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투수였던 시절 | |
성공한 타자 전향 시절 | |
리처드 알렉산더 앤키엘 Richard Alexander Ankiel | |
생년월일 | 1979년 7월 19일 ([age(1979-07-19)]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플로리다 주 포트 피어스 |
포지션 | 투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신체 | 185cm, 95kg |
프로입단 | 1997년 드래프트 2라운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지명 |
소속팀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999~2002, 2004, 2007~2009) 캔자스시티 로열스(2010) 애틀랜타 브레이브스(2010) 워싱턴 내셔널스(2011~2012) 휴스턴 애스트로스(2013) 뉴욕 메츠(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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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었던 야구선수. 한 때는 천재 투수로 각광받았지만 느닷없이 제구력을 잃고 볼질을 난사하게 되는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에 걸리며 투수로서의 미래를 송두리째 잃어버렸으나, 눈물겨운 노력으로 외야수 전향에 성공하여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2. 선수 경력
2.1. 촉망받던 루키
해당경기는 1999.08.29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이다. 상대 선발은 존 스몰츠였으며, 이 경기에서 앤키엘은 6이닝 5피안타 2실점 2자책 5볼넷 3탈삼진 108구를 기록 하였고, 스몰츠는 8이닝 6피안타 3실점 3자책 4볼넷 7탈삼진 1피홈런 112구를 기록하였다. 경기는 12회 연장까지 간 끝에 브레이브즈가 4대3으로 이겼다.
앤키엘은 플로리다주 포트피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혹하리만큼 그에게 야구를 시켰고, 때문에 앤키엘은 항상 실수하면 안된다는 압박에 시달리며 야구를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는 고등학교에서 그의 근면함과 성실함 등을 인정받게 되었고, 이는 프로가 되어서도 그랬다. 또한 그의 엄청난 구위를 만든 투구폼 역시 그의 아버지가 틀을 잡아 가르친 투구폼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낚시 가이드로 살던 중 마약 밀매상과 엮이며 범죄자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25년 간 14차례 체포되었고 6번 구속되었다. 앤키엘이 풀타임 선발투수로 데뷔하던 2000년에도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았는데, 앤키엘은 이 법정에 출두해서 담담하게 그의 아버지가 징역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997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지명받은 앤키엘은 마이너리그에서 불같은 탈삼진 능력을 보이며 많은 스카우터들의 혼을 쏙 빼놓았고, 1999년에 빅리그에 콜업되었다.
당시 앤키엘의 베이스볼 아메리카 유망주 순위는 1999 2위, 2000 1위였다. 비슷한 수준의 (역대) 톱급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
그리고 이듬해인 2000년에 첫 풀타임 선발 투수로서 시즌을 보내면서 11승 7패 197탈삼진 평균자책점 3.50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비록 제구가 완벽하지 않아 BB/9이 4.6였을정도로 안좋았지만 뛰어난 탈삼진 능력[1]과 피안타 억제력[2]을 선보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인왕 투표 2위에 올랐다.[3]
이런 앤키엘의 활약에 흠뻑 빠진 세인트루이스의 토니 라 루사 감독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NLDS 1차전 선발로 앤키엘로 결정, 그렉 매덕스와 맞붙게 한다. 당시 카디널스 선발진에는 20승을 거둔 대럴 카일도 있었고, 사이영 위너 출신인 팻 헨트겐도 있었기에 앤키엘의 1차전 선발 내정을 두고 많은 팬들은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을 보냈다. 물론 라 루사로써도 한번 걸어볼 만한 선택이었던 것이, 1차전에 앤키엘이 나오고 1차전 시작 전까지 3일의 휴식을 취한 팀의 에이스 카일이 2차전에 나오면 두 투수를 같은 시리즈에 모두 한번 더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앤키엘과 호흡을 줄곧 맞춰왔던 마이크 매시니가 디비전시리즈 직전 부상을 당했고 앤키엘은 백업 포수이던 카를로스 에르난데스와 호흡을 맞추게 되었는데, 이 역시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2.2. 악몽의 경기와 기나긴 방황
2000 NLDS 1차전, 앤키엘은 2이닝을 무실점으로 잘 막아냈으나 문제는 팀이 6-0으로 리드하고있던 3회였다.[4]그렉 매덕스 볼넷 출루.
라파엘 퍼칼 플라이아웃.
앤드루 존스 타석에서 와일드피치 두번으로 매덕스 3루까지 진루. 앤드루 존스 볼넷 출루.
치퍼 존스 타석에서 세번째 와일드피치로 앤드루 존스 2루까지 진루. 치퍼 존스 루킹 삼진.
