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Lucia di Lammermoor가에타노 도니체티가 작곡한 오페라로 총 3막으로 이뤄져 있다. 영국적 소재를 선호하던 도니체티답게[1] 영국 이야기[2] 이다. 원작은 월터 스콧의 '래머무어의 신부'.
사랑의 묘약과 함께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 때문인지 음반과 영상물이 꽤 많이 존재하며 무대에서도 자주 올려지는 편.
국내 무대에서도 약 4번 정도 올려지긴 했지만, 사랑의 묘약에 비하면 그 횟수가 적다. 그 이유는 아래에도 설명하겠지만, '루치아'라는 캐릭터가 안나 볼레나와 마찬가지로 극적인 표현을 요구하는 파워와 초절 기교를 요구하는 배역이기 때문인데, 마리아 칼라스, 조안 서덜랜드, 나탈리 드세이가 이 배역으로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이걸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성악가가 아직은 적은 편이다. 국내에서 루치아로 알려진 소프라노는 신영옥과[3] 조수미가 있다.
2. 오페라의 탄생
이 오페라의 원작 '래머무어의 신부'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원작자 월터 스콧은 결혼식을 치른 후 초야를 치를 신방에서 신부가 신랑을 칼로 찔러 죽였다는 신문의 내용을 보게 되는데, 이에 호기심을 느낀 스콧 경은 스코틀랜드로 가서 '래머무어의 신부' 저술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40일 동안 스코틀랜드를 갔다온 스콧 경은 '래머무어의 신부'를 써서 세상에 내놓았고, 이 소설을 본 도니제티도 크게 감명을 받아 이탈리아의 명대본가 살바토레 캄마라노에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본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살바토레 캄마라노는 스콧 경의 소설이 그닥 맘에 안들었지만, 도니제티의 요청을 들어주고 상당부분을 각색하게 된다. 밑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원작에서 루치아를 정략 결혼 시키려는 어머니를 오빠 엔리코로 바꾸었으며, 소설에 등장한 인물들을 대폭 줄였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오페라 루치아의 대본이 만들어지고, 도니제티는 그 대본을 가지고 작곡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3. 초연의 대성공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프리마돈나들을 위한 오페라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도니제티가 자신과 굉장히 절친했던 프랑스 출신의 테너가수 길버트 루이즈 뒤프레(Gilbert Louis Duprez)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다. 즉, 이 오페라는 루치아가 아닌 에드가르도역의 테너를 위해 쓴 것이라 보면 되겠다. 그렇게 테너를 위해서 작곡한 오페라였건만, 아이러니하게도 1835년 9월 26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흥행 성공이라는 대박을 터트린 동시에 프리마돈나를 위한 오페라로 등극하게 되었다. 루치아역의 파니 타키나르디 페르시아니의 놀라운 호연 덕분이었다.루치아 초연 당시의 타이틀롤을 맡았던 파니 타키나르디 페르시아니(Fanny Tacchinardi Persiani, 1812년 10월 4일 ~ 1867년 5월 3일)
루치아역이 본래 도니제티의 전작 안나 볼레나의 앤 불린과 마찬가지로 기교적으로도 까다롭기 때문에 쉬운 역이 아니었을텐데, 파니 타키나르디 페르시아니가 관객들 앞에서 아주 놀라운 기교를 보여줬다는 의견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또, 당시 벨 칸토 오페라에서 유행했던 '광란의 장면'[4]이 루치아에서 커다란 정점을 이뤘는데, 파니 타키나르디 페르시아니가 자신의 놀라운 기교로 관객을 압도하면서 이 오페라의 명장면으로 만들어냈다는 얘기는 꽤 유명하다.
