를 운영하며 자신의 돈을 거의 다 투자했지만 바가 망하는 바람에 큰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1962년 오스트리아에 돌아와서 호텔리어로 일하며 탁구, 미니 골프, 배드민턴, 프랑스식 볼링 등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펜션을 차렸지만 이 또한 망하며 다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바를 경영했다.하지만 연속된 사업 실패의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는지 암에 걸렸고 1968년에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아왔다. 1970년 무렵엔 전 소속팀 비너 AC에서 하이덴을 위해 3천 실링을 모금하여 전달했고 아파트 마련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런 도움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1972년 그는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1973년 그가 사망했을 때 빈에선 거의 잊힌 이름이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빠르고 용감한 골키퍼. 다소 상대 공격수에게 호전적인 성향도 갖고 있어서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사모라, 콤비, 플라니치카, 크레스 등과 1930년대 유럽 최고를 다투던 골키퍼. 오스트리아 역대 최고의 골키퍼를 뽑을 때도 1950년대에 활약했던 대표팀 후배 발터 제만과 항상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하이덴은 월드컵에서 단 1분도 활약을 못해 평가에서 다소 손해를 보는 면도 있다.
4. 뒷이야기
- 하이덴은 다른 축구 선수들과 다르게 여성 팬층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 1940년 하이덴이 프랑스 대표팀으로 유일하게 활약한 경기에서 그와 같이 뛴 대표팀 멤버 중 오스트리아 출신인 소속팀 동료가 2명 더 있었다. 그 중 한명이 RC 프랑스 동료이자 입단 동기인 오귀스트 조르당이었다.
5. 수상
5.1. 클럽
- 디비지옹 1 우승 1회: 1935-36(RC 프랑스)
- ÖFB-컵 우승 1회: 1930-31(비너 AC)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3회: 1936, 1939, 1940(RC 프랑스)
- ÖFB-컵 준우승 2회: 1927-28, 1931-32(비너 AC)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31(비너 AC)
5.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