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2:21:49

로저 클레멘스/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로저 클레멘스
1. 개요2. 보스턴 레드삭스
2.1. 1986 시즌2.2. 1987 시즌2.3. 1988 시즌2.4. 1989 시즌2.5. 1990 시즌2.6. 1991 시즌2.7. 1992 시즌2.8. 1993 시즌2.9. 1994 시즌2.10. 1995 시즌2.11. 1996 시즌
3. 토론토 블루제이스
3.1. 1997 시즌3.2. 1998 시즌
4. 뉴욕 양키스
4.1. 1999 시즌4.2. 2000 시즌4.3. 2001 시즌4.4. 2002 시즌4.5. 2003 시즌
5. 휴스턴 애스트로스
5.1. 2004 시즌5.2. 2005 시즌5.3. 2006 시즌
6. 뉴욕 양키스 2기
6.1. 2007 시즌
7. 연도별 성적

1. 개요

로저 클레멘스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external/bostondirtdogs.boston.com/RC_10.15.86_BDD.jpg

흔히 로저 클레멘스가 약물 복용자라고 여겨지는 일이 많은데, 이 시절에는 약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약 없이도 원래 잘 하는 선수였는데 약을 해서 전설이 되었던 것이라는 추측이 많으나 언제부터 약물을 복용하였는지는 그 본인만이 알 수 있으므로 제 2의 전성기 이전의 기록은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확정지을 순 없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을 졸업한 후 1983년 1라운드에서 지명을 받고 입단한 클레멘스는 이듬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2.1. 1986 시즌

이후 1986년 4월 29일에는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세운다. 펜웨이 파크에서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정규 이닝 20K를 잡아버린 것이다. 이후 10년이 흐른 1996년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클레멘스가 다시 한번 이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1]

그 뒤로도 쭉 활약하다가 당시 올스타전에서 내셔널리그 최고의 투수였던 드와이트 구든을 타석에서 상대해보고는[2] 포수게리 카터에게 '지금 저 친구가 던지는 패스트볼이 내가 던지는 것보다 빨라?' 라고 물어봤댄다. 이에 게리 카터는 '누가 낫고 못한 수준은 아니고 비슷비슷하다.' 라고 대답했다. 클레멘스는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이런 공을 칠 수 없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속구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3]

자신이 구사하는 패스트볼에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이 때의 경험은 로저 클레멘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게리 카터가 로저 클레멘스에게 "구든에 비하면 너는 많이 느려"라고 대답했다면, 로저 클레멘스의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까? 다소 흥미로운 부분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254이닝을 던지며 24승 4패 238K 2.48 ERA를 기록, 만장일치 사이 영 상에 MVP까지 석권[4]하며 슈퍼 에이스의 탄생을 알렸다.

2.2. 1987 시즌

그리고 이듬해인 1987년에도 20승과 18완투 7완봉, 그리고 독보적인 이닝 소화 능력(281⅔이닝)을 선보이며 무난하게 사이영 2연패에 성공한다.

2.3. 1988 시즌

1988년에도 18승 11패 ERA 2.93에 291K로 처음으로 탈삼진왕에 오르며 명실상부 팀의 슈퍼 에이스로 활약하지만, 24승을 쌓으며 사이영을 수상한 프랭크 바이올라에 밀려 사이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2.4. 1989 시즌

1989년에도 팀의 에이스로 손색없는 활약을 펼치지만 전체적인 지표가 지난 3년에 비해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브렛 세이버하겐이 특유의 제구력으로 광기를 부리며 미쳐버리는 바람에 사이영상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2.5. 1990 시즌

그리고 1990~92년 3시즌 연속 ERA 타이틀을 차지하는데, 그 중의 백미는 1990년의 21승 1.93 ERA 시즌이다.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결정이겠지만 평균자책점은 2.95지만 다승에서 27승으로 앞선 오클랜드의 에이스 밥 웰치가 사이영 상을 차지했다.[5][6][7]

2.6. 1991 시즌

4~5선발급 성적을 찍었던 밥 웰치에게 27승빨로 사이영을 강탈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작용한 것일까. 다음 해인 1991년에는 평균자책점에 탈삼진 타이틀까지 석권하며 적수 없이 무난하게 통산 세번째 사이영을 수상했다.

