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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테이 토모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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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무로 쿄스케
(氷室京介)
}}}

HOTEI
Disc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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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Déjà-vu
1991년 BEAT EMOTIONYOU
1992년 LONELY★WILD
1993년 さらば青春の光
1994년 サレンダー
1995년 Poisonスリル
1996년 ラストシーン命は燃やしつくすためのもの CIRCUSBATTLE ROYAL MIXES
1997년 CHANGE YOURSELF!
1998년 THANK YOU & GOOD BYEBATTLE ROYAL MIXES II
1999년 バンビーナNOBODY IS PER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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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8090><colcolor=#fff> 호테이 토모야스
布袋 寅泰 | Hotei Tomoyasu
파일:external/www.jpopasia.com/16300-dfbsnupgbz.jpg
본명 호테이 토모야스
([ruby(布袋 寅泰, ruby=ほてい ともやす)], Hotei Tomoyasu)
출생 1962년 2월 1일 ([age(1962-02-01)]세)
일본 군마현 타카사키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87cm | B형
직업 가수, 기타리스트
소속 그룹 BOØWY(1981년 ~ 1988년)
COMPLEX(1988년~1990년)
솔로
가족 배우자 : 이마이 미키[1]
활동 기간 1981년 ~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Threads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뮤지션 활동
2.1. BOØWY 활동 시절
2.1.1. 히무로와의 관계
2.2. COMPLEX2.3. 솔로2.4. 음악 스타일
3. 배우 활동4. 디스코그래피5. 친숙한 노래들
5.1. TV, 영화5.2. 게임, 만화
6. 가족사7.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isovicious.up.seesaa.net/hotei2.jpg
▲ BOØWY 초반(1980년대)의 호테이 토모야스
일본가수, 기타리스트. 군마현 타카사키시 출생. 호테이 토모야스 布袋寅泰 (Tomoyasu Hotei). 1962년 2월 1일생.

날카로운 눈빛으로 위압적인 인상을 풍기는 기타리스트.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가 러시아계 혼혈 일본인이다.

Zodiac Works라는 기타 회사에서 나온 본인의 시그니쳐 "Main"[2]을 들고 공연에 임한다. 단 상기한 Zodiac사는 2023년 5월 31일자로 영업 종료 예정. 따라서 호테이도 본인 시그니쳐 기타를 교체할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가끔 공연에서 들고 나왔던 펜더 커스텀샵 텔레캐스터가 다음 시그니쳐가 될 가능성이 높을듯.

2. 뮤지션 활동

2.1. BOØWY 활동 시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BOØWY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1.1. 히무로와의 관계

BOØWY의 갑작스런 해산의 원인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실상 밴드의 투 톱이었던 호테이와 히무로의 음악적 견해로 인한 해산이 정설이다.[3] 혹은 호테이의 첫번째 결혼과 그에 따른 독단적 행동이 단초를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4] 당시 부인이었던 야마시타 쿠미코의 투어에 세션으로 참가했던 호테이가 마츠이, 타카하시도 함께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는 보컬이자 리더인 히무로에게 실례라고 생각한[5] 타카하시가 히무로에게 이 사실을 고하면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는 설은 타카하시의 자서전에서 공인된 팩트이다. 하지만 다양한 에피소드를 겪으며 동고동락해 온 만큼 그 둘의 관계에 대해 함부로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악화가 해산에 영향을 주었냐는 질문에 히무로와 호테이 둘 다 부정한 적이 있으며 여전히 서로를 높게 사며 마츠이와 타카하시 또한 밴드의 일원이라 언급하는 등 밴드의 해체에는 영향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외에도 타카하시가 유튜브 등지에서 언급한 바로는 호테이가 보위의 성공가도가 극을 찍었을때 해체하자는 발언을 했다고도 한다.

