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라틴어: Marcus Livius Drusus Claudianus | |
이름 |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Marcus Livius Drusus Claudianus) |
입양 전 이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Appius Claudius Pulcher) |
가문 | 클라우디우스 풀케르(Claudius Pulcher)[1] → 리비우스 드루수스(Livius Drusus)[2] |
파벌 | 옵티마테스(Optimates) |
출생 | 기원전 93년,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라티움 푼디(오늘날의 이탈리아 라치오현 폰디) |
사망 | 기원전 42년, 그리스 필리피(향년 51세) |
직위 | 원로원 의원, 법무관 |
종교 | 로마 다신교 |
선출직 | 기원전 50년 법무관 |
부모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친부), 이름 미상의 어머니[3](친모)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양부)[4] |
배우자 | 아우피디아 |
자녀 |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5] 리비아 프리마[6] 리비아 드루실라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입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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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정 말의 로마 원로원 의원, 법무관.젊은 시절부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우정이 두터운 친구로, 입양을 통해 친척관계가 된 소 카토와 함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격렬히 저항한 골수 옵티마테스 일원으로 유명하다. 평생토록 증오한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에게 저항하다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진군 후 그리스 필리피에서 벌어진 필리피 전투 후 체포 직전 장렬히 자결했다.
본래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종가격 지파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Claudii Pulchri) 가 출신이나, 어릴 적 외가인 평민귀족(노빌레스) 명문 리비우스 드루수스(Livii Drusi) 가에 입양됐다. 출생 당시 이름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이며, 입양 후에는 로마식 작명법에 따라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로 개명했다.
차녀 리비아 드루실라가 후일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해 아내가 되고, 외손자 티베리우스가 "카이사르 →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로 이어진 제정을 구축한 2대 황제가 되면서 사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기원전 42년 법무관)과 함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혈통적 직계 조상으로 제정 시대동안 시조격 인물로 추앙받았다.
2. 생애
2.1. 출신 가문과 입양
아피아 가도가 관통하는 라티움의 도시 푼디에서 태어났다. 아피아 가도, 아피아 수도교 건설을 입안해 감독한, "맹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직계 후손으로, 1대 "풀케르(미남)"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직계손이다. 본래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으로, 본가의 조카뻘 친척으로는 선동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공화정 말의 원로원 의원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발레리우스 메살라 클라우디아누스 등이 있다.이탈리아의 18-19세기 골동품 수집가이자 역사가 바르톨로메오 보게시에 따르면, 기원전 92년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차남으로, 형제로는 기원전 87년 대대장을 역임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있다고 한다. 어머니 이름은 정확히 모르나 현대의 고대 로마사 권위자인 수잔 트레기아리에 따르면, 어머니는 옵티마테스 지지자들에게 자택 근처에서 피살된 고결한 호민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누나이다. 이는 확실하다는 평을 듣고 있고 정설로 확정 중인데, 남매 사이가 돈독한 만큼이나 입양은 매우 빨리 결정됐다.
로마귀족가문들은 가문을 이을 아들이나 남성친족이 없는 경우, 입양을 통해 대를 이었다. 이중 성년식 이전의 어린이를 입양하는 경우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친부모와 입양부모가 형제자매, 인척 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어린아이 입양은 무자녀 귀족부부가 십중팔구 거진 누나, 여동생, 여조카, 딸의 아들을 입양해 양부모 모두의 아이로 정식 입적 후 키우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런 경향은 상류층, 파트리키 일족의 경우 더 도드라졌다.
클라우디아누스의 입양 역시 일반적인 로마귀족들의 가문 승계를 통한 성년식 직후의 청소년 혹은 성인 입양처럼, 무자녀 귀족들의 유아 입양 관습에 따라 이뤄졌다. 이를 증명하듯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아내 역시 남매인 것이 교차검증되는데, 클라우디아누스 역시 출생 전 혹은 출생 직후 친부모와 양부모의 약속에 따라 돌을 갓 넘긴 직후 부모 곁을 떠나, 외삼촌과 '아버지와 아들',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의 후계자' 자격의 입양관계를 맺었다.
입양 당시 갓 돌도 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렸고, 양부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재혼하지 않고 호적에 올린 뒤 일찌감치 후계자로 선포됐다. 그러다가 기원전 91년, 양부이자 외삼촌인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암살됐는데, 이런 부분 때문에 여러 학자들은 이른 입양에 대해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부모와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 사이에서 미래를 대비해 내린 결단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래서 실제 입양 후 양부이자 외삼촌인 리비우스 드루수스 손에서 직접 자라지 못했다는 말도 있고, 암살되기 직전 상황이 험악해진 것을 직감한 드루수스가 누나와 매형에게 부탁해(또는 이들이 먼저 드루수스에게 제안하면서)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입양이 서둘러 진행됐다는 말도 있다.
외가에 입양된 이후, 관례에 따라 양부, 외조부의 이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그대로 승계하고 본래 성씨 '클라우디우스' 뒤에 '-anus'를 붙였다. 이런 이유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로 개명했다고 하며, 뒤를 이어 태어난 남동생이 자연스레 그의 본래 이름을 이어받았다.
입양 직후부터 양자이자 후계자로 결정된 까닭에, 외가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아, 젖먹이 아이임에도 로마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됐다고 한다.
2.2. 어린 시절
아주 어릴 적부터 외가에 입양돼, 양부모의 친아들로 성장했다. 헌데 기원전 91년 양부이자 외삼촌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자택 근처에서 시민권 개정에 반대한 옵티마테스 일원들에게 피살돼 불과 2살의 나이에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의 수장 자리, 재산, 클리엔테스를 모두 상속받았다.양부 사망 후, 소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누이동생, 친모의 여자형제인 이모 리비아 드루사마저 죽었다. 그래서 친부모와 함께 살면서, 이모 리비아 드루사의 아이들인 대 세르빌리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소 세르빌리아, 포르키아, 소 카토와 함께 교류하면서 자랐다고 한다. 이런 성장 배경 때문에, 그는 자연스레 골수 옵티마테스가 됐고, 외가에 입양됐음에도 친가와의 유대관계가 깊은 이중 가문 계승 성향의 로마귀족이 됐다.
