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멕시코 합중국 제57대 대통령 루이스 에체베리아 알바레스 Luis Echeverría Álvarez | |
<colbgcolor=#006847> 출생 | <colcolor=#000000,#e5e5e5><colbgcolor=#fff,#191919>1922년 1월 17일 |
멕시코 멕시코시티 | |
사망 | 2022년 7월 8일 (향년 100세)[1] |
멕시코 모렐로스 주 쿠에르나바카 자택 | |
학력 |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법학 / 학사) |
재임 기간 | 제57대 대통령 |
1970년 12월 1일 ~ 1976년 11월 30일 | |
서명 | |
직업 | 정치인 |
종교 | 가톨릭 |
국적 | 멕시코 |
정당 | |
부모 | 아버지 로돌포 에체베리아 에스파르사 어머니 카탈리나 알바레스 가유 |
배우자 | 마리아 에스더 수노(1945년 결혼, 1999년 사별) |
자녀 | 8명 |
경력 | 내무부 차관 내무부 장관 제57대 멕시코 대통령 (1970 - 1976) 주호주 멕시코 대사[2] 유네스코 주재 멕시코 대사 |
[clearfix]
1. 개요
멕시코의 제57대 대통령. 멕시코 혁명 이후 태어난 첫 대통령이다.2. 생애
유년기에는 아버지를 따라 멕시코 북동부의 타마울리파스 주의 시우다드 빅토리아에서 생활했다.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이후 모든 학업을 마쳤다. 고등학생 때는 뒷날 후계자가 되는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와 친구가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라사로 카르데나스에 대한 존경심을 내비치며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1945년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를 졸업하고 2년 후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교수가 되어 정치와 헌법을 가르쳤다. 이후 제도혁명당에 입당해 당대표 비서를 역임했다.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정권 시기에는 내무부 차관,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장관이 대선에 출마하며 사퇴하자 남은 기간 동안 장관직을 수행했다. 이후 오르다스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도 내무장관직을 유지하며 1969년까지 재직했다.
3.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
에체베리아가 내무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멕시코는 7%대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멕시코 정부는 경제 성장과 제3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해 올림픽을 유치했다.그러나 이촌향도 현상과 심화되는 빈부격차, 여당이었던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불만이 수많은 청년들 사이에서 쌓여가고 있었다. 결국 68운동과 맞물려 개막식 전날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때 에체베리아는 학생 시위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시위대가 멕시코군에 의해 무력진압 당하면서 300~400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1,345명이 체포되었다.
4. 대통령 재임기
1969년 10월 22일, 에체베리아는 오르다스 대통령에 의해 제도혁명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후 86.0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에체베리아 정부는 경제 정책에서 크게 실패했다. 1960년대에 멕시코의 경제성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지만 빈부격차와 도농격차는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학생운동의 성장으로 이어졌는데 에체베리아는 학생운동이 확산되는것을 막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또한 대규모 공공사업도 벌임으로써 임기 초중반에는 경제성장률이 높게 나왔다. 하지만 이 시기에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이 점차 한계를 나타내고 있었을때로 경상수지 적자가 쌓여나가며 외채문제가 심각해져갔다. 이로 인해 부실기업이 증가하자 부실기업을 살리려고 부실기업들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폈으나 오히려 채무문제만 심각해지는 결과를 낳으면서 결국 1976년에 고정환율제를 폐기하고 IMF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결국 1976년도의 물가상승률은 459%를 기록함으로써 물가상승과 경제불안을 초래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안고 말았다. 다만 임기 초중반에 경제성장률이 높게 나왔던지라 평균 경제성장률은 6.1%를 기록했다.