BOØWY가 해산한지 어느덧 20년이 넘어, 팬들은 다시 재결성을 바라고 있다.[6] 마침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록계는 해산했던 밴드들의 재결성 열풍이 불고 있었다. 혹은 완전 재결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기간 한정 재결성 같은 이벤트성 재결성을 하는 밴드의 수도 상당수 있을 정도였다. 전자는 DEAD END, D'ERLANGER, ANTHEM 등, 후자는 VOW WOW, 聖飢魔II 등이 그 예다.

하지만 BOØWY는 재결성이 요원한 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루머가 있지만 공인된 사실은 없다. 해산 이후로 4명이 뭉친 것은 카메라맨 카토 마사노리 결혼식 때 한 번일 정도로 상당히 서먹해진 사이인데다 본인의 철학에 따른 히무로의 태도[7] [8] 등이 재결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로 추정된다.

일부 루머에선 히무로가 BOØWY의 곡을 사용했던 것이 단초라고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라고 보기는 조금 어렵다. 이전 문서에는 이 루머가 공인된 사실인 것처럼 작성되어 있었지만[9] 실제 일본 현지에서의 반응이나 여론은 다르다.

호테이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부흥을 위해서는 재결성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중략) ... 재결성을 바라는 기분은 팬 여러분과 같았습니다만… 히무로의 부흥 지원을 향한 행동은 그의 신념에 근거한 선택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속에서 결심했습니다. 앞으로도 재결성은 없고, 그런 비현실적인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자고.'라고 본인의 이전 블로그에 남겼다. 이후 각각의 솔로 라이브 등지에서 히무로와 호테이 서로의 보위 곡들을 연주하는 등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된 모양. 보위의 베이시스트 마츠이는 히무로의 자선 라이브를 관전하고, '보위를 노래하는 히무로 쿄스케는 몇 년이 지나도, 몇 살이 되어도, 슬퍼질 정도로 그 시절 그대로였다. 훌륭한 스테이지 그리고 훌륭한 시간이었다' 라는 감상문[10]을 남겼다. 또한 라이브 당일 히무로는 '다음달 이 곳(도쿄 돔)에서 친구가 라이브를 한다고 하니 잘 부탁한다'며, 마찬가지로 깜짝 자선 콘서트를 기획한 COMPLEX를 언급하는 MC를 하기도 했다.

히무로와 COMPLEX의 자선 라이브 콘서트는 팬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내며 성료되었으며, 히무로가 총 8.8억 엔[11], 호테이의 COMPLEX가 총 6.5억 엔[12]에 달하는 거액의 공연수익금[13]을 대지진 피해자들에게 기부하여 일본 내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히무로 쿄스케가 2016년에 기존에 누적되어 왔던 청력 손실이 심각해져[14] 은퇴 투어를 발표했기에 이번 기회가 지나면 사실상 다시는 재결성할 수 없다. 호테이는 '마지막 순간에 한 번이라도 옆에서 기타를 치고 싶다'라고 밝히고 나머지 멤버들도 히무로에 대한 걱정과 재결성 의사를 밝혔지만[15] 투어가 이미 시작된 5월 시점에도 완전체 BOØWY의 등장은 아직 없다.