초연의 성공 이후 많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이 당시 관습대로 객석의 환호를 유지하기 위해 작곡가의 원래 악보에 있지 않은 카덴차를 사용하거나, 꾸밈음 같은 기교를 추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루치아의 인지도를 더욱 높혀준 것과 동시에 부작용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무슨 뜻이냐면 작곡가가 의도했던 예술적 깊이나 극의 표현과 드라마에 대한 배려 보다는 소프라노들의 기교만을 과시하는 오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
19세기 가서는 기계적인 소리를 내는 소프라노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고, 결국 루치아라는 오페라는 후술할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소프라노들의 기교 과시용 오페라 취급까지 받아야 했다.
4. 19세기 후 찬밥 취급 받은 벨 칸토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현재로썬 도니제티 오페라 중에서 사랑의 묘약과 더불어 인기 레퍼토리에 속하고, 외국 무대에서는 자주 올려지는 오페라지만, 19세기에는 다른 벨 칸토 오페라 작품들[5]과 마찬가지로 찬밥 취급을 많이 받았었다.19세기에 안드레아 세니에,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팔리아치,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 페도라, 그리고, 자코모 푸치니의 라 보엠, 나비부인, 토스카같은 베리즈모 오페라가 성행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더 심했던 것은 벨 칸토 오페라는 프리마 돈나(Prima donna)의 기교만을 과시한다는 사람들의 인식과 편견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19세기에는 벨 칸토 오페라들이 무대에서 자주 올려지지 않았고, 질타도 많이 받았다는 것.
그래도 루치아는 기교를 보이고 싶은 소프라노들의 자존심 덕분에(?) 올려지긴 올려졌었다. 이 시기에 루치아 역을 자주 맡았던 소프라노는 넬리 멜바, 아멜리타 갈리 쿠르치, 루이자 테트라치니, 토티 달 몬테[6], 릴리 폰스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허나, 이들 역시 작품의 비극성은 철저히 무시하는 '기교만을 과시하는 루치아'라는 지적이 많았다.
5. 1950년대 이후 재평가 받은 오페라
그렇게 푸대접을 당한 벨 칸토 오페라들은 1950년대 들어서 재평가를 받게 되거나, 다시 극장에 올려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특히,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노르마, 몽유병의 여인, 청교도, 안나 볼레나같은 벨 칸토 오페라를 더 이상 프리마돈나들의 기교 향연이 아닌 하나의 비극성이 담긴 음악극으로 만들어낸 소프라노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 칼라스 였다.[7]루치아로 분한 마리아 칼라스.
칼라스의 루치아는 당대에서도, 현재도 '기적' 그 자체로 칭송받고 있다. 이유인즉슨, 칼라스 이전의 소프라노들은 루치아의 아리아를 부를 때, 너무 기교만을 내세운데 비해서 칼라스는 자신의 음색으로 루치아라는 캐릭터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극적으로도 굉장히 처절한 루치아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즉, 칼라스에 의해서 루치아가 부활했다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특히, 칼라스가 부르는 광란의 장면은 단연 압권이니 직접 들어보는 것을 추천!
칼라스가 '루치아'라는 캐릭터에 불을 붙여주었다면, 거기에 또 다른 장작을 피운 소프라노도 등장했다. 바로, 호주 출신의 성악가 조안 서덜랜드 였다.
루치아로 분한 조안 서덜랜드.
루치아는 서덜랜드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배역이었다. 이유인즉슨, 이 역할로 서덜랜드가 본격적인 스타덤으로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덜랜드의 광란의 장면
서덜랜드의 루치아는 칼라스와 비교하면 극적인 면으로는 약간 떨어지지만 완벽한 초절기교와 고음처리로 또다른 루치아의 경지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 여담
- 국내에서는 보통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라는 제목으로 통한다. 스코틀랜드 이야기이니 영국식으로 '래머무어의 루시', 리브레토를 존중하여 이탈리아식으로 부르려면 '람메르모르의 루치아'일텐데 이도저도 아닌 것.
