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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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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아키라 입장곡
1. 개요2. 프로레슬링의 시작3. 신일본 프로레슬링4. 제1차(구)UWF, 신일본 복귀5. 제2차(신생)UWF6. 링스7. 빅 마우스(빅 마우스 라우드)8. HERO'S9. THE OUTSIDER10. 종합격투기 전적11. 타이틀 수상 경력12. 기타13. 둘러보기

1. 개요

마에다 아키라(前田 日明, 1959년 1월 24일 ~ )는 전(前) 프로레슬러이자 전(前) 종합격투기 선수다. 한국명은 고일명(高日明)이며, 재일 한국인 3세로 현재는 일본에 귀화하였으며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귀화를 결심했다고 한다.[1] 마에다의 집안은 조선시대 왕궁의 호위무사였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인 살해자를 쫓아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2] 마에다 아키라(前田日明)라는 이름을 그의 할아버지가 명명한 것이고 데뷔 당시에는 지금과 발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는 다른 마에다 아키라(前田 明)였는데, 할아버지의 권유로 변경하게 되었다고 훗날 주간 플레이 보이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또한 주간 프로레스 인터뷰 기사에서는 "日자는 일본의 의미에서 할아버지가 붙였다"고 밝혔다. 다만 3세이니만큼 한국계라는 정체성은 많이 희석된 듯하다.

2. 프로레슬링의 시작

소년시절 1966년에 방송된 특수촬영 TV프로그램 『울트라맨』에 열중, 그중에서 1967년 4월 9일에 방송된 최종회 "안녕히 울트라맨"에서 초대 울트라맨이 괴수 젯톤에게 패배한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젯톤을 쓰러트려 울트라맨의 원수를 갚겠다며 소림사 권법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초등학교 때 초단을 땄다고 한다. 중학생 때 양친이 이혼하여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지만 아버지는 2개월에 한번 꼴로 집에 돌아오며 사실상 마에다를 방치했다.[3] 빈곤과 고독감에 괴로워하던 마에다는 자연히 엇나가게 되고, 길거리 불량배들과 싸움질을 하며 지냈다. 실제로 학생시절의 마에다는 오사카에서 굉장히 유명한 주먹이었으며 스트리트 파이트에서는 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마에다는 키 192cm, 체중 115kg의 빅맨으로, 아마 학생 때는 그것보단 좀 작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평균 체격보다 한참 위였을 테고 게다가 불같은 성질까지 겸비했으니 당연히 싸움도 잘했을 것이다.

3. 신일본 프로레슬링

1977년에 타이거 마스크로 활약하는 사야마 사토루에게 스카우트되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 이듬해 8월 25일 나가오카시 후생 회관 야마모토 코테츠전에서 데뷔했다. 신일본 프로 레슬링의 사장 겸 에이스 안토니오 이노키를 동경하고 입단한 것이 아니고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사야마 사토루의 유혹에 넘어가 신일본에 입단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미래의 에이스 후보로서 후에 신일본의 상징적 존재였던 칼 고치의 지지에 힘입어 특별 훈련을 받고 1982년 2월 영국으로 건너가 퀵 킥 리("새미 리"(사야마 사토루)의 동생이라는 특수 효과)로서 활약, 유럽 헤비급 왕좌를 획득해 IWGP 토너먼트 유럽의 대표로 귀국해 일본에서 데뷔전을 치르게 되고 데뷔전 상대는 폴 온돌프(Paul Orndorff)[4] 였고 리버스 암 솔트로 핀폴 승을 거두었다. 덕분에 이노키의 후계자 제 1순위로 일약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이때 신일본의 권유로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유럽에서 수행했다는 경력이나 장신을 살린 수플렉스와 플라잉 닐 킥 등에서 인기레슬러가 되었다. 또 순한얼굴로 여성팬도 많고 귀국한 나이의 팬클럽 모임에서는 여자가 많았던 것이 주간 프로 레슬링에서 보도되고 있다.

