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린왕 林旺 | |
초명 | 아메이(阿美) |
출생 | 1917년 10월 29일 |
영국령 버마 (現 미얀마) | |
사망 | 2003년 2월 26일 (향년 85세) |
중화민국 타이베이동물원 | |
종 | 아시아코끼리 |
성별 | 수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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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린왕 할아버지
林旺爺爺
-타이베이동물원에서 생활하던 당시 린왕의 별명.
린왕(林旺)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중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의 노역에 동원되다 국민혁명군에 노획되어 사육된 수컷 아시아코끼리로, 84세에 폐사한 인도의 암컷 아시아코끼리 가자라니 락쉬미(Gajarani Lakshmi)를 1년 정도 넘어서는 85세[1]에 폐사하여 기록상 가장 장수한 코끼리였다.[2] 후에 이 기록은 무려 105세의 인도의 암컷 아시아코끼리인 '바찰라(Vatsala)'에게 깨졌지만, 린왕이 기록상 가장 장수한 수컷 코끼리인 것은 여전하다.林旺爺爺
-타이베이동물원에서 생활하던 당시 린왕의 별명.
2. 생애
2.1. 중일전쟁
1947년, 중화민국 육군 장교 쑨리런(孫立人)과 함께 촬영한 사진 |
당시의 버마의 일본군은 코끼리를 물자수송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국민혁명군 또한 노획한 코끼리들을 물자수송에 사용했으나 코끼리들의 수송력이 다른 연합군들로부터 지원받은 차량들에 비해서 그 효율성이 떨어지게 되자 버마에 주둔했던 국민혁명군들은 13마리의 코끼리들을 중화민국으로 보냈다.
그렇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광둥성에 이르는 대장정 끝에 13마리의 코끼리 중에 6마리가 죽었으나[4][5] 린왕은 살아남아 중화민국 땅을 밟게 되었다. 종전 후에야 중화민국에 도착한 7마리의 코끼리들은 승전을 기념하는 건축물 건설과 서커스 등에 동원되다 4마리는 각각 베이징, 상하이, 난징, 창사의 동물원으로 보내졌고 린왕을 포함한 3마리의 코끼리는 광저우에 머무르게 되었다.[6]
2.2. 타이완으로
린왕(우)과 아페이(좌) |
2.3. 동물원 생활
1954년, 쑨리런은 당시에는 위안산향에 있던 타이베이동물원에 린왕을 기증하였고, 린왕은 당시 타이베이동물원이 보유하고 있던 암컷 아시아코끼리 마란(馬蘭)과 짝이 되었다[10]. 그리고 본래 이름은 '아메이'였는데, 타이베이동물원은 이 이름이 너무 여성스럽다고 판단하여 "숲의 왕"이라는 의미의 '린왕'(林王)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이를 보도하던 기자의 실수로 林王이 아닌 성조만 다른 林旺으로 잘못 보도되었고, 이후 동물원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아 '린왕'(林旺)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단, 마란과 린왕 사이에는 새끼가 없었는데, 마란이 린왕 곁에 붙으면, 린왕이 상아로 마란을 밀어버리는 등 린왕은 짝짓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1969년, 쉰 두살이 된 린왕의 대장에 거대한 종양이 생겼다. 수술을 통해 종양을 제거해야 했으나 당시 타이베이동물원은 기술과 경험이 부족하여 코끼리를 마취시킬 수 없었고, 결국 수의사와 동물원 직원들이 린왕을 묶어놓은 채 무마취 상태로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린왕은 몇시간 동안의 고통으로 인한 PTSD로 성격이 거칠어졌다고 한다. 옛날의 사람의 말도 잘듣고 묘기도 부리던 코끼리는 사라지고, 화를 참지 못하고 마란을 코로 가끔씩 때리는 등 거칠어진 코끼리만 남았다. 또한, 기억력이 좋은 코끼리 답게, 린왕은 이 경험 때문에 동물원 관계자들을 고통과 연계해서 생각했고, 린왕은 자신을 40년동안 돌본 사육사와 극소수의 몇명을 제외하곤 사람을 항상 경계했다고 한다.[11]
1983년에는 타이베이동물원이 린왕의 66세 생일 잔치를 열었고, 이후 매년 10월 마지막 일요일마다 생일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12] 이때 수천명의 관람객들은 물론, 타이베이의 시장까지 참석할 정도로 큰 행사였다. 동물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동물 투표를 할때 린왕은 항상 1등을 차치하는 등 동물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동물이었다.
