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쿠르투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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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8대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알프레드 아스통 (1944~1946) | → | 로제 쿠르투아 (1947) | → | 오스카르 에세레 (1947~1948) |
로제 쿠르투아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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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前 축구감독 | ||
이름 | 로제 쿠르투아 Roger Courtois | |
출생 | 1912년 5월 30일 스위스 제네바 | |
사망 | 1972년 5월 5일 (향년 59세)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5cm | |
직업 |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선수 | 우라니아 주네브 스포르 (1932~1933) FC 소쇼몽벨리아르 (1933~1939) FC 로잔 스포르 (1941~1945) FC 소쇼몽벨리아르 (1945~1952) AS 트루아사비니엔 (1952~1958) |
감독 | AS 트루아사비니엔 (1952~1958 / 선수 겸 감독) AS 트루아사비니엔 (1958~1963) AS 모나코 FC (1963~1965) | |
국가대표 | 22경기 10골 (프랑스 / 1933~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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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2. 생애[1]
2.1. 어린 시절
쿠르투아는 그의 고향 제네바에서 축구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1920년에 세상을 떠났고 쿠르투아 역시 14살 때 흉막염으로 1년여간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다.쿠르투아는 15살에 공부를 그만두고 제네바의 무역 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는데 17세에 스키밖에 스포츠가 허용되지 않아 1년간 축구를 하지 못했다. 그 이후 우라니아 제네바 스포츠 클럽에서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1933년, 21살의 젊은 쿠르투아는 소쇼 소속으로 프랑스 디비지옹 1에 데뷔했고 데뷔 시즌에 23골을 넣어 디비지옹 1 득점 랭킹 3위에 자리했다.이듬해인 1934-35 시즌에 소쇼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디비지옹 1 챔피언이 되었고 여기에 쿠르투아의 29골이 큰 비중을 차지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쿠르투아는 30골을 넣은 스위스 출신의 팀 동료 앙드레 아베글렁의 뒤를 이어 득점 2위에 자리했고 득점 1, 2위가 한 팀에 있음에도 우승을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 둘은 이 시즌 팀의 총득점 94점 중 59점을 합작했고 상대팀 수비진엔 큰 위협이 됐다.
1935-36 시즌의 쿠르투아는 득점 페이스를 더 끌어올려 34골을 넣어 자신의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하는 동시에 디비시옹 1 득점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 다음 시즌에는 잠시 부상으로 인해 19골에 그쳤지만 1937-38 시즌에는 팀이 우승을 차지했고, 2차 대전 직전의 시즌에는 쿠르투아가 다시 디비지옹 1 득점왕이 되었다.
프랑스 침공으로 인해 프랑스 영토는 나치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쿠르투아는 참전했다가 나치 독일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쿠르투아는 1941년, 이중국적과 건강 문제로 인해 석방되었고 그는 프랑스를 떠나 고향 스위스로 이주했다. 그는 로잔스포르트 소속이 되었고 1941년 패혈증으로 고생했지만 회복 후 로잔스포르트에서 1943-44 시즌에 더블을 달성했다.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 쿠르투아는 다시 소쇼로 돌아왔지만 소쇼는 옛날의 그 강팀이 아니었다. 1945-46 시즌에 소쇼는 디비지옹 2 강등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디비지옹 2에서 소쇼의 공격진은 42경기에서 무려 141골을 폭파시키며 한 시즌 만에 다시 디비지옹 1으로 복귀했다.
쿠르투아는 1952년까지 디비지옹 1에서 활약하다 트루아사비니엔(AS Troyes-Savinienne)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쿠르투아는 45살이 되던 1957년까지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2.2.2. 국가대표
쿠르투아는 1933년부터 1947년까지 22경기 10골의 대표팀 기록을 남겼다. 쿠르투아의 첫 A매치는 1933년 12월, 상대는 잉글랜드였다. 이 경기에서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1대4로 패했다.쿠르투아는 월드컵에 2차례 참가했지만 프랑스의 3경기 중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월드컵 당시 프랑스 대표팀의 감독인 가스통 바로, 조지 킴튼 감독이 장 니콜라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쿠르투아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1947년 3월 23일의 포르투갈전이었고 쿠르투아는 이 경기에서 주장으로 출전했다.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1대0으로 꺾어 쿠르투아는 유종의 미를 거뒀다.
2.3. 감독
1952년에 40살이 되면서 쿠르투아는 소쇼의 선수로는 경쟁력이 떨어짐을 느꼈고 디비지옹 2의 트루아사비니엔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1954년에는 트루아사비니엔의 디비지옹 1 승격을 이끌었지만 트루아사비니엔은 1956년에 다시 강등당했는데 쿠르투아는 이 해 쿠프 드 프랑스에서 깜짝 준우승의 성과를 거두었다. 1957년부터 선수 생활을 접고 전임 감독이 된 쿠르투아는 1963년까지 팀을 지켰고, 1963년에는 디비지옹 1 디펜딩 챔피언 AS 모나코의 감독으로 취임, 디비지옹 1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1964-65 시즌에 모나코는 12위로 성적이 곤두박질쳤고 쿠르투아는 시즌이 끝난 후 모나코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쿠르투아는 1972년 5월 5일, 60세 생일을 한 달여 앞두고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FC 소쇼몽벨리아르 역대 최고의 공격수. 소쇼에서 253골을 넣어 팀 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갖고 있으며 그가 있을 때에만 소쇼 역시 2회 디비지옹 1 챔피언이 되었다. 또한 쿠르투아의 리그 1 통산 득점은 210골로 리그 1 역대 득점 순위 4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44세 4일로 리그 1 최고령 득점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4. 수상
4.1. 대회 기록
- FC 소쇼몽벨리아르 (1933~1939 / 1945~1952)
- AS 트루아사비니엔 (1952~1958)
-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 1955-56
4.2. 개인 수상
- 디비지옹 1 득점왕: 1935-36, 1938-39
4.3. 감독
- AS 트루아사비니엔 (1952~1963)
-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 1955-56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