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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21:54

오스카르 에세레

오스카르 에세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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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파일:올랭피크 리옹 로고.svg

1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로제 쿠르투아
(1947)
오스카르 에세레
(1947~1948)
쥘리앙 다리
(1948)
}}} ||
파일:Oscar Heisserer.png
이름 오스카르 에세레
(Oscar Heisserer)
생년월일 1914년 7월 18일
사망년월일 2004년 10월 7일 (향년 90세)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출신지 독일 제국 쉬레인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신체조건 170cm | 72kg
소속팀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 (1934-1938)
RC 프랑스 (1938-1945)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 (1945-1949)
올랭피크 리옹 (1949-1952)
국가대표 25경기 8골 (1936-1948)
감독 올랭피크 리옹 (1950-1954)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 (1955-1956)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2. 감독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어린 시절 고향팀 비슈빌러(Bischwiller)에서 축구를 배운 에세레는 1934년 지역에서 가장 큰 클럽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에서 프로로 데뷔했다. 이 시즌에 스트라스부르는 에세레와 같은 해 영입된 독일 출신 공격수 오스카 로어(Oskar Rohr)의 활약으로 디비지옹 1 준우승을 거둬 그의 클럽 커리어 최고 성적을 냈으며 에세레는 26경기에 뛰며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다.

1937년에는 스트라스부르가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FC 소쇼몽벨리아르에 1대2로 패했다.

1938년, 에세레는 당시 프랑스의 강팀 중 하나였던 RC 프랑스로 팀을 옮겼지만 곧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져 프랑스의 정규 리그가 중단되었다. 하지만 RC 프랑스는 쿠프 드 프랑스에서 3회 우승을 했고 전쟁이 끝나고 에세레는 친정팀 스트라스부르에 되돌아갔다.[2]

스트라스부르로 돌아간 에세레는 이후 출전 시간이 줄어들어갔고 스트라스부르가 1949년, 디비지옹 2로 강등당하자 그는 팀을 떠났다. 그리고 새로 창단되는 올랭피크 리옹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다.

2.1.2. 국가대표

1936년 12월 13일, 에세레는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처음 파란 유니폼을 입었다.

1938년 월드컵에 에세레는 프랑스 대표팀 멤버 중 한명으로 참석했다. 그는 8강 이탈리아전에서 1대1 동점을 만드는 득점을 기록했지만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1대3으로 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대표팀의 경기는 단 2번밖에 치러지지 않았고 이때 에세레는 1940년의 포르투갈전에서 단 한번만 뛰었다. 1945년 5월에서야 전쟁이 끝나고 에세레는 다시 대표팀에 기용되었는데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경기는 에세레가 처음 주장 완장을 달고 뛴 대표팀 경기이다.[3] 프랑스는 경기가 거의 끝나가던 시점까지 잉글랜드에 1대2로 끌려갔다. 그러나 후반 45분, 에세레의 천금같은 동점골이 나와 프랑스는 웸블리에서 처음으로 잉글랜드에 패배 이상의 성적을 냈다.

1947년부터 에세레는 대표팀의 주장이 되었고 1948년까지 대표팀에서 25경기 출전, 8골의 성적을 남겼다.

2.2. 감독

에세레는 1949년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에서 나온 후 올랭피크 리옹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 당시 선수 겸 감독이던 에세레는 취임하자마자 리옹을 디비지옹 1으로 승격시켰지만 리옹은 한 해만에 디비지옹 2로 강등되었다. 이후 에세레는 1954년에 다시 리옹을 승격시키고 나서 개인 사유로 리옹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에세레는 친정팀 스트라스부르에서 잠시 감독직을 맡았다가 1950년대말에 SR 콜마르의 수석코치직을 끝으로 축구계를 떠났다.

2.3. 이후

에세레는 축구계와 거리를 둔 채 25년여간 콜마르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는 신발가게도 정리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노후를 보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에세레는 주로 인사이드 포워드로 뛰었지만 스트라이커, 아웃사이드 포워드, 하프백, 심지어는 골키퍼도 소화 가능한 선수였다.

항상 열심히 뛰어 팀동료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선수였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2. 감독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일부 기록에서 에세레는 전쟁 시기에 스트라스부르로 돌아가 유대인들의 스위스 탈출을 도우면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고도 한다. 또는 제프 헤어베어거의 독일 대표팀 귀화 요청을 거부하다가 수용소로 끌려갈 뻔했지만 스위스로 탈출했다는 기록도 있다.[3] 원래 이때 프랑스의 주장은 알프레드 아스통이었고 아스통도 이 경기에 출전했음에도 에세레가 주장 완장을 찼다. 하지만 12월부터는 아스통이 다시 주장 완장을 찼고 에세레가 주장이 된건 1947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