2.7. 1992 시즌

1992년 역시 압도적인 활약으로 평균자책점왕을 차지했고, 세이버 성적 역시 압도적이었기에 원래라면 사이영상을 타야 하는 성적이었지만, 데니스 에커슬리마무리 투수의 패러다임을 바꿔놓는 활약을 펼치며 표를 쓸어가는 바람에 또 고배를 마셨다.[8]

2.8. 1993 시즌

그러나 그도 세월의 무게와 젊은 날에 지나치게 폭주한 부작용은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1993년 뜻하지 않은 4점대 ERA를 찍어버리며 그동안의 명성은 어디로 가고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2.9. 1994 시즌

1994년에는 절치부심해서 다시 리그 평정할 페이스를 이어갔으나 선수노조 파업 때문에 10승에 실패하고 적은 승수 때문에 사이영 투표에서 명함도 못 내밀었다.

2.10. 1995 시즌

1995년에는 선수노조 파업의 여파로 시즌이 늦게 시작되었고 1993년에 이어 또 4점대 ERA를 찍으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2.11. 1996 시즌

그렇게 명투수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져가는가 했지만, 1996년 레드삭스에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정규이닝 20K 기록을 다시 한번 달성했고, 시즌 257K를 기록하며 탈삼진왕에 올랐다.

보스턴은 클레멘스가 팀을 떠난 이후 그가 레드삭스 시절 달았던 등번호 21번을 어느 누구에게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구단의 비공식 영구결번인 셈이다.

3. 토론토 블루제이스

파일:gettyimages-1786841-1024x1024.jpg

하지만 그런 레전드를 레드삭스 프런트는 보사구팽했다. 물론 언플로는 "레드삭스 역사상 투수 최고액을 오퍼했다", "클레멘스의 황혼기[9]를 함께하고 싶었다"는 등의 드립을 쏟아냈으나 실제로 그걸 믿은 팬은 삭스 팬들 중에도 드물었다. 아무튼 그는 192승 111패라는 사이 영(192승 112패)과 자웅을 겨루는 레드삭스 통산 성적을 남기고 4년 4000만불의 계약으로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했다.

3.1. 1997 시즌

그런데, 1997년에 갑자기 스플리터를 달면서 각성하며 264이닝 21승 7패 2.05ERA 292K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했고 문자 그대로 리그를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개인 통산 4번째 사이영상을 먹었다. fWAR 10.7, bWAR 11.9로 인간계를 아득히 초월한 성적을 찍었기에 원래라면 당연히 만장일치 사이영이 되었어야 했지만, 랜디 존슨에게 탈삼진과 다승 부문에서 단 한 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지 못했으나 둘의 포스트시즌 진출 여부가 갈려버린 영향 때문인지 만장일치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MLB.com이 선정한 역대 사이영 상 시즌 6위로 평가받을 정도로 로저의 1997년은 2010년대 이후 투수들은 범접도 못할만큼 엄청났다.

3.2. 1998 시즌

1998년에는 234이닝 20승 6패 2.65ERA 271K을 기록하며 샌디 코팩스 이후 처음으로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웠다. 만장일치로 사이영상을 또 수상하며 3년 연속 탈삼진 1위를 기록했다. 2연속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큰 업적을 이루긴 했는데 켄 그리피 주니어, 짐 토미 등에게 1경기 2홈런을 주는 등 털리고도 패는 안 먹는 운 좋은 경기도 꽤 있었다.

