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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FC9DE><colcolor=#fff> 밀라노 공국 제9대 공작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Massimiliano Sforza | |
이름 | 에르콜레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Ercole Massimiliano Sforza) |
출생 | 1493년 1월 25일 |
밀라노 공국 밀라노 | |
사망 | 1530년 6월 4일 (향년 37세) |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 |
재위 | 밀라노 공국의 공작 |
1512년 6월 16일 ~ 1515년 10월 11일 | |
아버지 | 루도비코 스포르차 |
어머니 | 베아트리체 데스테 |
형제 | 프란체스코 |
종교 | 가톨릭 |
1. 개요
밀라노 공국의 제9대 공작.2. 생애
1493년 1월 25일 밀라노의 지배자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루도비코 부부는 첫 자식의 탄생을 매우 기뻐하며 아이의 외할아버지인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독일왕 막시밀리안의 이름을 따 에르콜레 마시밀리아노라고 이름지었다. 태어난 다음 해인 1494년 10월 아버지 루도비코가 밀라노 공작이 되면서 공작의 후계자가 되었다. 마시밀리아노가 3살 때 루도비코는 마시밀리아노와 잉글랜드 왕국 헨리 7세의 딸 메리 튜더의 약혼을 주선했다. 헨리 7세는 메리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1497년 1월, 어머니 베아트리체 데스테가 아이를 사산하고 숨을 거두었다. 1499년 프랑스 왕국의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침공하자 루도비코는 두 아들 마시밀리아노와 프란체스코를 조카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가 시집가 있는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로 피신시켰다. 1500년 노바라 전투에서 패배한 루도비코는 프랑스의 포로로 잡혀 1508년에 프랑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1512년 캉브레 동맹 전쟁 중 신성동맹의 지원을 받은 스위스군이 밀라노를 점령한 뒤 밀라노 공작으로 추대되었다. 1515년, 루이 12세가 사망하고 왕위를 이은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 재정복을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대군을 움직였다. 이에 맞서 마시밀리아노는 교황 레오 10세, 신성 로마 제국, 스위스와 동맹을 체결했다. 양측이 밀라노를 두고 맞붙은 마리냐노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사로잡힌 마시밀리아노는 30,000 두카트와 연금을 대가로 밀라노를 포기했다. 이후 프랑스로 이주해 프랑스의 감시 하에 망명 생활을 하다가 1530년 6월 4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