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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00:24:08

마리오 자텔리

마리오 자텔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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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34대, 36대, 3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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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리오 자텔리[1]
(Mario Zatelli)
생년월일 1912년 12월 21일
사망년월일 2004년 1월 7일 (향년 91세)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출신지 프랑스령 알제리 세티프
포지션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75cm | 72kg
소속팀 US 마로켄 (1929-1935)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5-1938)
RC 프랑스 (1938-1940)
US 툴루즈 (1940-1943)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3-1948)
국가대표 1경기 1골 (1939)
감독 OGC 니스 (1952-1953)
FC 낭시 (1959-1964)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64-1966)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68-1970)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72)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73)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감독2.4.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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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2]

2.1. 어린 시절

자텔리는 이탈리아계이며 당시 프랑스령 알제리였던 세티프에서 태어나 프랑스 보호령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성장했다. 그는 12살때부터 가톨릭 스포츠 클럽에 입단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자텔리는 카사블랑카를 연고로 하는 US 마로켄(US Marocaine)에서 데뷔했고 1930년대 초기 마로켄의 전성기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북아프리카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던 선수들은 프랑스에 많이 진출했고 자텔리도 그 중 하나가 되어 1935년부터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뛰게 되었다.

5만 프랑을 받고 마르세유에 입단한 후 첫 3년간, 자텔리는 디비지옹 1쿠프 드 프랑스에서 각각 1회씩 우승을 했다. 1937-38 시즌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선 자텔리는 심한 독감에 걸려 컨디션이 바닥을 쳤음에도 경기에 출전, 마르세유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1938년, 자텔리는 38만 프랑의 이적료로 RC 프랑스로 이적했지만 첫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리그 30경기 중 14경기에만 출전했고 RC 프랑스는 3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1939년에 터진 전쟁으로 인해 자텔리의 커리어도 중단되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자텔리는 US 툴루즈에서 보내다가 1943년부터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마르세유는 자텔리의 은퇴 시즌이던 1947-48 시즌에 디비지옹 1 우승을 거둬 자텔리의 마지막을 영예롭게 해주었다.

2.2.2. 국가대표

자텔리는 공식 대표팀은 아니지만 모로코에서 국가대표팀 경기를 뛴 적이 있다. 1938년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장 니콜라에 밀려 경기를 뛰진 못했다.

1939년 1월, 폴란드를 상대로 자텔리는 그의 선수 경력에서 유일한 대표팀 경기에 출전했고 1골을 넣어 프랑스의 4대0 승리에 기여했다.

2.3. 감독

1950년, 아마추어 클럽 UC 드라기냥(UC Draguignan)의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자텔리는 1951-52 시즌에 OGC 니스에서 뉘마 앙두아르 감독을 보좌했다. 1952-53 시즌에 니스의 감독으로 처음 프로팀의 지휘봉을 잡은 자텔리는 13위로 니스를 디비지옹 1에서 살아남게 했다. 다른 아마추어 클럽에서 6년을 보낸 후 자텔리는 FC 낭시의 감독이 되어 1960년 디비지옹 1 승격, 1961-62 시즌 리그 4위 등의 성적으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64년, 벨기에 클럽의 감독직 협상을 위해 벨기에에 가 있던 자텔리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전화를 받고 바로 마르세유로 갔다. 자텔리는 당시에 마르세유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친정팀 올랭피크가 아니라 학교팀 코치라도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할 정도로 마르세유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선택을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마르세유는 성적이나 재정이나 모두 힘든 시기에 있었다. 1963년에 디비지옹 2로 강등당했던 마르세유는 자텔리가 부임했음에도 1964-65 시즌을 디비지옹 2에서 14위로 마감했다. 자텔리의 부임 직전 시즌이 5위였던 걸 감안하면 더 심각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자텔리는 새로운 회장 마르셀 르클레르(Marcel Leclerc)에 선수 지원을 요청했고 자텔리는 결국 이 시즌에서 마르세유를 디비지옹 2 2위에 올려 3년 만에 다시 디비지옹 1 승격을 이뤘다. 그럼에도 자텔리는 감독직에서 경질당했는데 자텔리는 팀과 도시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인터뷰를 남겼다.

2년 후 다시 마르세유의 지휘봉을 잡은 자텔리는 1969년, FC 지롱댕 드 보르도를 2대0으로 꺾고 마르세유에 쿠프 드 프랑스 우승컵을 안겨줬다. 1969-70 시즌에는 준우승, 1970-71 시즌도 마르세유는 순항했지만 자텔리는 시즌 중에 다시 해고당했다.

15개월 후 또 다시 마르세유의 감독이 된 자텔리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더블로 시즌을 마무리해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리고 1972년 유러피언 컵에서 유벤투스 FC를 1대0으로 누르기도 했지만 자텔리는 다시 해임당했고 1973년에 다시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잠시 부임한 것을 마지막으로 자텔리와 마르세유의 사연 많은 동행도 끝이 났다.

2.4. 이후

자텔리는 스타드 벨로드롬의 손님으로 경기를 관전하고 때로는 팀에 유용한 조언을 남겼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강력한 슈팅 파워와 화려한 슈팅 기술, 동료를 보는 시야가 뛰어났던 센터 포워드. 온화한 시선, 항상 물결치는 헤어스타일, 경기장 밖에서의 태평한 태도로 '잘생긴 마리오'라는 별명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동안 열정적이고 겸손한 사람이란 평을 받았다.

후대의 프랑스 레전드 스트라이커 쥐스트 퐁텐이 자텔리의 플레이를 초기 선수 시절 모델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1] 자텔리는 이탈리아계이고 프랑스는 외국 출신 이름의 발음과 표기법을 존중하는 나라이므로 자텔리로 항목을 작성했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