다만 오점도 있는데, 미첼리포트에 따르면 클레멘스는 1998년부터 브라이언 맥나미를 만나서 약물에 손을 댔다고 한다. 미첼 리포트에 의하면 클레멘스는 맥나미에게 경주마에게도 주입하기도 하는 Winstrol을 주입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1998년 35세였던 클레멘스는 약물의 힘을 빌린 이후 시즌 마지막까지 14승 무패, 평균자책점 2.29를 기록했다. 시즌 마지막 11경기에서 클레멘스가 기록한 경기당 삼진 개수는 14, 8, 15, 6, 18, 7, 11, 7, 11, 15, 11이었다. 클레멘스가 데뷔 후 한 시즌 14개 이상의 삼진을 4차례 기록한 것은 단 한차례였고, 그것은 무려 10년 전인 1988년이었다.

클레멘스가 2연속 트리플 크라운에 5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하고 본즈가 전무후무한 400-400을 달성하는 등 1980년대에 데뷔한 최고의 선수들이 십수년을 거쳐 여러 위업들을 이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 레이스에 묻혀 부각되지 않았다. 클레멘스는 명백히 리그를 초토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조용히 시즌을 보냈지만 보스턴의 라이벌격 구단인 양키스는 이 모든 걸 지켜봤다.

4. 뉴욕 양키스

파일:external/bonanzasports.net/rogerclemens-8x10-01_enl.jpg

클레멘스는 우승권 팀이 아니었던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맘에 들지 않았고, 곧 클레멘스의 부활을 지켜본 뉴욕 양키스가 그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10] 클레멘스의 상징과도 같았던 21번은 폴 오닐이 달았기에[11] 12번으로 바꿔 달았지만 이내 22번으로 고쳐 달았다.

4.1. 1999 시즌

클레멘스는 맥나미를 뉴욕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토론토와 계약 중이던 맥나미는 따라 갈 수가 없었고 클레멘스는 약물도 못 쓰고 트레이너로도 도움을 주던 맥나미가 없었기에 1999시즌 187.2이닝 14승 10패에 ERA도 커리어에서 가장 나쁜 4.60을 기록했다.[12] 드디어 월드시리즈 1승을 거두긴 했지만 자신의 뒤를 이어 보스턴의 에이스가 된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ALCS에서의 맞대결에서는 참패했다. 상황이 신통치 않자 결국 클레멘스는 자신의 연봉에서 맥나미의 봉급을 공제하는 조건으로 맥나미를 양키스로 불러들이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는 코치가 있었기 때문에 선수단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이로 인해 소동이 벌어졌다. 어쨌든 맥나미는 양키스 선수단과 함께 일하게 됐고 이는 구단에 약물이 더 퍼지는데 이바지했다.[13]

4.2. 2000 시즌

미첼 리포트에 따르면 클레멘스는 2000년 시즌 중반, 자신이 얻어온 성장호르몬과 스테로이드를 맥나미에게 가져가 투약해달라고 하여 맥나미가 그것들을 주입했다고 한다. 이후 전반기 4.33이던 평균자책점이 3.15까지 내려왔고, 후반기 7승 2패를 거두며 사이영상 6위를 했다.[14] 5월 28일 보스턴전에서는 9이닝 2실점을 했지만 페드로 마르티네스에게 완봉패를 당했고, 6월 3일에는 애틀랜타의 그렉 매덕스와 대결했는데 5이닝 6실점으로 폭망하고 매덕스도 5.2이닝 7실점으로 폭망해서 둘 다 ND였다. 오클랜드를 상대한 ALDS에서는 2경기 11이닝 10실점 8.18ERA를 기록하며 2패를 했지만, 시애틀과의 ALCS 4차전에서는 9이닝 완투에 15삼진을 잡는 좋은 활약을 했고, 메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피아자에게 부서진 방망이를 던지며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켰지만 8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하고 우승했다.

