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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8-23 08:38:37

렴태준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1921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1953년 함경북도 당위원회 부장을 거쳐 1960년 6월, 청진시 당위원회 부위원장, 1961년 7월, 청진시 당위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2년 7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도시경영성이 설치되면서 초대 도시경영상에 임명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도시경영상에 유임되었다. 1964년 4월 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도시경영성이 내무성에 통폐합되면서 도시경영상에서 해임되고 내각성원에 임명되었다. 정확히 무슨 직위를 맡았는지는 불분명한데 남한에서는 그가 내무성 제1부상을 지냈다고 기록한다.

1966년 11월, 황해북도 인민위원장으로 이동했으며,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68년 8월, 황해북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1969년 12월 1일, 정두환의 뒤를 이어 소련 대사에 임명되었다. 대사 재임 중이던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71년 12월 15일, 직총 5차 대회에서 전창철의 뒤를 이어 직총 중앙위원장에 선출됨에 따라 소련 대사 임기를 끝내고, 1971년 12월 31일, 알렉세이 코시긴과, 1972년 1월 6일, 니콜라이 포드고로니와 작별방문한 후 귀국하였으며 후임으로는 1972년 1월 17일, 권희경이 임명되었다. 1972년 7월, 아시아-아프리카 련대성 위원장을 겸하였으며 1972년 10월, 북한-키프로스 친선협회 위원장도 맡았다.

1972년 11월 21일, 직맹 대표단장으로 몽골을 다녀왔으며, 1972년 11월,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위촉,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다. 1974년 7월, 불가리아와 폴란드에도 대표단장으로 다녀왔다. 그러다가 1976년, 김상준의 뒤를 이어 라오스 대사에 임명되어 5월 20일에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직총 위원장에서 물러남에 따라 1977년 12월 6기 대의원 선거에서 상설회의 의원에서 탈락하였다. 대의원에 당선되었는지 여부는 명단이 발표되지 않아서 불투명. 1979년 6월 9일, 작별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 후임 대사로는 7월, 윤정섭이 임명되었다.

귀국 후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2월, 7기 대의원 선거 명단에는 없는데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3월, 조국전선 의장에 선출되었다.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6년 4월, 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8기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90년 4월, 9기 대의원 및 상설회의 대의원에도 재선되었다. 1989년 10월, 문익환 목사 구원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말년에 대남문제에 관여하였다. 1990년 7월,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을 만나기도 했다.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독려하는 모임에 참석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대의원에 선출되지 못하고 은퇴하였다. 이후 큰 소식은 없었으나 2003년 9월 5일, 북한 건국 55주년 기념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2012년 5월,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하였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