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사승(士承) |
본관 | 전주 류씨[1] |
출생 | 1898년 3월 28일 |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고천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고천리) | |
사망 | 1949년 7월 13일 |
경상북도 안동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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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유연건(柳淵建)은 그의 친형이다.
2. 생애
류연술은 1898년 3월 28일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임동면 고천리에서 아버지 류광호(柳廣鎬)와 어머니 반남 박씨 박제망(朴齊望)의 딸 사이의 4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2]1925년 10월 항일단체인 정광단(正光團) 결성에 참여한 류연술은 조사부를 맡았다. 이후 수사부 위원,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형 유연건이 신간회 안동지회의 서무와 총무간사를 맡았을 때, 그 또한 간사와 대표위원, 정기대회 전형위원(銓衡委員) 등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간회 대구지회 상무위원(常務委員)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조선공산당 안동군 집행위원으로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28년부터는 신간회 안동지회 간사·대표위원·정기대회 전형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대구부로 이주한 뒤, 1929년 8월 신간회 대구지회의 서기 겸 서무부장(庶務部長)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그는 같은 해 12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통해 대구지역에서도 격문을 배포하는 등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같은 달 15일 류쾌동(柳快東)·정간(鄭澗)·박명줄 등 3명의 동지와 함께 대구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29일 풀려났다. 그런데 얼마 후인 1930년 1월 7일 저녁 대구사회운동자 신년 간친회(新年懇親會)를 마치고 이튿날인 8일에 또 다시 송두환·장인환 등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채충식(蔡忠植) 등 다수가 체포되었고, 사건은 서울로 이어져 종로경찰서 고등계를 중심으로 한 '학생전위동맹사건(學生戰衛同盟事件)'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3월 17일 검찰로 송치되었으나, 얼마 후 불기소처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그는 1930년 8월 28일 대구에서 류쾌동 등과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다 재차 검속되기도 했고, 같은 해 신간회 대구지회 서기장(書記長)으로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1931년 10월 27일 형 집행 만기로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사 포항지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