사실 재결성해서 나타난다고 해도 이미 록 보컬리스트로서, 성량 감소 등의 기량 하락을 겪은 히무로가 과거의 열기를 재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며[16][17] 호테이의 음악성도 상당히 변하였기 때문에 기억하던 형태의 공연이 될 확률은 상당히 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팬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며 올드팬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옛 시절을 100%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단 한번이라도 한 그룹으로 다시 뭉치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위의 의문은 의미가 없다. 애초에 2004년도에 도쿄 돔에서 개최된 "21st Century Boowys VS HIMURO"는 보위가 뭉친 것이 아닌 히무로의 개인 콘서트였음에도 불구하고 히무로가 솔로 활동을 개시한 이래로[18] 처음으로 한 공연에서 수많은 보위 곡을 불렀기에[19] 당시에 이미 40대에 진입한 상태[20]에서 어느정도 성량 하락을 겪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보위 곡을 불렀다는 그것만으로 큰 호응을 이끌어냈는데 만약 실제로 4명이서, 그것도 히무로의 은퇴 기념 투어에서 뭉치게 되는 드라마틱한 전개를 이끌어낸다면 과거의 열기는 충분히 재현되고 남을 것이다... 그러나, 5월 23일 도쿄 돔 공연 3일차를 마지막으로 그럴 일은 없게 되었다. 단, 이 마지막 공연에 호테이는 관객으로 참석하였으며, 본인의 공식 블로그에 히무로를 존경하고 있으며 그의 곁에서 함께한 것이 기타리스트로서 최대의 기쁨이자 자긍심이라는 감상문을 남겼다. 그나마 히무로가 음악 활동 자체를 아예 그만둔 것은 아닌고로 팬이라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호테이 또한 아직도 히무로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모양. SNS 상에서 보위 시절을 추억하는 듯한 발언과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히무로의 60세 생일에 별도의 축하 게시물을 올리기도 했으며, 상술한 바와 같이 히무로의 은퇴 공연을 직접 관람하고 공식 블로그에 존경어린 감상문[21]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근년 출연한 티비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히무로를 애칭 '히무록'으로 부르며 과거의 에피소드를 즐겁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지의 모든 보위 팬이 이들의 재결성을 바란다고 간주하는 것은 오산이다. 물론 많은 열성팬들이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보위를 다시 한번 보고싶다', '딱 하루라도 공연만 해 준다면 티켓값이 얼마라고 해도 무슨 수를 써서든 가겠다' 며 재결합을 열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설은 전설인 채로 있는 편이 가장 멋진 법이다', '전설은 현실이 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나게 되어있다. 보위의 재결성은 절대 보고싶지 않다' 고 말하는 팬들도 결코 적지 않다. 이는 상기에 서술된 히무로의 일관된 철학과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2.2. COMPLEX

BOØWY 해산 이후, 호테이는 일본 음악계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났던 킷카와 코지(吉川晃司)와 일명 '장신 유닛'으로 불린 컴플렉스(COMPLEX)를 1988년에 결성했다. 당시 떠돌던 소문과는 다르게 이 둘은 의외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Be My Baby의 히트 등으로, 그에게 포르쉐 911을 끌 수 있는 대중적인 성공을 주었다.

COMPLEX 역시 보위 못지 않게 일본 록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B'z의 기타리스트 마츠모토 타카히로가 '이나바와 컴플렉스의 도쿄돔 라이브를 갔었어요. 훌륭했습니다. 그대로 컴플렉스가 계속되었다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못 했을 거에요.'라는 찬사에 가까운 회상을 호테이 토모야스의 자서전 비밀(秘密)에 남겼을 정도였다. 근데 이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였어요"라고 한 사람이 현재 일본 락 최강의 괴수 유닛 중 한 팀의 멤버이고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대열에 진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COMPLEX는 비록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당시로는 상당히 새로웠던 일렉트로니카나 컴퓨터 음악들을 하드 록에 조합한 시도, 그리고 보위 시절보다 더욱 마초적이고 동서양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하드 록을 보여주었다는 점[22]에서 양악과 방악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일구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음악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서양의 정통 하드 록(에어로스미스, 더 후, 레드 제플린 등등...)과는 확연하게 다른, 일본적 멜로디 진행을 보여준다.[23]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의 수많은, 대중적 하드 록을 표방하는 어느 그룹보다도 형식적인 측면에서 훨씬 정통 하드 록에 가까운 리프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음악 특유의 '뽕끼'를 상당 부분 도려낸 긍정적이고 참신한 스타일의 결과물을 낳았다.[24]

후에 등장하는 B'z의 경우 일본적 하드록으로 정점을 찍긴 했지만 밴드 스코어(보컬과 주 멜로디를 제외한 나머지 세션) 대부분이 '양악의 도작'[25]이라는 폄하를 받을 정도로 서양 음악을 카피했으면서도 멜로디 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특유의 일본적 뽕끼가 너무 강해 해외 청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평론의 면에서 절하되는 경우가 있음을 생각하면 컴플렉스의 음악은 동서양 록 조화의 성공적인 결과물 중 하나였음이 명확해진다.

