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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25 16:26:49

루인(젠더학자)

* 블로그

1. 개요2. 비판3. 저서4. 역서5. 학력6. 관련 문서

1. 개요

루인(ruin)[1]은 대한민국의 젠더학 연구자로, 한국 페미니즘 학계에서 보기 드물게 퀴어학, 트랜스젠더 이슈에 큰 관심을 드러내는 학자이다.

TERF로 대변되는 여성주의 학계와 운동권의 트랜스젠더 배척, 배제 흐름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글과 강연을 통해서도 꾸준히 언급을 하는 한국 내 몇 안 되는 인물로, 트랜스페미니즘 계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글이나 사상을 자주 인용하고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합한 '트랜스젠더퀴어'라는 긴 용어를 굳이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젠더 이슈에 관한 포용적 태도로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들에게 명망이 높고, 과거 결성되었던 트랜스젠더 인권연대 지렁이나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설립에도 기여하는등 비단 논바이너리만이 아닌 트랜스젠더 인권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2010년대 한국의 트랜스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상당히 돋보이는 존재로 인정받는다.[2] 트랜스젠더 숙명여자대학교 합격자 입학 반대 논란에 대해서도 TERF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비단 트랜스페미니즘 뿐만이 아닌 장애여성 인권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인터섹스와의 교차적인 사유에도 관심을 드러내어 장애인권 관련 매거진에도 글을 자주 투고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의 탈성전환에 대한 금기시 풍조를 가시화의 장애물이다, 또 하나의 억압이다 등의 비판을 서슴치 않는등 사회적 고정관념(퀴어 사회에서의 고정관념조차도 예외가 아니다)을 비틀어 생각하려는 사고방식을 강조하며, 활동명인 루인 또한 그러한 사고방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선임연구원이며, 비온뒤무지개재단 산하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의 상임 근무자이기도 하다.

2024년 이 기록물을 바탕으로 트랜스페미니즘을 연구하여 문화인류학자 김현미 교수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트랜스레즈비언 당사자이기도 하다.

2. 비판

본인의 저작에서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뜻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적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데버(devor)는 미국 백인 중산층 여성이 젠더 규범을 어떻게 체화하고 실천하는지를 조사했다. 그결과는 예상할 수 있는 만큼이나 흥미롭다. 이성애-비트랜스여성이건, 레즈비언 부치건, ftm/트랜스남성이건 상관없이 태어날 때 '여자'로 지정받은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여성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거의 항상 불안과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을 겪는다고 한다(Devor, 1997). 젠더 경합은 트랜스젠더의 젠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의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에 불만, 불편, '불일치'를 느끼는 경험을 지칭한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 범주와 불화를 일으키고 때때로 불일치를 느끼며 자신에게 적합한 젠더의 몸으로 바꾸기 위해 의료적 조치를 취한다. 의학은 이를 젠더 경합(종종 '젠더 위화감', '젠더 불화'로도 쓰인다)으로 명명했다. 따라서 젠더 경합을 단순히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와 상당한 위화감을 느끼고 결국 다른 젠더로 자신을 설명하는 실천으로만 이해한다면 비트랜스여성과 ftm/트랜스남성의 젠더 경험을 연속선상에 두는 데버의 결과를 납득하기 힘들 수 있다.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분리해서 사유하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다른 젠더로 자신을 설명하진 않는다고 해도,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자신의 젠더 범주로 받아들이고 그 범주에 적합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노력과 전략을 포괄하는 언어로 젠더 경합을 재해석한다면 데버의 설명은 익숙한 것으로 바뀐다.[3]