사회적으로는 틀라텔롤코 학살 사건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후에도 멕시코의 반정부 운동은 점차 격화되었고 일부는 아예 무기를 들어 게릴라에 나섰다. 정부도 이에 대응해 과격하게 반정부 운동을 진압하는 등 양측이 끊임없는 갈등을 벌였다. 1971년에는 멕시코시티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120명이 죽는 코르푸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 참사가 벌어졌다. 또한 멕시코 정부는 반정부 인사들을 잡아들여 고문 등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편으로는 대학생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에서 대학생들을 대거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이러한 갈등과 탄압은 다음 정권에서 반정부 운동가들을 사면하고 이들이 세운 정당을 합법화하면서 진정되기 시작했다. 일부 반정부 세력은 여전히 무기를 놓지 않았으나 1982년 무렵에는 이들도 합법적 공간 안에서의 투쟁으로 방침을 전환한다. 이때의 사회적 혼란을 "더러운 전쟁"이라 부른다.
재임 이전부터 청년들의 시위에 시달렸던 에체베리아는 청년들의 정치화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1971년 후반, 코르푸스 크리스티 학살 이후 모든 형태의 록 음악을 금지시켰다. 이는 1980년대에 와서야 해제된다.
국내에서 좌익 세력들을 탄압했던 것과는 달리, 외교적으로는 제3세계 국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도 중남미의 사회주의 정부들과 강한 유대를 가졌다. 1971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1975년에는 쿠바를 방문했고,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지원했다.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자 아옌데 대통령의 부인인 오르텐시아 부시를 멕시코로 망명시키기도 했고, 이외에도 중남미 여러 독재국가들에서 들어온 망명객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또한 중국과도 수교관계를 맺고 시오니즘을 비판하며 PLO의 대표부 설립을 허가하는 등 외교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5. 퇴임 후
퇴임 직후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당시 현직 총장이던 쿠르트 발트하임에 밀려 낙선했다.21세기에 들어와 비센테 폭스 정권에서 더러운 전쟁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졌고, 2006년 집단 학살 혐의로 체포되어 가택연금 당했으나 2009년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
말년의 모습. |
2021년 4월 21일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을 대기하는 에체베리아 (당시 99세)[3] |
장수하기로 유명한 지미 카터보다도 두 살이 더 많았다. 재임기간도 에체베리아가 카터보다 먼저 재임했다. 정확히 2개월 뒤에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네 살 많았다.
당연하지만 멕시코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이었다. 다만 멕시코 국내를 제외하면 인지도가 없는 수준이라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날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도 사망했고,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전 앙골라 대통령도 사망하여 2022년 7월 8일에만 전직 정부 수반이 3명이나 사망했다.[4]
과거의 학살 전적 때문인지 장례식 당일날 애도일이 선포되지 않았다. 멕시코에서는 대통령 장례식 당일날에 애도일이 선포되어 공휴일이 되는데 에체베리아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망 당시까지도 세계 최고령 국가지도자는 아니었다. 페루 군사정권의 마지막 권력자였던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 전 페루 대통령이 1921년생, 요시프 마놀리치 전 크로아티아 총리가 1920년생으로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무데스는 엿새 뒤인 7월 14일에 사망했고, 마놀리치는 2년 후인 2024년 4월 15일에 사망했다.
6. 기타
- 상술된 1968년과 1971년의 학살 혐의 때문에 이 사람이 체포됐을 때 국내 언론에서 멕시코의 전두환이라고 칭한 적이 있다. # 우연히도 대머리에 안경을 써서 외모도 비슷한 편.
- 멕시코 국내에서의 평가도 좋지 않다. 1971년 당시 정부의 지원을 받은 우익 단체가 민주화 시위를 하는 학생 120여명을 살해한 '엘 알코나소' 학생 학살 사건 50주기 때도 그의 집 앞에 해골 그림을 그려댔을 정도. 물론 대학생 탄압 뿐만이 아니라 현재 멕시코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 실제로 이 사람을 다룬 영상들을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댓글에 호의적인 말은 별로 없음을 볼 수 있다. 부고 소식을 다룬 영상의 댓글창은 마치 한국에서 전두환이 사망했을 때의 기사 댓글창과 비슷해 보일 정도.
- 2020년에 아들인 알바로 에체베리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71 ~ 7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