린왕(좌)과 마란(우) |
2002년 10월, 마란은 림프종으로 죽었고, 오랜 짝을 잃은 린왕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2.4. 죽음 및 그 이후
왼쪽 뒷다리 관절염과 여러 합병증으로 쇠약해져 가던 린왕은 결국 85세의 나이로 2003년 2월 26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타이베이동물원은 린왕의 추모식을 열어 수많은 방문객들이 꽃과 카드를 남겨 린왕을 추모했으며, 당시 타이베이 시장 마잉주는 린왕에게 명예시민권을 부여했고, 중화민국 총통 천수이볜도 린왕의 추모식에 화환과 "우리의 영원한 친구 린왕"이라 적힌 카드를 보냈다고 한다.박제된 죽은 린왕 |
린왕은 살아생전에도 큰 인기를 누렸던 코끼리지만, 죽고나선 더욱 더 상징적인 동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린왕의 삶 자체가 대만의 역사를 반영하기라도 했듯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과 국부천도, 대만의 경제 성장 등 3대를 걸친 세대가 린왕을 볼 수 있었으며, 아직도 린왕을 대만의 정체성의 일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3. 참고문헌
[1] 2002년에 85세 생일을 맞은 후 4달도 안 되어 폐사했기 때문에 86세가 아닌 85세라고 해야 한다.[2] 이를 사람 연령으로 환산하면 무려 130살 정도이다. 반대로 이름이 기록된 코끼리 중 단명한 코끼리는 모티. 묘하게도 린왕과 모티 둘 다 수컷이었고, 수코끼리 기준으로 하나는 장수, 하나는 단명한 사례로 남게 됐다.[3] 린왕을 돌보던 병사에 의하면, 린왕은 코끼리 답게 물을 좋아했으며 병사들과 함께 물에서 목욕하는걸 좋아했다고 한다.[4] 코끼리들은 아스팔트와 풀밭을 번갈아가며 먼 길을 걷다 발바닥을 자주 다쳤으며, 설상가상으로 정식 군 소속이 아니어서 사료 배급도 제대로 못 받았다. 군 노새들의 사료를 나눠먹긴 했지만, 코끼리와 노새가 먹는 양은 차원이 다르다. 병사들이 직접 물물교환과 모금운동도 벌였지만, 결국 피로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코끼리 6마리가 죽었다.[5] 이때 린왕은 야맹증까지 걸려서 밤에 잘 움직이지 못했는데, 병사들은 전통적인 치료 방식인 아편을 넣은 배를 먹임으로서 치료했다. 그럼에도 린왕을 포함한 코끼리들이 비실거리자, 코끼리들을 담당하던 간부는 상부에 요청해 코끼리들을 트럭으로 안전하게 운반했다.[6] 광저우에서 코끼리들은 서커스에 동원되었는데, 이때 벌어들인 돈은 후난의 기근 피해자들을 위해 쓰여졌다.[7] 이때 린왕은 뱃멀미를 좀 했지만, 밥을 충분히 먹으면 괜찮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5일동안의 항해에 필요한 먹이의 양을 잘 계산 못해서 코끼리들은 굶주리다 결국 배에있던 비막이 천까지 먹었다고 한다.[8] 타이베이동물원 교육센터에 설치된 설명문에 따르면, 아페이의 골격은 국립 타이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고 한다.[9] 수컷 코끼리들은 머스트라는 발정기를 겪는데, 이때 매우 사나워진다. 그래서 당대 많은 동물원들은 수컷 코끼리의 사육을 포기했지만, 타이완은 전쟁에서 살아남고, 군 복무까지 한 린왕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돌보기로 결정했다.[10] 당시 마란은 3살짜리 어린 암컷이었고, 린왕과는 30살 이상이나 차이가 났다. 하지만 린왕과 마란의 사이는 의외로 좋았다. 마란은 어렸을 때부터 동물원에서 여러 묘기를 배웠는데, 린왕을 만난 뒤부터는 오히려 묘기 연습을 할 시간이 되면 항상 린왕 뒤로 숨어서 연습하기를 거부했고, 결국 동물원은 묘기를 가르치는걸 포기했다. 둘은 살아생전 숨바꼭질 놀이를 자주 했다고 한다.[11] 린왕과 같이 복무했던 한 병사는 바뀐 린왕의 모습을 보고 전우회때 "전우들은 다 죽고, 아내는 훨씬 어린데다 자식도 없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가 있냐?"라며 씁쓸하게 말했다고 한다.[12] 전쟁때 그를 돌보던 란웨이창이라는 병사가 린왕을 찾아왔는데, 그는 전쟁 당시 린왕을 먹일때 사용된 쇠 컵을 가져와 팝콘을 잔뜩 담아 줬다고 한다. 팝콘을 받아먹는 린왕의 모습을 보며 란웨이창은 린왕의 행동이 느려지고, 몸에 검버섯이 난걸 보곤 린왕도 이제 다 늙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13] 이때 수천명의 대만 시민들이 린왕과 다른 동물들이 집을 옮기는 걸 구경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