예를 들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비트랜스여성은 이 사회의 적절한 여성 젠더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몸과 불화하고 경합하며 다이어트를 하고 때때로 성형수술을 한다. 다이어트나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은 '여자가 화장도 안 하냐'라는 지적을 받기 마련이고 이런 지적은 여성 젠더 범주 자체를 의심하진 않는다고 해서 여성 자신의 젠더 범주를 스스로 검열하도록 한다. 다이어트나 화장을 한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해도 몸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문다. 조금이라도 더 완벽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도 사회적 규범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몸은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다. 젠더 규범은 도달하고 체화해야 하는 기준이면서도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며 불안과 공포를 유발하는 사회 질서다. 이성애-이원 젠더를 자연 질서로 삼는 사회에서는 젠더가 두 가지 뿐이라고 해도 이 사회의 구성원은 이를 '선택'할 수 없고 지정 받은 젠더로 살아가야 하며 또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은 선택이 아니라 금기로 작동한다. 그것도 실천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아니라 실천해야 함에도 성취하면 안 되는 금기다. 규범을 지향할 순 있지만 완벽하게 실천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실천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결코 누설해서는 안 되는 금기다. 그러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비트랜스여성은 태어날 때 지정 받은 젠더로 살아가기 위해, 그 젠더를 자신의 젠더로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는 몸 변형을 경험한다. 이런 맥락에서 젠더 경합을 독해할 경우,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 정체성 형성 과정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 된다. 이 사회의 젠더 자체가 불안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욕망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젠더 체화 과정은 불화와 경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고 불화와 경합을 체화하는 과정이다.#
이글은 그가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공통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젠더 디스포리아를 재정의 하는 부분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나올 수 있는 비판은 젠더 디스포리아라는 용어의 과잉 확대된 정의다. 시스젠더 여성이 외모를 지적당하면서 겪는 스트레스와 FtM 트랜스젠더가 젠더, 신체가 불일치하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은 질적, 양적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성에 보수적인 사회의 경직성과 사회적 압박에 대한 반응이지만, 후자는 정체성의 근본적 위기와 의료적 개입 필요성을 포함한다. 트랜스젠더 역시 전자의 문제에 대한 2차적인 압박을 경험할 수 있지만, 후자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다. 모두가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는다는 이상한 주장은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특수성을 부정하며 의료적 성전환을 사회의 경직된 젠더 체계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으로 프레이밍화할 수 있다. 사회의 젠더 규범과의 갈등으로만 트랜스젠더를 보면 성전환을 하는 트랜스젠더를 젠더 규범에 적응하는 것에 실패한 사람들이라는 오독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트랜스젠더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젠더 체계와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정치적 투쟁의 도구와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그는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가 공통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 위해서 이런 주장을 했으나, 이것은 실질적으로 트랜스젠더의 고유한 경험을 박탈하고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취약성을[4] 무시한채 거짓된 동일화를 하면서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을 무력화하는 것에 가깝다.

"젠더 경합"이라는 번역도 이상하다. 그가 2006년에 작성한 글에서 번역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는 gender dyphoria가 의학에서 트랜스젠더를 병리적으로 설명하고 정신병으로 정의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 경합이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트랜스젠더를 젠더 디스포리아만으로 분석하는 것이 병리적일 수는 있으나 젠더 디스포리아는 정신병이라는 뜻이 아니다. 디스포리아는 트랜스젠더 문제 외에도 의학에서 환자가 호소하는 어떠한 불편함을 뜻하는 말로 젠더 디스포리아는 그냥 트랜스젠더가 본인이 가지고 태어난 성별이 싫고, 자신의 성정체성이 부정당하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dyphoria를 dispute와 착각 했는지 뜬금없이 경합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에서 오는 괴로움이라는 본래의 뉘앙스가 사리지고, 사회 젠더 체계와의 갈등이라는 오해를 야기할 수 있는 오역이다. 실제로 그의 글을 인용한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이말을 본래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굉장히 이상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도 "젠더가 경합한다" 같이 이상하게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몇가지 사례들이다.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이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자신의 젠더 범주로받아들이고, 그 범주에 적합한 존재로 살아가고자 취하는 일련의 노력과 전략을 포괄하는 언어이다. 태어날 때 '여자'로 지정받은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여성 젠더 규범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거의 항상 불안과 젠더 경합을 겪는다고 한다. 결국, 이 사회의 젠더 자체가 불안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욕망으로 구성되며, 젠더를 체화하는 과정은 불화와 경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 젠더 경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새로 해석하는 젠더 폭력은, 한 개인이 태어났을 당시 지정받은 젠더로 평생 살아가고 그 젠더 규범을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실천으로 체화하도록 강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즉,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 정체성 형성 과정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연속상에 있는 사건이 된다.

일부 사람들은 실제로 전재하지 않는 이상을 만들고 그 틀처럼 살기를 원한다. 이는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장치들을 사회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MTF 혐오 문제를 개인이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에 겪는 문제로 만든다. 여성 혐오의 문제 또한 그렇다. 젠더 경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생각했을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페미니즘의 방향은 무엇일까? 개인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 맞추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것이 옳지 못하다 생각하여 맞서고자 시위하는 것이다. 근데 같은 문제를 겪는 다른 소수자를 그 이유로 혐오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분법적인 생각과 누군가를 배제하는 세상은, 모두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고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가 젠더 경합을 넘어설 수 있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
나는 여성이라는 젠더 규범을 완벽히 실천하지 못해 삶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이다. 페미니즘 이론을 통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어서야 그 불안과 공포의 근원을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여자’라는 이름에 의문을 품어보자 - 일다 -

인용된 사람들은 모두 지정된 성별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들에서도 젠더 디스포리아가 원하지 않는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서(지정성별과 젠더 정체성의 불일치) 느끼는 정체성의 위기와 괴로움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다.
1. 미녀는 젠더경합을 분명히 겪었다.

