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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1:25:52

루이스 레게이로

루이스 레게이로의 기타 직책
{{{#!folding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리카르도 사모라
(1928~1936)
루이스 레게이로
(1936)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1941)
}}} ||
파일:Luis Regueiro.jpg
이름 루이스 레게이로 파골라
(Luis Regueiro Pagola)
생년월일 1908년 7월 1일
사망년월일 1995년 12월 6일
국적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출신지 이룬
포지션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신체조건 170cm / 76kg
등번호 -[1]
소속팀 레알 우니온 (1924-1931)
레알 마드리드 (1931-1936)
CD 우스카디 (1938-1939)
아스투리아스 FC (1939-1942)
클루브 아메리카 (1942-1944)
감독 클루브 아메리카 (1942-1945)
국가대표 25경기 16골 (스페인 / 1927-1936)
40경기 ?골 (바스크 / 1937-1938)

1. 생애
1.1. 축구 선수1.2. 이후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3. 뒷이야기4. 사생활5. 수상
5.1. 클럽

1. 생애[2]

1.1. 축구 선수

1.1.1. 클럽

바스크 지방인 이룬에서 태어난 레게이로는 16살에 고향팀 레알 우니온에 입단했다. 당시 레알 우니온은 1926-27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던 나름 바스크 지역 내 강팀이었다. 레게이로는 우니온에서 데뷔한 이후 르네 프티, 동생 페드로[3]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우니온에서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임에도 해트 트릭[4]도 기록할 정도로 꽤 좋은 득점력을 보여줬다.

레게이로는 1931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고 이적 첫 시즌과 두 번째 시즌에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3시즌 연속으로 리그에서는 아틀레틱 클루브 등에 밀리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코파 델 레이에선 2차례 우승을 추가하며 레게이로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이 터졌고 당연하겠지만 라리가도 중단되었다. 바스크 출신의 레게이로는 1937년 동향 선수들과 함께 세계 곳곳으로 축구 투어를 다녔다. 이 팀에는 페드로[5], 이시드로 랑가라,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호세 이라라고리 등의 선수들이 참가했으며 레게이로는 이 팀에서 주장 겸 대변인의 역할을 맡아 내전으로 고통받는 바스크 난민들을 위한 모금과 바스크 정부 설립을 호소했다. 처음에는 프랑스 제3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등 같은 유럽 국가들 위주로 돌아다녔다. 소련에서 이라라고리는 FC 디나모 모스크바를 상대로 무려 5골을 폭파시키기도 했다. 그들이 노르웨이, 덴마크를 거쳐 다시 파리에 왔을 때 프랑코의 손에 바스크 지방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그들은 RC 프랑스와의 경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갔고 쿠바를 마지막으로 투어를 종료했다. 쿠바에서 이들은 멕시코로 이동하여 CD 우스카디(Uzkadi)라는 이름의 팀으로 멕시코프리메라 푸에르사에 참가하여 1938-39 시즌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좌파[6] 성향이었던 레게이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체제에서 위험 인물이었고 그는 멕시코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멕시코에서 레게이로는 아스투리아스의 선수가 되었고 3시즌을 뛴 후 클루브 아메리카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1944년에는 선수에서 은퇴했고 1945년에는 클루브 아메리카의 감독직도 내려놓았다.

1.1.2. 국가대표

18세의 레게이로는 1927년 5월 22일에 열렸던 프랑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했다. 이 경기에서 스페인은 프랑스에 4대1로 낙승을 거두었다.

레게이로는 1928년 올림픽1934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특히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를 맞아 비록 재경기끝에 패하긴 했지만 선제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다.

레게이로는 1936년의 스위스전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고 통산 25경기에서 16골을 넣었다.

1.2. 이후

클루브 아메리카 감독직을 마치고 축구계에서 은퇴한 레게이로는 사망할 때까지 목재 판매 회사를 경영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레게이로는 유럽 선수들 중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축의 선수였고 콤비네이션 플레이에도 능했다. 그런 유형의 선수답게 레게이로는 독특하고 창조적이며 우아한 플레이를 펼쳤다.

레게이로는 Corso란 별명으로 불리며 당시 스페인 축구계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3. 뒷이야기

4. 사생활

레게이로는 1943년, 코요아칸에서 이사벨 우르키올라(Isabel Urquiola)와 결혼식을 올렸고 6명의 자녀를 두었다.

5. 수상

5.1. 클럽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페드로 레게이로는 스페인 내전 등으로 인해 FIFA 월드컵에 참가하진 못했지만 18세 21일의 나이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를 정도로 전도유망한 선수였다. 이 기록은 아직도 스페인 대표팀 내 최연소 출전 3위에 해당한다.[4] 1930년 2월 23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5] 페드로 역시 1932년에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했었다.[6] 그렇다고 완전한 좌파는 아니었고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도 갖추고 있던 온건 좌파 성향이었다.[7] 1931-32 시즌 라 리가는 10팀이 참가했다.[8] Camp de Les Corts. 캄 노우 개장 이전 바르셀로나의 홈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