안드레스 갈라라가 타석 풀카운트에서 네번째 와일드피치로 매덕스 득점. 앤드루 존스 3루 진루.
브라이언 조던 좌익수 방면 적시타.
레지 샌더스 타석에서 다섯번째 와일드피치로 갈러라가, 조던 진루. 갈러라가 볼넷 출루.
월트 와이스 좌익수 방면 2타점 적시타.
이후 끝내 3회를 버티지 못한 앤키엘은 마이크 제임스로 교체되었다. 그나마 이 경기를 이긴 세인트루이스는 애틀란타를 가볍게 스윕하고 NLCS에 진출해 뉴욕 메츠와 맞붙게 되었고, 1차전에서 패한 라루사 감독은 2차전 선발로 앤키엘을 내세우며 다시 믿음을 보냈다.
하지만 NLDS에서의 처참한 투구로 이미 멘탈이 붕괴되어 있던 앤키엘은 1회부터 사고를 치는데 당시 첫번째 공부터 당시 메츠의 리드오프였던 티모 페레즈의 머리를 향하는등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더니
NLCS 2차전에서의 앤키엘의 성적은 0.2이닝 1피안타 3볼넷 2실점이었다. 팀도 패배, 팀이 탈락위기에 몰린 시리즈 5차전에서 불펜등판까지 했지만 불펜으로도 와일드피치와 0.2이닝 2볼넷 1실점을 기록하면서 신통찮은 모습을 보였고, 그대로 팀은 마이크 햄튼한테 완봉패를 당하면서 1승 4패로 월드시리즈행이 좌절되었다.
이후 앤키엘은 그 다음 해 24이닝 25볼넷 7.13 ERA를 기록하고 AAA로 강등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악명높은 타격 친화 리그인 퍼시픽 코스트 리그에서 제구를 완전히 잃어버리며 볼넷만 계속 기록한 것이다. 2001년 PCL 멤피스에서 3선발 4⅓이닝 동안 기록한 그의 9이닝당 볼넷 수는 35.3개.
결국 그는 루키 리그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다행히 루키리그에서 그는 지명타자로 겸업[5][6]하며 자신감을 되찾았지만, 2003년 AA에서 다시 6점대 ERA를 찍고는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재활을 거친 뒤 2004년 잠시 빅리그 물을 먹긴 했지만, 창창하던 투수로서의 미래는 더 이상 없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의 몰락의 이유를 위에서 언급된 가정사의 영향이다라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고 또는 그의 투구폼에서 찾기도 했는데, 그의 투구폼은 화려했으나 앞발보다 머리가 먼저 앞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그의 릴리즈 포인트가 높아지는 이유를 만들었다. 그의 전성기 때에도 그의 제구가 불안했고 특히 폭투가 자주 발생했던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
2.3. 타자 전향
앤키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 마지막 도전을 시작했다. 외야수로서 다시 빅리그에 도전하겠다 마음먹은 것.다행히 그의 새로운 도전은 순조로웠다. 싱글A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리그를 평정하고 중견수 수비에도 적응하면서 2006년 메이저리그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된 것. 비록 무릎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2007년까지 그 도전은 이어졌지만, 마침내 그 날은 찾아왔다. 2007년 8월 7일. 그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전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투수가 아닌 외야수 릭 앤키엘로서 메이저리그에 복귀하였다.
2007년 끝나고 본인이 의사의 처방에 따라 성장호르몬 복용했음을 털어놓긴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징계는 면했고, 다른 약쟁이들과 달리 오히려 동정의 시선을 받았다. "오죽하면 그런 것까지 써봤겠냐"라고.
그렇게 OPS 0.8대를 기록하며 2008년엔 25홈런을 때려내는 등 준수한 활약을 펼친 앤키엘은 부진했던 2009년을 끝으로 카디널스를 떠나게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캔자스시티 로열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거쳐 워싱턴 내셔널스의 중견수로 자리매김했다. 비록 성적 자체는 부진하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의 늪에서 부단한 노력을 거듭하여 이렇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고 있다.
하지만 부진한 성적은 어쩔 수 없었는지, 7월 19일자로 드류 스토렌의 복귀 시점과 맞물려 내셔널스로부터 지명할당되었다.
