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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a121a><colcolor=#f2cc0c> 나바라 왕국 제30대 국왕 레오노르 1세 Leonor I.a Nafarroakoa | |||
가문 | 트라스타마라 왕조 | ||
출생 | 1426년 2월 2일 | ||
나바라 왕국 올리테 | |||
사망 | 1479년 2월 12일 (향년 53세) | ||
나바라 왕국 투델라 | |||
재위기간 | 나바라 왕국의 국왕 | ||
1479년 1월 28일 ~ 2월 12일 | |||
배우자 |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 ||
자녀 | 마리, 가스통, 피에르, 장, 잔, 레오노르, 마르그리트, 카트린, 이자벨, 안, 자크 | ||
아버지 | 추안 2세 | ||
어머니 | 수리아 1세 | ||
형제 | 카를로스 4세, 후안, 수리아 2세 | ||
이복형제 | 페란도 2세, 후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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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제30대 여왕. 아버지 추안 2세의 뒤를 이어 나바라 국왕이 되었지만 재위 15일 만에 사망했다.2. 생애
1426년 2월 2일 나바라 왕국 올리테 왕궁에서 아라곤 국왕 페란도 1세의 차남 추안 2세과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수리아 1세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카를로스 4세, 후안, 수리아 2세가 있었다. 형제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434년 12월 22일, 후안은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와 딸 레오노르를 결혼시키기로 약속하고 2년 후인 1436년 7월 30일에 결혼 약속을 확인했다. 지참금으로 50,000 아라곤 플로린을 지불했고, 미란다 아르가, 라레가 및 팔체스 마을이 담보로 맡겨졌다. 공식적인 결혼은 수리아 1세가 사망한 지 1년이 지난 1442년에 이뤄졌고, 레오노라는 이후로 푸아 백국의 주도인 베른에 살았다.아버지와 형제 카를로스, 수리아가 나바라 왕위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벌였을 때 아버지를 지지했으며, 남편을 설득해 아라곤 왕국에 병력과 물자 지원을 보내게 했다. 1455년 12월 3일, 후안은 바르셀로나에서 카를로스와 수리아의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레오노르를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런데 1461년 카를로스가 사망하고 뒤를 이어 나바라 귀족들에게 여왕으로 추대되었던 수리아 마저 생포된 후, 레오노르와 레오노르의 아들인 비아나 공 가스통, 그리고 아라곤 국왕 후안 2세 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나바라 왕국은 나바라 왕국의 평야 지대인 레린 백국에서 세력을 키운 보몽(Beamont) 가문과 피레네 산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그라몽(Agramont) 가문 간의 첨예한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전부터 보몽 가문은 레오노르와 비아나 공 가스통이 나바라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아그라몽 가문은 후안 2세가 나바라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나바라 왕위를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졌고, 어느 쪽도 쉽사리 우열을 가리지 못하면서 왕국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1462년 4월 12일, 후안 2세는 딸과 사위와 함께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후안 2세는 나바라 국왕으로 받들어졌고 레오노르는 왕위 후계자이며 아버지를 대신해 나바라를 통치할 섭정으로 세워졌다. 그 후 후안 2세는 베리 공작 샤를과 결혼하기를 거부한 딸 수리아를 푸아 백국으로 보냈고, 레오노르는 언니를 오르테즈의 몽카다 탑에 수감했다. 1464년 12월 2일, 수리아는 독살의 징후를 보이며 사망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가 레오노르에게 독살당했다고 추정하고, 다른 역사가들은 후안 2세가 독살을 명령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왕위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인 가스통 4세가 나바라 왕위를 탐내면서 부부간의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보몽 가문은 레오노르를 지지했고, 아그라몽 가문은 가스통 4세를 지지했다. 급기야 1468년 11월 28일, 팜플로나의 주교이자 레오노르의 고문이었던 니콜라스 드 에차바리가 아그라몽 가문 지지자인 페드로 데 페랄타 이 에스페레타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후안 2세는 딸을 나바라 왕위에서 배제하기로 하고 1469년 레오노르의 아들 가스통을 나바라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1470년 레오노르의 아들 가스통이 사망한 뒤, 레오노르는 아그라몽 가문과 화해했다. 그러나 보몽 가문은 후안 2세의 또다른 아들 페르난도를 나바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레오노르는 아버지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한 끝에 1471년 아라곤 왕위 승계를 포기하는 대가로 나바라 섭정으로 재선임되었다. 1472년 7월 10일 가스통 4세가 사망하면서 겨우 지위가 안정된 그녀는 수년간 무탈하게 통치하다가 1479년 1월 28일 후안 2세가 사망하면서 나바라 여왕에 등극했다. 그러나 15일 만인 1479년 2월 12일에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손자 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에게 나바라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에 푸아 왕조가 들어섰다.
3. 가족 관계
- 가스통 4세(1422 ~ 1472): 푸아 백작
- 마리(1443 ~ 1467): 몬페라토 후작 기욤 8세의 부인.
- 비아나 공 가스통(1445 ~ 1470): 나바라 왕국 왕위 계승자. 나바라 국왕 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의 아버지.
- 피에르(14449 ~ 1490): 아를의 주교.
- 장(1450 ~ 1500): 나르본 자작. 그의 딸 제르멘은 페란도 2세의 두번째 왕비였다.
- 레오노르(1457 ~ 1480): 기옌 공작 샤를과 첫번째 약혼, 메다니첼리 공작과 두번째 약혼했지만 결혼 전에 사망했다.
- 마르그리트(1458 ~ 1487):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부인. 그들의 딸 안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왕비였고, 나중에는 루이 12세와 재혼했다.
- 이자벨(1462 ~ ?): 튀렌 자작 기의 부인.
- 안(1464): 요절
- 자크(1463 ~ 1508): 몽포르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