4.3. 2001 시즌

2001년 20승 3패에 3.51 ERA를 거두고 6번째 사이 영 상[15]을 수상하는 등 양키스에서도 꽤 준수한 선발투수로 제 역할을 다했다. 여담으로 6월 2일 클리블랜드와의 경기에서 짐 토미에게 2홈런을 맞는 등 총 3홈런을 맞고도 승리했다. 2001 월드 시리즈에서는 자신을 우상처럼 여겨온 커트 실링과 7차전에서 벼랑 끝 명승부를 벌여 결과적으로는 패배하기도 했다. 이 시즌이 종료되고 양키스는 성폭력 혐의로 구속된 맥나미와의 관계를 정리했지만 클레멘스와 앤디 페티트는 계속 맥나미와 함께 훈련했다.[16]

4.4. 2002 시즌

2002년에도 클레멘스는 소포[17]로 성장호르몬을 받는 등 계속 약물을 사용했고, 13승 6패, 4.35ERA, 192K로 활약했다. 이 시즌 6월 9일 샌프란시스코전에서 배리 본즈에게 볼넷, 몸에 맞는 공, 고의사구 2개를 퍼주며 피했고 8이닝 2실점으로 승리했다.

4.5. 2003 시즌

2003년, 대망의 300승과 4,000K[18]를 돌파하고 스티브 칼튼놀란 라이언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300승을 달성했을 때 팬들은 모두 엘튼 존로켓맨을 부르며 클레멘스의 마일스톤 달성을 축하했고, 은퇴 시즌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정규시즌 마지막 펜웨이 파크 원정에서는 양키스 선수로서 왔음에도 전 관중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명장면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이하게 이 시즌 보스턴과의 경기에 5번 출장했는데 4경기 상대가 팀 웨이크필드였고 승패도 각자 2승 2패였다.

시즌을 211.2이닝 17승 9패 3.91ERA 190K로 마친 그는 2003 ALCS에서도 여느 양키스 선수들과 달리 환대를 받았지만 매니 라미레즈에게 빈볼성의 볼을 던지자 매니가 분노했고 경기장 분위기는 이내 심각해졌다.[19] ALCS 성적은 2경기 9이닝 6실점.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플로리다 말린스를 상대로 미겔 카브레라에게 초구부터 빈볼을 던지다 홈런을 맞긴 했지만 7이닝 3실점의 호투를 펼치고 말린스 선수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줄 알았다.

5. 휴스턴 애스트로스

파일:external/bronxbaseballdaily.com/roger-clemens3-540x335.jpg

클레멘스는 은퇴를 번복하고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을 나와 인연이 있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1년간 500만불에 계약했다. 은퇴를 하려다 양키스에서 같이 뛴 앤디 페티트를 따라 입단한 클레멘스는 로켓의 본고장에서 로켓맨의 이름에 걸맞은 폭발력을 뿜어냈다.[20]

5.1. 2004 시즌

2004년 214⅓이닝 동안 18승 4패 2.98ERA 218K를 기록, 역대 최고령, 개인 통산 7번째 사이영상 수상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만약 이때 2위 랜디 존슨에게 상을 내줬더라면 한 시대를 풍미한 두 에이스가 사이영 수상 횟수에서 서로 동률이 될 상황이었기에, 그리고 갖가지 지표에서 랜디가 클레멘스보다 훨씬 앞섰기에(당시 사이 영 투표 결과와 주요 지표 비교) 지금까지도 자주 회자되는 사이영 투표다.[21] 포스트 시즌에서도 클레멘스는 활약했다. 애틀랜타와의 NLDS 1차전에서 7이닝 3실점으로 승리, 4차전에서 5이닝 2실점으로 ND였는데 팀이 졌다. 세인트루이스와의 NLCS 3차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승리했는데, 정작 7차전에서는 6이닝 4실점으로 제프 수판에게 패했다.