1983년에 웨인 브릿지를 이기고 유러피안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4. 제1차(구)UWF, 신일본 복귀

1984년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새로운 에이스로 활약하다 1984년 신일본을 떠나 제1차(구)UWF(우라타 노보루 사장)에 참가 사야마 사토루의 영향에 의해 킥과 관절 기술을 중심으로 한 격투기색이 강한 파이트 스타일(후에 UWF 스타일이라고 불린다.)이 전개되지만, 격투기 경기는 한달에 한번 다시 말한다 "경기 지향"의 사야마와 회사가 힘드니까 경기를 늘린다고 "흥행 지향"마에다가 대립해 이단체는 해산 사야마 사토루와 대립했지만 후의 제2차 UWF 링스는 사야마 사토루를 실천하고 있으며 서로의 행선지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1985년 12월 6일 후지와라 요시아키, 키도 오사무, 타카다 노부히코, 야마자키 카즈오와 함께 업무 제휴라는 형태로 신일본으로 재입단하였고 마에다는 링 위에서 "1년 반 UWF로 해온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왔어요"라고 마이크 어필했다. 1986년 4월 29일 미에현 츠시 체육관에서 새로운 일본 측의 불가해한 일대일 시합에서 앙드레 더 자이언트 팀. 시멘트 매치라고 말하지만, 마지막에는 앙드레가 경기를 포기해 버려, 26분 35초만에 노 콘테스트로 끝난다. 6월 12일에는 후지나미 타츠미와 경기하여 양자 KO 무승부로 종료. 이 시합은 서로의 스타일을 초월한 명승부로 일컬어진다.

그해 10월 9일 양국 국기관에서 열린 "INOKI투혼 LIVE"에서 돈 나카야 닐센의 "이종격투기전"을 편각 굳히기(싱글 보스턴 크랩)로 승리. 이 경기를 마당에 "새격투왕"으로 불리며 프로레슬링계 의외로부터도 주목을 받게되었다. 같은 날 메인이벤트에서 이종격투기전을 행한 안토니오 이노키와 비교되었는데 마에다는 결과와 시합내용 모두 이노키에게 압승. 이 경기에 대해, 훗날, 닐슨은 "여기는 이렇게 그 다음은 이렇게와 물을 잡은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은 "경기를 북돋워 주었다"라는 것. 그리고 1R에 좋은 펀치가 들어섰는데 두 번째에 "얼리 녹아웃은 안된다"라고 말했다"과 프로레슬링 잡지 『kamipro 』에서 증언했다.

이날 이후로 신일본 내에서의 마에다의 인기는 절대적으로까지 보였다. 하지만 신일본과 UWF 간의 항쟁이 소강상태에 이를 즈음, 1987년 6월 12일 양국 국기관에서 마사 사이토를 누르고 초대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오른 안토니오 이노키가 누구의 도전이든 받겠다는 내용의 마이크 어필을 하였는데 이에 후지나미 타츠미와 마에다 아키라를 비롯한 메인 이벤터 선수들이 링에 올랐다. 이때 재팬 프로레슬링 해체 후 신일본에 다시 복귀한 초슈 리키가 마이크 어필로 타도 이노키를 외치며 세대 투쟁을 부르짖고 마에다와 초슈, 후지나미가 이노키를 잡기위해 뉴 리더군을 결성. 8월 19일에는 초슈, 후지나미, 기무라 켄고, 슈퍼 스트롱 머신과 태그로 나우 리더군과 5 대 5 제거 경기를 가져 승리. 이 경기에서 마에다는 이노키와 함께 동반탈락을 하면서 팀의 승리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이노키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슈의 일방적인 뉴 리더군 해산 선언으로 뉴 리더군은 해산되고 말았다.

같은 해 11월 19일 고라쿠엔 홀에서 UWF 군단 대 유신군의 6인 태그매치에서 키도 오사무에게 전갈 굳히기를 시도하던 초슈에게 마에다가 기습적인 안면에 킥을 먹이고 전치 1개월의 부상을 입혔다. 마에다 안면축격사건[5] 이것을 이유로, 신일본 프로 레슬링은 마에다에 무기한 출전정지처분을 내렸다. 그후, 출장 정지 해제의 조건으로, 멕시코 원정하는 것을 지시했는데 이를 거부한 데 따른 1988년 2월 1일에 신일본 프로 레슬링에서 프로 레슬링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이유로 해고된다. 후에 마에다는 프로 레슬링 잡지 "G스피리츠"에서의 인터뷰에서 전 일본 프로 레슬링에서의 덴류·와지마전의 충격에 대항하기 위해 안면 차기를 시도했지만 초슈가 얼굴을 돌려 버림으로써 사고에 이르러 버렸다고 증언했다.