2013년 1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너계약을 맺었다. 스프링캠프 동안 주전 우익수로 낙점받아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개막전 때는 주전으로 출장하진 못했지만 대타로 출장해 3점 홈런을 쳤다. 그러나 이후 선풍기질을 일삼고 타율도 1할대로 추락하면서, 결국 5월 6일 지명할당되었다. 5월 13일 뉴욕 메츠와 계약하면서 당일날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었다. 6월 8일 팀이 지는 와중에 4타수 무안타에 삼진을 3개나 당하면서 지명할당되었고, 6월 13일 결국 방출되었다.
그리고 2014년 3월 6일, MLB를 호령할 줄 알았던 천재의 은퇴소식이 들렸다. 2016년부터는 카디널스의 전담 방송국인 Fox Sports Midwest의 해설자로 있다.
그런데, 뜬끔없이 복귀 소식이 들려왔다. 세인트루이스가 엔키엘을 2019년 불펜투수로 영입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잘 되지 않았던 것인지 결국 복귀를 포기했다고.
3. 이모저모
- 외야수로 전향했지만 투수 시절의 강견은 여전해서 메이저리그 최고의 외야 송구능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심심치 않게 외야에서 스트라이크를 꽂아넣는다.
- 너클볼 최초의 사이영상 수상자 R.A. 디키의 자서전 "Wherever I Wind Up(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에서, 디키가 우리말 번역본 기준으로 3페이지(pp.192-194)를 할애해서 릭 엔키엘에 대하여 애정을 가득 담은 소회를 하고 있다. 디키는 1999년 릭 앤키엘을 트리플A 경기에서 처음 보게 되는데 "그는 내가 본 투수 가운데 가장 천재적이었다", "내가 아무리 잘 던진다 해도 릭 앤키엘처럼 던지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릭 앤키엘의 투수 능력을 극찬했다.(특히 강속구와 커브) 2001년 5월 트리플A 경기에서 릭 앤키엘이 역대 최다인 1이닝 5개 폭투 경기를 직접 목격했는데, 너클볼 전문 투수로 변신한 첫 해 역대 최다인 3과 1/3이닝 동안 6개의 홈런을 허용한 적이 있는 디키가 "스물한 살의 나이에 한 때 그토록 자연스러웠던 재능을 다시 회복하려고 애쓰는 길 잃은 영혼을 보는 것은 무척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추억한다. 디키는 릭 앤키엘의 외야수 변신에 대해 "일반 투수에서 너클볼 투수로 전환한 나의 경우는 앤키엘에 비하면 하찮은 변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글의 말미에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던 그의 10대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회고를 끝맺음한다.
- MLB 퍼펙트이닝 2020이란 게임에서 포텐셜 카드로 존재하는데 스텟 환산시 무려 오버롤 98이다.[5] 게다가 카페내에 꾸준히 특폼 요청 글을 올리고 있는 유저가 있어 아마도 특폼이 생길 것 같다.
- 위에서 언급된 험한 가정사와 기구한 커리어의 영향인지 이 선수를 모티브로한 영화가 2016년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제목은 더 페놈(The Phenom)[8]
4. 관련 문서
[1] 2000시즌 앤키엘의 9이닝당 탈삼진은 10개로, 이는 12.6개를 기록한 '빅 유닛' 랜디 존슨에 이은 내셔널리그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2] 2000년 당시 규정이닝을 먹은 내셔널리그 선발중 9이닝당 피안타율이 최소부분에서 전체 2등이었다. 여담으로로 이 시즌 최소부분 내셔널리그 1등은 박찬호[3] 당시 내셔널리그 신인왕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라파엘 퍼칼로 당시 내셔널리그 출루율 18등에 빛나는 .394의 출루율과 내셔널리그 5등인 40개의 도루를 통해 신인왕을 받았다.[4] 훗날 이 현상을 입스라고 한다.[5] 마이너리그에서는 상위 싱글A 레벨까지는 모두 지명타자제를 실시하며 AA에서부터 내셔널리그 산하 팀인 경우에만 투수의 타격을 실시한다.[6] 앤키엘은 다행히도 1.003라는 엽기적인 OPS와 준수한 투수스탯을 기록하며 자신감을 되찾았다.[5] 이는 게임내 레전드 카드와 동급인 수준이다.[8] 다만 라이센스 문제인지 선수의 실제 투타와는 다른 우투에 이름도 전혀 다른 호퍼 깁슨 주니어로 나온다. 소속된 팀의 유니폼 색 배열도 아예 다르게 나온다. 호퍼 깁슨 주니어 역할을 맡은 배우는 위플래쉬의 단편영화 버전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조니 시몬스가, 호퍼 깁슨 주니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신과 의사는 폴 지아마티가, 문제의 아버지인 호퍼 깁슨의 역할은 에단 호크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