5.2. 2005 시즌

그러나 2005년부터 그는 슬슬 사람들의 짜증을 유발하기 시작한다. 전년도에 500만불에 계약한 것에서 적게 받은 양까지 싸그리 몰아서 받는 무시무시한 연봉협상으로 인해 2005년 이후 제프 배그웰의 이른 은퇴에 영향을 끼쳤다. 뭐 그래도 2005년 정규 시즌에는 211.1이닝 13승 8패 1.87ERA 185K를 찍어줬으니 까방권을 좀 주더라도, 포스트 시즌에는 미묘했다. 애틀랜타와의 NLDS 2차전에서는 5이닝 5실점으로 존 스몰츠에게 패했지만, 18회까지 간 4차전에서는 마지막 3이닝을 0실점으로 막으며 승을 땄다. 세인트루이스와의 NLCS 3차전에서 6이닝 2실점으로 승리했는데, 정작 화이트 삭스와의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는 2이닝 3실점으로 망하고도 ND였지만 팀은 졌다.

여담으로 이 해에 시카고 컵스그렉 매덕스와 대결하며 113년 만에 내셔널리그에서 나온 300승 투수들의 대결[22]이라는 명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매덕스가 승리를 얻었다.

5.3. 2006 시즌

2006년에는 자신의 체력이 딸린다는 점을 인지하고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만 뛴 채 시즌 개막 직전까지 계약을 하지 않다가[23] 시즌 중반에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이 있는 팀들이 몸값을 올려놓을 때 계약에 나서는 행동을 했다.[24] 그렇게 해서 삽질한다면 속 시원하게 까기라도 하는데, 그렇게 알바 뛰면서 2점대 ERA를 찍으니 뭐라고 대놓고 욕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짜증만 냈다.

6. 뉴욕 양키스 2기

파일:양키스2기클레멘스.jpg

6.1. 2007 시즌

2007년에 뛸 때는 투수 역사상 최고 연봉 기록[25]을 갈아치웠는데도 구위가 따라주지 않으며 얻어맞아나가는 바람에 썩 좋은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로켓맨의 알바짓을 비꼬는 최훈의 카툰. ALDS 3차전에서도 2.1이닝 3실점으로 망했다. 까놓고 말해 2007년의 클레멘스는 먹튀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성적이었다.[26]

사실 금지 약물 복용 스캔들이 벌어지기 전에도 이 시즌이 클레멘스의 마지막 시즌이었을 가능성은 꽤 있었다. 알바짓하는데 2007년에는 성적도 안나왔어서 다음 시즌 클레멘스를 비싼 돈 주고 데려오려고 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클레멘스는 이때까지 은퇴할 생각은 없었겠지만, 그의 성격상 적은 돈 받고 뛰었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어쨌든 외부의 시선에서는 이것이 그의 마지막 시즌이었을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여하튼 2007년 시즌이 끝났을 당시까지만 해도 클레멘스는 투수 GOAT 자리를 놓고 다투는 평가를 받았는데, 당시 기준 라이브볼 시대에 오로지 워렌 스판만이 클레멘스의 354승보다 많은 승수를 기록했고 4672K는 놀란 라이언 다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이 영 상도 역대 최다인 7회 수상이므로 임팩트 면에서도 최고였다