루인에 따르면 모든 성별화된 주체는 젠더경합(gender dysphoria)을 겪는다. 기존에 젠더경합은 ‘몸과 마음의 갈등’을 표현할 때, 즉 트랜스젠더의 불만, 불편, ‘불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용은 트랜스젠더 젠더실천을 병리로 낙인찍고, 그를 토대로 시스젠더 젠더실천의 자연스러움을 증명해왔다. 그러나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 젠더규범은 염색체나 성기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학교와 같은 사회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스젠더 몸의 탄생 : <미녀는 괴로워>가 젠더경합을 무마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글 역시 지정된 성별과 젠더의 불일치에서 오는 괴로움과 성역할 압박을 혼동하고 있다. 성역할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는 협소한 젠더 규정과 높은 평균치, 개인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보수적인 사회문화 때문에 발생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몸으로 태어 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시스젠더 여성, 남성이 사회의 기준을 맞추지 못할때는 압박을 받을 수 있으나 반대로 그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노력할 때는 격려를 받게된다. 예를 들어서 호르몬 이상 때문에 털이나고 생리에 문제가 생긴 시스젠더 여성은 나이를 불문하고 태어난 몸에 일치하는 젠더를 갖기위한 호르몬 처방이 허용되고 장려된다. 하지만 남성으로 태어(지정)났으나 그걸 혐오하고 반대의 젠더를 체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지정성별과 젠더의 불일치) 그것은 부정되고 낙인이 찍히게된다. 트랜스젠더는 지정성별의 규범을 따르지 않기(젠더 비순응) 때문에 처벌받고, 지정성별에서 벗어난 젠더(트랜스)를 체현하고자 하는 소망이 처벌받으면서 젠더 맥략에서 이중의 억압을 받게된다. 이게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차이고 트랜스젠더가 가진 핵심적인 취약점 중에 하나다.(안드레아 롱 추, "sex의 자유" 참고) 이 부분은 트랜스혐오주의자들이 사회가 병들어 발생하는 문제를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이 신체훼손에 대한 장려로 이끌고 있다고 비난 선동하는 부분인데, 트랜스젠더 운동가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하면 서양 기준으로 트랜스 커뮤니티에서 엄청난 논란을 받을만한 주장이지만, 루인 본인은 트랜스라고 자칭을 함에도 문제 의식이 없는지 이런 글들이 뛰어났다며 본인 블로그에서 인용하기 까지 했다.#

루인이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싶었다면, 젠더 디스포리아 개념(지정성별과 젠더의 불일치감)을 왜곡할게 아니라 젠더에 의해 발생하는 억압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했을 것이다. 성역할에 경직된 사회에서의 젠더의 사회화는 일반적인 시스젠더들에게는 그저 감시와 처벌이지만 트랜스젠더에게는 원치않는 성별로의 사회화가 강제됨으로서 존재의 부정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성전환 이후에도 트랜스젠더는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경직된 이분법적 젠더 체계에서는 협소하게 규정된 젠더의 범위에 의해 트랜스젠더 여성이 가진 여성성은 의심되며 부정되고 언제나 "생물학적 성별"의 특징으로 오도된다. 그러나 어떠한 여성성이 진짜 여성성인가? Transvestigation라는 현상이 말해주듯 트랜스젠더에 대한 배제는 언제나 전통적이고 경직된 젠더를 체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억압을 가하게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트랜스젠더 혐오의 문제는 젠더에 의한 억압에서의 최전선에 있게된다.

3. 저서

4. 역서

5. 학력[5]

6. 관련 문서



[1] 법적 실명은 따로 있지만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용하거나 드러내는 것을 몹시 꺼리는 편이며 책도 루인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다.[2] 사실 한국의 트랜스페미니스트라는 건 트랜스여성 페미니스트 당사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탐구하고 주변 사람에게 페미니즘 운동에 나서는 존재지, 학술적인 수준으로 트랜스페미니즘을 연구하는 건 사실상 루인이 유일하다.[3] 성역할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를 태어나 지정된 성별과 정체성이 불일치 하면서 오는 괴로움과 혼동하게 해서 성별 불쾌감을 정반대의 의미로 왜곡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몸으로 태어나고, 내가 혐오하는 성호르몬이 몸에서 나오고, 내가 원하지 않는 사춘기 외모 변화를 경험하고, 최선의 노력에도 사회에서 정체성을 부정 당하면서 오는 괴로움은 성역할에 따른 스트레스와는 질적인 차이가 크다.[4] 시스섹슈얼 특권 부분 참고. 그가 숙명여대 관련하여 인터뷰한 내용이 왜 문제인지 언급되어 있다.[5] 다만 루인은 본인의 블로그에서 자신의 학력을 공개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대략 '세상 살며 오죽 해놓은 게 없으면 학력 따위 밖에 소개할거리가 없냐고 느껴져서 불쾌하다'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