2.3. 골수 원로원파
성년식 이후, 술라 체제 아래에서의 조건이 충족되자마자 원로원 의석을 세습해 원로원 의원이 됐다. 기원전 50년 법무관 시절, 미성년 소년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소년 범죄자 처벌과 동성애 범죄 판결을 주재했다. 이 시절, 그는 젊을 적부터 친구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이 확인된다.타고난 미남인데다 어릴 적 외조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양부이자 외숙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이모 리비아 드루사와 친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부자가 된 만큼, 원로원 안에서 부유한 원로원 의원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기원전 45년, 키케로가 그가 소유한 로마 소재 정원을 구입할 당시의 가격은 클라우디아누스가 호가를 매겨 넘기지 않았음에도 구입금액이 매우 비쌌다고 한다.
외조부, 친가의 친척들처럼 골수 원로원파였다. 그는 친척 소 카토와 함께 일찍부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반대하고 그를 독재자로 규정해 격렬히 공격했다. 그럼에도 그는 소 카토와 달리 카이사르의 내전으로 불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2.4. 딸 리비아 드루실라의 결혼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는 법무관 경력을 제외하면 일반 원로원 의원에 불과했지만, 꽤나 보수적이면서도 명민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는 법적으로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가문 남성, 특히 클라우디우스 가문 내에서도 가장 위세를 떨쳤고 공화정의 상징과도 같았던 풀케르 가문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따라서 여러 부분에서 친가인 클라우디우스 가문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하는데 중점을 뒀고, 꾸준히 자신이 입양간 가문과 친가를 합쳐 새로운 강력한 귀족 가문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에 온 힘을 쏟았다.이런 까닭에 그는 자신의 차녀 리비아 드루실라를 일찍이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내와 결혼시키려고 동분서주했다. 이때 그의 눈에 띤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내가 파트리키 계급의 지파 네로 가문의 수장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다. 네로는 그와 정치적 견해에서 큰 차이가 있고, 젊은 시절부터 카이사르를 따른 인물로 클라우디아누스의 차녀 리비아 드루실라와 나이 차이가 제법 있었다. 그러나 네로 가문은 파트리키라는 계급적, 사회적 지위에도 그 위세, 재산 규모, 생활 수준이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보다 현저히 부족해, 클라우디아누스의 계산에는 신랑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더욱이 네로는 30대 후반을 향해가는 나이에도 미혼이었고 능력이 뛰어나고, 미남인 터라, 여러 가지를 따져본 클라우디아누스 입장에서 볼 때 사윗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클라우디아누스는 자신과는 정치적 견해에서는 차이가 있고 딸과 나이차가 제법 나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청혼 의사를 전해, 두 딸 중 생존해 있던 차녀 리비아 드루실라를 기원전 43년이 되자마자 결혼시켰다.
2.5. 내전과 사망
기원전 44년 3월 15일, 종신독재관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카시우스 등에게 암살된다. 이때 클라우디아누스는 암살을 주도한 브루투스, 카시우스의 후원자가 됐다. 허나 그의 사위 네로는 장인을 따르지 않고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복수를 외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카이사르의 외종손이자 양자 옥타비아누스의 삼두파와 함께 한다. 이런 가운데 기원전 42년 네로는 카이사르 생전 결정에 따라 법무관에 입후보, 당선된다.기원전 42년 11월, 클라우디아누스의 딸 리비아 드루실라가 로마 팔라티누스 언덕의 대저택에서 첫 아이 티베리우스를 출산한다. 이는 클라우디아누스가 그토록 바란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자신을 잇는 결실의 탄생이었는데, 이 시기 그는 삼두파, 특히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강하게 비난하다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진군하자, 동료 원로원파 인사들과 함께 그리스로 망명했다. 이후 필리피 전투가 벌어지는데, 원로원파가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삼두군에게 패배한다. 이때 그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가, 체포 직전 공화정 수호와 삼두파에 대한 저주를 외치며 장렬히 자결했다. 자결 당시, 아들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역시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말도 있으나 그가 이후 요절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확실치 않다.
3. 가족
성년식 이후, 평민귀족 가문으로 로마 명문가 출신인 아우피디아와 결혼해 아들 1명과 두 딸을 뒀다. 이중 가장 유명한 아이는 막내인 차녀 리비아 드루실라다.장남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일찍 죽었으나, 리비아 풀크라, 리비아 리빌라를 뒀다. 그래서 클라우디아누스는 가문을 잇기 위해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에서 친척 조카뻘인 리보를 입양해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유언장을 통해 가문을 넘겼다.
4. 사후 이야기
사후, 그의 막대한 재산은 삼두파에게 압류됐는데 사위 네로가 삼두파였기 때문에 국고로 귀속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 그 재산은 딸 리비아 드루실라와 어린 양자 리보가 상속받게 된다.후일 딸 리비아 드루실라가 로마 최초의 아우구스타가 된 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 남성 황족들에게 직계조상으로 추앙받았다. 외손 티베리우스는 성년식이 되자마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막대한 후원을 받아 외조부인 그를 기리는 축제를 주최했다. 이는 외증손 클라우디우스 1세 때도 계속됐는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그리스 필리피와 사모스 섬에 클라우디아누스의 숭고한 정신과 죽음을 기리는 비석을 만들고 로마에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조각상을 만들어 설치하고 이를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