7. 연도별 성적

파일:MLB 로고.svg 로저 클레멘스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84 BOS 21 9 4 0 0 133⅓ 4.32 146 13 29 2 126 1.313 97 3.4 1.8
1985 15 7 5 0 0 98⅓ 3.29 83 5 37 3 74 1.220 130 2.3 2.7
1986 33 24 4 0 0 254 2.48 179 21 67 4 238 0.969 169 7.1 8.8
1987 36 20 9 0 0 281⅔ 2.97 248 19 83 9 256 1.175 154 8.4 9.4
1988 35 18 12 0 0 264 2.93 217 17 62 6 291 1.057 141 9.2 7.1
1989 35 17 11 0 0 253⅓ 3.13 215 20 93 8 203 1.216 132 5.1 5.7
1990 31 21 6 0 0 228⅓ 1.93 193 7 54 7 209 1.082 211 8.2 10.4
1991 35 18 10 0 0 271⅓ 2.62 219 15 65 5 241 1.047 165 8.5 7.9
1992 32 18 11 0 0 246⅔ 2.41 203 11 62 9 208 1.074 174 7.6 8.7
1993 29 11 14 0 0 191⅔ 4.46 175 17 67 11 160 1.263 104 3.7 2.6
1994 24 9 7 0 0 170⅔ 2.85 124 15 71 4 168 1.143 176 4.2 6.0
1995 23 10 5 0 0 140 4.18 141 15 60 14 132 1.436 117 2.4 1.9
1996 34 10 13 0 0 242⅔ 3.63 216 19 106 4 257 1.327 139 6.8 7.7
BOS 통산
(13시즌)
383 192 111 0 0 2776 3.06 2359 194 856 86 2590 1.158 144 76.8 80.8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7 TOR 34 21 7 0 0 264 2.05 204 9 68 12 292 1.030 222 10.7 11.9
1998 33 20 6 0 0 234⅔ 2.65 169 11 88 7 271 1.095 174 8.2 8.1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9 NYY 30 14 10 0 0 187⅔ 4.60 185 20 90 9 163 1.465 102 3.2 2.8
2000 32 13 8 0 0 204⅓ 3.70 184 26 84 10 188 1.312 131 3.6 4.6
2001 33 20 3 0 0 220⅓ 3.51 205 19 72 5 213 1.257 128 5.6 5.7
2002 29 13 6 0 0 180 4.35 172 18 63 7 192 1.306 102 4.3 2.6
2003 33 17 9 0 0 211⅔ 3.91 199 24 58 5 190 1.214 113 4.5 4.0
<rowcolor=#d2c295>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2004 HOU 33 18 4 0 0 214⅓ 2.98 169 15 79 6 218 1.157 145 5.7 5.4
2005 32 13 8 0 0 211⅓ 1.87 151 11 62 3 185 1.008 226 6.0 7.8
2006 19 7 6 0 0 113⅓ 2.30 89 7 29 4 102 1.041 194 3.4 3.5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2007 NYY 18 6 6 0 0 99 4.18 99 9 31 5 68 1.313 108 1.5 1.5
MLB 통산
(24시즌)
709 354 184 0 0 4916⅔ 3.12 4185 363 1580 159 4672 1.173 143 133.7 138.7

빨강색은 MLB 전체 1위(투수 한정).