- 기독교 찬송가중에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멜로디는 루치아의 후반부에 루치아의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하객들의 합창에서 따온 것이다. 이 찬송가의 가사는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이 쓴것. 일제 강점기때 불려지던 애국가가 "올드 랭 사인"의 멜로디에 붙여져서 불려진것과 비슷한 사례. 그런데 의외로 가사와 멜로디가 잘 매치가 되는 편인 것을 보면 편곡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아마도 서구 오페라에 정통했던 클래식 덕후였을지도 모르겠다.
-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의 중반부에서 보바리 부부가 이 작품을 관람하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보바리 부인이 초반에 드라마와 음악에 과몰입해 제대로 즐기다가 중반부에는 알프레도 역의 테너 가수에게 망상을 품고 3막 직전에 갑자기 (미래의) 애인이 나타나는 바람에 하이라이트인 '광란의 아리아'는 귓등으로 흘려버린다. 반면 샤를 보바리는 음악 때문에 가사가 잘 안들려서 뭐가뭔지 모르겠다고 집중을 못한다.
7. 등장인물
- 엔리코 아쉬톤 : 래머무어를 다스리는 영주이자 루치아의 오빠 (바리톤)
- 루치아 : 엔리코의 여동생으로 에르가르도와는 연인 사이[8] (소프라노)
- 에드가르도 : 레벤스우드의 영주이자 루치아의 애인 (테너)
- 라이몬도 : 칼뱅파 목사 겸 루치아의 가정교사 (베이스)
- 아르투로 버클로우 : 루치아의 약혼자 (테너)
- 노르마노 : 엔리코의 심복 (테너)
- 알리사 : 루치아의 시녀 (메조 소프라노)
8. 명반과 영상물
벨 칸토 오페라 중에서도 워낙 인지도 있는 작품이고, 도니제티 오페라 중에서도 사랑의 묘약과 더불어 잘 올려지는 작품이리만치 음반과 영상물이 나와있다. 아래는 이 오페라 관련된것들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목록들이니 참조.예전 발매표지. 최근에는 음질이 더욱 향상되어 Decca Opera 시리즈로 재발매 되었고, 시디도 2장으로 줄이는 등 가격이 많이 착해졌다.
맨 처음 언급할 전곡반은 데카에서 나온 보닝-서덜랜드 음반이다. 조운 서덜랜드, 루치아노 파바로티, 셰릴 밀른즈, 니콜라이 갸우로프가 참여하고, 서덜랜드의 남편 리처드 보닝이 지휘한 이 음반은 1971년에 녹음된 것으로 소위 '서덜랜드 신반 루치아'라고도 불린다. 이 음반이 서덜랜드 신반이라 불리는 이유는 서덜랜드가 1961년에 존 프리처드의 지휘에 의한 루치아 녹음에 참여했기 때문이다.[9] 하지만, 구반은 서덜랜드가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막 시작할때쯤에 녹음한 것이라 목소리의 아름다움과 기교의 깔끔함은 있어도 극적 표현에서는 풍부하지 못하다. 즉, 서덜랜드가 너무 이쁘게 노래만 부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평이 대부분. 무엇보다, 구반은 레나토 치오니라는 함량미달의 가창을 들려준 테너 때문에 폭삭 망한 음반이나 다름없다.[10] 반면, 신반은 비록 목소리에서 약간 나이가 들었지만[11], 서덜랜드의 극적 표현이 더욱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발음에서도 더욱 좋아졌으며[12], 구반에서 느끼지 못했던 이 오페라의 명장면을 이 음반에선 정말 인상적이게 처리했다. 루치아가 오빠의 강요를 받는 부분과 광란의 장면씬은 정말 감동적인데, 서덜랜드의 은은한 드라마틱함과 청순미가 단연 압권이다. 칼라스와는 또 다른 느낌의 루치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서덜랜드 뿐만 아니라 다른 배역진도 소위 말하는 '드림 캐스팅'답게 중량감이 넘치는 노래를 들려준다. 에드가르도역의 파바로티는 밑에 소개되는 디 스테파노, 크라우스, 도밍고에 비하면 극적 표현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좀 더 애절한 표현이 있었으면하는 바람도 있지만[13], 가창에서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의 파바로티답게 찌렁찌렁하고, 시원한 가창을 들려준다. 밀른즈의 엔리코, 갸우로프의 라이몬도 역시 중량감 넘치는 노래를 들려주어 연주의 완성도를 더욱 높혀 주었다. 이제까지 나온 루치아 전곡반 중에서 최상 궁합의 저음 가수라 생각될 정도이다. 이 오페라를 처음 접할 때 추천하고 싶은 음반이다. 더군데나, 이제까지 나온 루치아 전곡반들 중 통상 삭제되는 부분까지 모두 연주한 노컷 연주라는 점[14]과 음질도 근래의 녹음된 것이라고 생각될만큼 뛰어나다는 점이 특징.