5. 제2차(신생)UWF

제2차(신생)UWF은 1988년 5월 12일에 고라쿠엔 홀에서 "STARTING OVER"라고 이름을 내걸고 개양. 종래의 프로레슬링에서 전격적으로 이탈한 마에다에게 시대의 총아로서 많은 주목이 모이고 있었다.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정말 엄청난,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당시 바로 창간된 "격투기 통신"이라는 잡지에서는 "프로 레슬링이라고 말한 말이 싫은 사람이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드뭄"이라고, 마에다를 표지에 발탁하고 벽두를 장식했다. 제2차 UWF는 격투기임을 표방한 경기 색이 강한 프로 레슬링이다. 기존의 프로 레슬링과의 차별화를 꾀한 전략은 프로레슬링의 사회 인지를 바라는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월 1회를 원칙으로 했던 UWF의 라이브 티켓은 극히 입수 곤란하였다고 한다.

그 후, 마에다와 UWF의 사장 카미 신지와의 사이에서 신사장 회사 주식의 무단의 독점 문제가 불분명한 경리에서 문제가 발생. 1990년 10월 마에다는 후나키 마사카츠전 직후에 프론트를 비난. 이것을 받은 프런트는 마에다를 출장 정지 처분으로 한다. 이 일련의 마에다와 프런트와의 불화는 마에다와 소속 선수들 간에도 파급. 다음 1991년 초에 마에다는 자택 맨션에서 선수 회의에서 제2차 UWF의 해산을 선언했다. 이때 다카다파, 후지와라 파가 독립했다.

6. 링스

제2차 UWF해산 후의 1991년 봄, 링스를 설립. 그 해 5월 11일에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거사 전을 치렀다. 링스의 흥행에WOWOW는 생방송됐다. 또, UWF시대의 인맥에서 네덜란드의 크리스 돌만의 전면 협력을 얻게 됐다. 정도 회관에서는 이시이 카즈요시 관장이 사타 케마 사아키들 가라테가를 링스에 파견했다. 이시이 관장은 링스 참전에 의해 대형 흥행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그것이 나중의 K-1 비약으로 이어졌다.
거사 제2전쟁 전의 연습으로, 마에다는 전방 십자 인대 단열, 측의 인대의 중상을 입었다. 그 후 당분간은 니 브레스를 붙여 강행 출전을 계속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수술하는 장기 결장이 됐다. 에이스 부재의 흥행적인 구멍은 딕 플라이, 폴큰, 코사카 츠요시, 타무라 키요시, 야마모토 요시히사, 나가이 미츠야, 나루세 마사유키들이 메우게 된다. 요즘 링스는 창단 초기부터 계속된 외국인에 의존하는 카드에서 벗어나다.
1993년부터 시작된 UFC의 영향을 받고, 1999년부터 링스도 발리 투도에 가까운 KOK룰을 채용했다. KOK규칙은 그라운드 상태에서의 안면에 타격은 금지였지만, 독립 상태에서 안면 타격을 인정한 획기적인 룰이었다. 사야마는 초기의 치슈 우토 규칙과 같다고 말했지만, 그라운드에서 복부, 요부, 족부의 타격 여부의 차이가 있다.
1998년에 개최된PRIDE.1 그럼 타카다 노부히코가 힉슨 그레이시에게 패배. 이를 계기로, 마에다는 힉슨과 맞대결을 선언하는 협상을 진행시키지만, 힉슨 측이 타카다 노부히코와 경기를 결정해 실현되지 못했다.[6]
1999년 2월 21일, 마에다의 은퇴 경기로서 알렉산드르 카렐린을 상대로 판정(포인트)패배. 그러나 러시아의 영웅인 카렐린을 레슬링 이외의 장소에 유일하게 세운 의의는 크다. 카렐린과의 은퇴 경기는 민방 뉴스 프로그램에서 특집 만큼 세상에서 주목 받고 있었다. 나중에 마에다는 은퇴 경기 상대로 카렐린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정말 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런 일이야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WOWOW에 의한 3년도부터 방영 중단 결정에 의해 2002년 링스는 활동 정지. 그러나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러시아에서는 대회는 계속되어 일본 국내에서도 링스 출신 직원이 운영하고 링스 KOK룰을 채용한 격투기 이벤트 ZST가 개최되었다.