[1] 이후에 케리 우드, 랜디 존슨, 맥스 슈어저가 정규 이닝 20K 기록을 세웠지만 클레멘스처럼 2번이나 달성하지는 못했다.[2] 타석 결과는 삼진. 그러나 이 경기의 승리 투수는 클레멘스였고 패전 투수는 구든이었다.[3] 단 1980년대 로저 클레멘스의 패스트볼 구속은 놀란 라이언이나 드와이트 구든에게는 약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여겨진다. 1983~1984년 스카우팅 리포트 등에 기재 된 로저 클레멘스의 패스트볼 평균구속은 90마일로 당시 메이저리그 평균구속보다 꽤 빠른 축에 들어갔다. 또한 사이영상 2회 수상 이후,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서의 위상을 지녔던 1989년 즈음에는 평균구속이 91마일 정도였다. 1980년대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패스트볼 평균구속은 Jugs Gun 기준으로 86마일 전후였으며 Ra Gun 기준으로 82마일 전후, 그렇기에 91마일 정도였던 1989년 로저 클레멘스의 패스트볼이 메이저리그 평균에 비하면 분명히 상당히 빨랐지만, 드와이트 구든의 경우에는 이미 마약에 찌들 때로 찌들어서 처참하게 몰락한 1990년대에 최고 구속 100마일을 투구한 기록이 있었을 정도로 공이 엄청나게 빨랐다는 점에서 이 당시 클레멘스보다도 구속이 더 대단했다. 반면 로저 클레멘스가 최고구속 95~100마일에 평균구속 92~94마일 정도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약물 복용 이후로 추정된다. 실제로 1992년 미일 올스타전에서 로저 클레멘스의 투구 영상을 보면 짧은 이닝을 던지는 동안 패스트볼 구속이 평균 145~146Km 정도였기 때문에, 스카우팅 리포트에 언급이 된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신뢰할만 한 것으로 보인다.[4] 행크 애런이 투수 주제에 MVP를 타는 것은 좀 그렇지 않냐는 말을 하자 "행크 애런이 현역이었으면 대가리를 쪼개놓아 내가 얼마나 가치있는지 보여줬을 것(I wish he were still playing. I'd probably crack his head open to show him how valuable I was.)"이라는 일침을 날렸다.[5] 평균자책점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는 투고타저 시대였다. 밥 웰치는 bWAR 3.0, fWAR 1.8을 찍은 4선발급 투수였다. 로켓은 bWAR 10.6이다. 약쟁이 정의구현이라는 말도 안 통하는게 웰치보다 나은 성적을 낸 선수가 한 트럭이었다. 추가로 여러 정황상 클레멘스의 경우 1997년 혹은 1998년부터 약을 했다는게 정설이다. 이것이 실제이고 약물을 안했다면 약물 안한 때의 성적만으로도 명전 입성이 확정적이었다는 소리다. 그러나 이미 금지약물 복용이 걸렸고 1996년 이전에는 정황상 예상만 있을 뿐 청정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 뭐 굳이 따지자면 도핑이 문제시되는건 그게 금지약물 복용이기 때문인데 1990년에는 금지약물 규정 자체가 메이저리그에 없었다. 마약류가 아닌 경기력 향상에 대한 금지약물 규정은 1991년부터 메이저리그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력 향상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저 시점에 복용했으면 도의적 문제는 충분히 가능하다.[6] 2010년대로 치면 평균자책점 1.70에 bWAR 9.5을 달성하고도 절망적인 팀 티선으로 10승 9패에 그친 제이콥 디그롬 대신, ERA 2.83에 18승 4패, bWAR 5.0을 기록한 마일스 마이콜라스가 사이 영 상을 수상하는 것과 비슷하다.[7] 당시에는 세이버메트릭스가 비주류였고 DIPS라는 개념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 시대에 와서 되돌아보면 그 해 클레멘스는 사이영은 만장일치요 MVP까지 노려볼 지경이었다. 베이스볼 레퍼런스 측정 WAR에서 그 해 MVP 리키 헨더슨도 제쳤을 정도니 말 다한 셈. 물론 당시에는 세이버 스탯이 비주류였던만큼 투승타타가 주류여서 27승을 기록한 웰치가 사이영 상을 수상하는 것에 대해 반발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크진 않았다.[8] 오늘날 클레멘스는 2001년 마이크 무시나를 제치고 사이영을 먹은 것이나 2004년 랜디 존슨을 제치고 사이영을 먹은 것 때문에 상복이 많았던 투수로 기억되곤 하는데, 최소한 레드삭스 시절에는 클레멘스는 상복이 많았다기보단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그가 수상했던 타이틀이나 전성기 시절의 압도적인 성적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투표 기준을 도입할 경우 사이영상을 다섯 번은 받을 수 있었고 MVP도 한번 더 노릴 수도 있었다.