1959년 런던 코벤트 가든 극장 실황. 최근에 Myto에서 재발매 했으니 참조.
위의 전곡반이 팀웍이 잘 이뤄진 드림 캐스팅이라면, 이 음반은 프리마돈나쪽에 중심이 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이것은 1959년 런던 코벤트 가든 실황으로 당시 샛별로 떠오르던 조운 서덜랜드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하게 해준[15]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음반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서덜랜드에게 있어 루치아는 아주 각별한 배역이었다.
칼라스 루치아 음반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1955년 베를린 극장 실황 음반.
이것은 1955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열렸던 실황을 녹음한 음반이다. 음질은 좋은 편은 안되지만[16], 50년대 이후 루치아의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줬던 마리아 칼라스만 봐도 소장가치는 충분하다.
[1] 여왕 3부작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데브뢰가 그 증거다. 그것도 여왕 3부작은 우연찮게 다 비슷한 시기...[2] 루치아의 경우 정확히는 스코틀랜드 쪽으로 봐야하지만..[3] 실제로 신영옥의 루치아는 한국 성악가들 중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케이스[4] 이 광란의 장면은 도니제티의 전작 안나 볼레나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후 벨 칸토 오페라계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또, 이런 매드 씬이 유행하게 된 이유는 작곡가가 소프라노들이 놀라운 기교와 새로운 표현력을 마음껏 과시 해보라는 위함을 나타내는 뜻이라는 설도 있다.[5] 빈첸초 벨리니의 노르마, 몽유병의 여인, 청교도. 조아키노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오페라들, 도니제티의 또 다른 작품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데브뢰 등.[6]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동기이자 모데나 출신의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가 어린 시절에 토티 달 몬테가 부른 루치아 매드 씬을 정확히 따라불러서 가족들을 모두 놀랬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7] 여담으로, 마리아 칼라스는 안나 볼레나도 다시 극장에 올려지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8] 정확히는 몰래 사귀는 것이라 봐야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실상 이 오페라 내용이 스코틀랜드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9] 존 프리처드 지휘반은 흔히 '서덜랜드 구반 루치아'라고 부른다.[10] 레나토 치오니는 루치아 음반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오페라 배역에서도 시원찮은 노래를 들려줬다는 평가가 많다.[11] 실제로 이 음반을 녹음할 당시 서덜랜드의 나이는 45세 였다.[12] 1960년대의 서덜랜드는 그 문제의 발음이 항상 지적을 많이 당했다.[13] 그래도 마지막에 에드가르도가 자살하는 장면에선 어느정도 애절한 표현을 나타내려고 노력하긴 했다.[14] 데카에는 노컷으로 이뤄진 전곡반이 많다. 벨리니의 청교도 역시 노컷으로 연주되기도 했고, 서덜랜드 구반 라 트라비아타도 그렇다.[15] 이 당시 서덜랜드는 1950년대 중반까지는 무명 소프라노에 불과했다가, 알치나 공연 성공 이후 이름이 조금이나마 알려진 상태였다.[16] 그래도 칼라스의 그 유명한 라 트라비아타 라 스칼라 실황의 극도로 열악한 음질 보단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