7. 빅 마우스(빅 마우스 라우드)

2005년 전 신일본 프로 레슬링의 우와이 후미히코에 부탁을 받고 우와이가 창단한 새 프로 레슬링 이벤트 빅 마우스에 슈퍼바이저로서 참가, 종종 기자 회견 등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간판으로서의 얼굴뿐만 아니라 오디션에 의한 선수 발굴, 레프링이나 룰 적용의 철저화를 도모한 것 등으로 활약. 또 선수들의 트레이너도 행하고 있다. 동시에, 후나키 마사카츠와 화해. 그 중에서 선수에 대한 마에다의 헌신은, 이전의 무서운 선배였던 마에다를 잘 알고있던 타무라 키요시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격투기에 애정이 강하고, 탤런트 카네코 켄이 HERO'S에 참전한 것에 대해 엄격하게 비판. 그 모습이 연일 뉴스 프로그램이나 와이드 쇼 등에서 다루어져, HERO'S에 주목을 모아 시청률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006년 2월 26일 신생 빅 마우스 라우드 창단 기념 대회·도쿠시마 흥행, 마에다는 후나키와 함께 빅 마우스 라우드를 탈퇴, 우와이가 저지른 회사 자금 횡령을 폭로, 그에 따른 자금난에 의한 단체 소속 선수 및 사원의 급여 체불, 도장을 준비하지 않는 등, 우와이의 자금횡령관련으로 생긴 (우와이와의) 갈등 등이 탈퇴 이유였다.

8. HERO'S

빅 마우스와 K-1 제휴로,"HERO'S"(종합 격투기 이벤트)출범 때보다 "슈퍼 바이저"로서 참가. 이 흥행의 간판 역할 외에 경기 룰의 운용, 선수 발굴 등을 실시한다. 종종 기자 회견 등의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7년 10월 5일 "HERO'S KOREA 2007"의 개최 발표 기자 회견에 참석. 전날 10월 4일에 PRIDE 사무소가 폐쇄되고 활동 정지된 것에 관한 "하늘의 법망 회 결점에 빠뜨리지 않고"라고 발언. 이날 밤 HERO'S 공식 사이트에서 다나카와 사다하루가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사과문을 게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해 12월 31일 "K-1 PREMIUM 2007 Dynamite!!"에서 타무라 키요시 vs토코로 히데오의 시합 후의 링 위에 프레젠터로 등장. 승리자상 트로피를 타무라로 내던지도록 강요 문제를 일으켰다. 2008년 2월 15일 "THE OUTSIDER"(후 술)기자 회견을 열고 HERO'S의 발전적 해소에 따른 이 행사의 슈퍼 바이져를 무너진 것이 발표되었다. 그것까지 갈등이 거론되던 이전 PRIDE와 HERO'S와 공동 이벤트 DREAM에 관해서는 "축복"했다고 말했다.

9. THE OUTSIDER

2008년 1월 21일 RINGS 공식 사이트에서, 이른바 "불량"을 주요 대상으로 한 격투기 대회 "THE OUTSIDER"창당을 발표하고 3월 30일 디파 아리아케에서 창당 대회를 개최했다.

이 아웃사이더 단체에서 배출한 가장 성공한 격투기선수가 바로 아사쿠라 미쿠루, 아사쿠라 카이 이른바 아사쿠라 형제이다. 이 두형제는 Rizin FF의 스타로 대접받고 있고 인기 유튜버이기도 하다.

10. 종합격투기 전적

11. 타이틀 수상 경력

12. 기타

수라의 문에 등장하는 레슬러 히다 타카아키의 모티브가 이 사람.

텐류 겐이치로나 쵸슈 리키와 비슷하게 발음이 안 좋은 프로레슬러지만, 방송에서 놀림 받아도 훈훈히 받아주는 앞의 두 인물들하고는 달리, 불같은 성격을 지녀서 방송에서 놀림받는 일은 전혀 없다. 다운타운 진행의 "수요일의 다운타운"에서 인디 프로레슬링 단체 DDT 소속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유명한 "슈퍼 사사당고 머신"[7]이 이 이야기를 꺼내왔다가, 아키라 본인이 들어온 후 혼쭐나고, 그 이후에 여러 인터뷰 영상들에서 아키라의 안 좋은 발음이 대놓고 나왔음에도 불구, 다운타운을 포함한 출연진 전원이 겁을 먹어서 '발음에는 문제없다'라고 얼버무릴 정도였다. 이 이후 아키라는 사사당고한테 박치기를 시전해서 쓰러뜨렸다. 다만, 후에 잡지에서 훈훈한(?) 모습을 보이는 등 연출성으로 진행되었다는게 보이지만.