[9] 이 황혼기 드립이 클레멘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설이 유력하다.[10] 이 트레이드에서 데이비드 웰스가 블루제이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11] 사실 클레멘스급 선수가 원하는 번호라면 엔간하면 구단에서 나서서라도 조율하지만, 오닐이 양키스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매우 높았던지라 건드릴 수가 없었다. 이후 양키스에서 21번은 폴 오닐의 번호로 영구 결번되었다.[12] 이전에도 4점대 ERA를 기록한 적은 3번 있지만 그때는 이때보다는 나았다.[13] 미첼 리포트에 따르면 2000년~2001년에 약물 제공자 래돔스키는 양키스 선수 그림슬리, 척 노블락, 데니 네이글, 글레날렌 힐, 데이비드 저스티스, 마이크 스탠튼에게 약물을 제공했다고 나와있다. 이후 호세 칸세코, 짐 리리츠, 앤디 페티트는 양키스에서의 약물 사용을 시인했다.[14] 그러나 이 시즌은 약으로도 어찌 해볼 수 없는 투수들의 지옥이었으며 클레멘스는 3.70으로 AL ERA 2위를 했지만 MLB 전체에서는 13위였고, ERA+로는 131이었는데 이는 MLB 1위였던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다.[15] 이 시즌 2연속 수상자이던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후반기에 겨우 13이닝을 던지는 등 풀시즌을 소화하지 못한 영향이 있었다. 실제로 페드로의 전반기 성적은 MLB 전체에서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ERA나 현대 세이버 기준으로는 해당 시즌의 실제 AL 최고 투수는 마이크 무시나였다고 보는 일이 많다.[16] 앤디 페티트가 미첼 리포트에 걸린 부상에서 빨리 회복되기 위한 성장 호르몬 사용은 2002년 5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맥나미의 만류에도 페티트의 부탁으로 이뤄졌다.[17] 이 소포의 영수증은 훗날 연방수사기관에 증거로 제출됐다.[18] 역사상 300승과 4000K를 같은 게임에서 달성한 선수는 클레멘스가 유일하다. 확률상으로 따져도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19] 이 과정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돈 짐머를 패대기쳤다.[20] 클레멘스가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열어제낀 1986년은 NASASTS-51-L 챌린저 폭발사고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전면 중단했던 연도이며, 2004년은 NASA가 STS-107 컬럼비아 폭발사고의 진상조사를 마치고 비행 복귀 연구를 진행하던 시기였다. 그냥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는 별명이긴 하지만 묘한 아이러니를 풍기는 대목.[21] 대부분의 평은 투승타타가 유행하던 당시 기준으로는 클레멘스가 받아도 이상할 게 없지만 세이버 스탯이 유행하는 2023년 현재는 랜디가 여유롭게 압승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한 이 투표와 바톨로 콜론 투표를 기점으로 투승타타는 점점 몰락하게 된다. 하지만 로켓이 사실 약켓이었음이 밝혀진 후엔 청정 투수 랜디 존슨은 피해자로 여겨지는 중으로, 1997년~1998년의 사이 영 상까지는 성적 상승에 새로 장착한 스플리터의 역할도 컸었기에 클레멘스가 약의 효과를 직접적으로 봐서 탄 것인지 의문이 있지만, 그 이후의 사이 영 상들, 특히나 2004년 사이 영 상은 빼박 약빨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정설이다.[22]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1986년과 1987년에 4차례 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돈 서튼이 연루된 경기.[23] 중간에 보스턴 레드삭스 클럽하우스를 방문하여 커트 실링 등의 삭스 선수들에게 환대를 받기도 했다. 또한 2월 쯤에 테오 엡스타인 레드삭스 단장은 로켓의 금의환향을 기원하는 보빠들의 염원을 담은 DVD를 선물하며 레드삭스로의 리턴을 진지하게 제안했다.[24] 명목상 연봉은 22,000,022달러였다. 하지만 실수령액은 $12.2M 가량이었다고 한다.[25] 무려 28,000,022달러다. 물론 실수령액은 $17.4M 가량이지만.[26] 여담으로 클레멘스는 2007년에 44세로 AL 최고령 선수였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568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568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