활동 당시 대표곡은 정말 거친 음악으로는 GOOD SAVAGE, COMPLEX에게 오리콘 차트 1위를 안겨준 싱글의 타이틀곡 Be My Baby 오프닝과 후속 싱글인 19901990년 해산 당시, 콘서트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던 강렬한 사랑노래인 恋をとめないで1990년 해산 당시, 킷카와 코지가 만든 감성적인 곡인 CRY FOR LOVE가 있다.

그러나 컴플렉스 또한 호테이와 킷카와의 음악성에 관한 의견 차이로 인해 활동 중지(라고 쓰고 실질적 해체라고 읽는다.)를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보위 때와는 달리 분쟁의 소지가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고[26] 고 3년간[27]의 짧고 굵은 활동이 그렇게 끝났나 싶었다.

그러다가 2011년 당시 여러 밴드들의 한정 재결성 열풍[28]과 함께 21년만에 마지막 콘서트를 했던 도쿄돔에서 다시 뭉쳤다. 중년이 된 킷카와와 호테이가 등장하여 악수를 하는 장면이 오프닝에서 명장면이다. 이 콘서트는 일본의 위성방송사 WOWOW가 편집본으로 방영하고 이후에 DVD/블루레이로도 발매되었다. 원래 하루 공연으로 예정된 기획이었으나, 폭발적인 반응으로 2일 연속 도쿄돔 공연으로 이어졌다. 팬도 관객도 모두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1990년 당시의 열정만큼 뜨거운 콘서트였다고 평이 나있다.
21년 만에 다시 뭉치게 된 과정을 다룬 짧은 다큐멘터리

오프닝부터 BE MY BABY까지.
7분부터 곡이 시작되고 21년만의 콘서트 재개라는 걸 보여주는 오프닝 내용이 인상적이다. 전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울려퍼지는 "BE MY BABY! BE MY BABY!" 떼창이 압권. 그리고 무대를 향하는 킷카와와 호테이 두 사람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오자 환호성이 울려퍼지고,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환호성은 커지더니 21년만에 재회의 악수를 나눈 순간 그야말로 도쿄돔이 폭발할 듯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2.3. 솔로

이후 POISON, 스릴, 밤비나 등의 명곡들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가진 베테랑 아티스트로 인정받게 되며 특히 그 기타 실력을 인정받아 다수의 영화나 행사 등에 음악을 제공하며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부상하게 된다. 호테이 토모야스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연주곡이 바로 킬빌 OST에 추가된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

그리고 호테이 토모야스가 솔로로 활동하면서부터 콘서트에서 BOØWY 시절의 노래와 COMPLEX 시절의 노래도 섞어서 연주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당시의 원곡과 다른 표현력을 보여준다. 자신의 베스트 앨범에서도 이 시절의 노래를 셀프 커버하였다.