고교철권전 터프의 작가 사루와타리 테츠야와 인터뷰를 보면 미래의 꿈에 대한 질문에서 50대 즈음엔 링스본부에서 고양이를 안고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 시가를 물고있을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상단의 사진이나 공개된 여러 사진에서 시가를 즐겨 피우는 거 보면 제일 중요한 링스 본부가 별로 상태가 안좋은거 빼면 어느정도 꿈을 이뤘다고 볼수 있겠다(...).

오타쿠 코스프레를 하고 메이드 카페에 갔는데 점원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었다(...).#

2022년 10월 1일에 세상을 떠난 레슬링 선배이자 애증의 관계였던,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했던 나날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13. 둘러보기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1996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NJPW 그레이트 레슬러
[ 2007 ]
안토니오 이노키
사카구치 세이지
호시노 칸타로
야마모토 코테츠
[ 2009 ]
카이 쇼지
코바야시 쿠니아키
마에다 아키라
블랙 캣
[ 2010 ]
하마구치 애니멀
하시모토 신야
[ 2011 ]
아라카와 돈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선정 올해의 레슬러
초슈 리키
(1987)
마에다 아키라
(1988)
릭 플레어
(1989)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레슬링 옵저버 선정 5성 경기 [★]
1987년
3월 20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스프링 플레어 업
IWGP 태그팀 챔피언십 결정 토너먼트 결승전
_무토 케이지_ & _코시나카 시로_(O) vs 타카다 노부히코(X) & 마에다 아키라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MVP (최우수 선수상)
텐류 겐이치로
(1986 ~ 1988)
마에다 아키라
(1989)
오니타 아츠시
(1990)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기능상
타이거 마스크
(1982)
마에다 아키라
(1983)
슈퍼 타이거
(1984)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노력상
죠지 타카노
마하 하야토
프린스 통가
(1980)
이시카와 타카시
애니멀 하마구치
마에다 아키라
(1981)
후지와라 요시아키
코시나카 시로
(1982)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연간 최고 시합상 (베스트 바웃) [★]
1986년
6월 12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86 IWGP 챔피언 시리즈 25일차
B그룹 공식전[10]
후지나미 타츠미 vs 마에다 아키라


[1] 많은 재일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귀화를 결정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재일 한국인 출신인 추성훈, 리 타다나리가 일본으로 귀화를 결정하게 된 이유에도 이 불합리한 대우가 포함되어 있다.[2] 우범선의 부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3] 마에다의 가족과는 별개로 존재하던 한국쪽 가족에게 자주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 재일 한국인들이 한국과 일본 양 쪽에 두집살림을 차리고 사는 것은 꽤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한국인이었던 기타리스트 호테이 토모야스도 이러한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4] 일본과 미국에서 프로레슬링 레전드였던 베이더와 현피를 떠서 깨강정으로 두들겨팬 바로 그 선수다.[5] 1987년 11월 19일, 코라쿠엔 홀에서 열린 UWF군 대 유신군의 6명 태그 매치에서, 전갈 굳히기를 걸고 있는 쵸슈 리키의 뒤에서 다가와 쵸슈의 안면에 정통으로 킥을 날려버린다. 이 결과로 쵸슈 리키는 오른쪽 이마 동저 골절, 전치 1개월의 중상을 입게 되고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마에다 아키라에게 무기한 출장 정지의 처분을 내리며, 이루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출장 정지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멕시코에 원정을 가라고 했지만 마에다 아키라는 그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1988년 2월 1일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으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아 그의 신일본 커리어는 끝나는 사건이었다. 마에다는 이 사건의 진위에 대해서는 말을하지 않고 있으나, 피해자인 초슈 리키와는 최근 흥행에서 화해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마에다, 초슈(한국이름 곽광웅) 두 선수 모두 재일 한국인이다. 하지만 사야마 사토루와는 아직 화해하진 못했다.[6] 마에다 은퇴 후 힉슨 그레이시는 후나키 마사카즈와의 대결을 끝으로 실전 경기를 더이상 치르지 않게 된다.[7] 전 대표였던 머슬 사카이[★]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10] 더블 KO 무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