기타리스트치고 퍼포먼스가 크기로도 유명한데 특징으로는 초장신의 몸으로 매우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서 동작이 굉장히 돋보인다. 퍼포먼스 중에 하나로 기타를 칠 때 왼다리를 니킥이나 미들킥 정도로 높게 차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따라해보면 이러면서 정확하고 날카롭게 연주한다는 것이 진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괜히 베테랑이 아니다. 그리고 팬들의 떼창을 유도할 때의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예술이다(…). 감성을 매우 잘 드러난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スリル 같은 노래를 연주할 때는 하체는 춤을 추고 상체는 연주를 하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기타리스트로서의 입지는 이제 세계적인 수준에 있다곤 하지만, 호테이의 노래 실력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잘 쳐줘도 개성있는 목소리다. 싱글 활동 시기에 작곡한 대부분의 노래를 본인이 부르는데 이 목소리가 워낙 특이해서 스탠딩 개그에서 자주 패러디 되곤 한다. 본인도 이를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콘서트에 보통 3-4명 이상의 코러스를 동원하는 편이며, 유명 곡들(주로 BOØWY 시절의 곡들)의 경우 본인이 부르기 보다 관중이 아예 부르도록 하는 편이다. 유명 밴드의 리드 보컬도 게스트로 자주 부르는 편인데, 그 예로 호테이 데뷔 30주년 공연에서는 GLAY의 테루가 참여하여 BOØWY 시절의 명곡 BEAT SWEET, 1994 LABEL OF COMPLEX 등을 불렀으며 2017년 공연에서는 코부쿠로코부치 켄타로가 참여해 わがままジュリエット[29], LIAR GIRL, Oh My Jully (Part 1)[30] 보위 시절의 명곡들을 3곡 불렀다. [31]

싱글 데뷔 후에 히무로를 제외한 BOØWY 멤버들과의 협연은 꽤 있었는데, 해산 후 같은 소속사에 속해 있었던 베이시스트 마츠이 츠네마츠(松井常松)가 주로 서포트로 호테이의 콘서트에 참여해 주었다. 마코토(高橋まこと)와의 협연은 거의 없다가 호테이 데뷔 30주년 공연에 마코토가 참여하여 아주 오랜 만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32] 이후 GUITARHYTHM VI 투어때 마츠이 츠네마츠와 타카하시 마코토와의 특별 라이브로 (히무로가 빠지긴 했지만) 보위의 원년 멤버가 모여 특별한 무대를 가졌다. [33] [34]

2023년 5월, 극렬 좌파로서의 트위터 논객 활동을 지속해온 드러머 타카하시 마코토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지 마라" 라는 댓글을 달았다가 삭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호테이 토모야스는 2차례 이상의 불륜보도과 약탈혼, 많은 뮤지션과의 불화 루머 등으로 사생활 면에서 비교적 잡음이 많은 편인데, 일본의 전 총리 아베의 부인과의 스캔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유명하다. 활발한 미디어 활동과 더불어 정치권과의 친교도 깊어 우파 성향으로 추측되는 만큼 일본 현지에서는 여러모로 '락 정신'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꾸준히 받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두고 일본 내의 우익 네티즌들마저 '조선계인 호테이 토모야스가 우파 정권을 수호하다니' 라며 종종 어이없어 하기도[35] 한다.

2024년 3월 3일 일요일 KT&G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단독 내한 공연이 성사됐다. 링크, 코멘트 영상

2.4. 음악 스타일

개인 커리어 중에도 보위 시절을 연상케하는 멜로디 선의 곡으로 많은 좋은 싱글을 남겼지만, 활동이 계속될수록 더욱 로커빌리 스타일의 플레이를 하고 있다. 2005년작 Monster Drive 앨범에서 특히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Brian Setzer와 협연한 것도 이 즈음이다.

기타리스트로서는 보위 시절부터 이펙터를 이용한 톤 메이킹에 있어서는 이미 장인으로 평가받았고[36] 특유의 훵키한 플레이와 독특한 피킹 하모닉스가 개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유의 멜로디 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그 실력은 정체되지 않고 나날이 성장하여 2000년대 초반 즈음에는 이미 훵크 + 록 분야에선 일본의 본좌급 연주자로 대접받았고 이후에 재즈 및 로커빌리 스타일의 기타 또한 섭렵[37]하여 연주만 들으면 서양인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괴수가 되어버렸다. 일본의 또 다른 록 기타 본좌 Char와 함께한 인터뷰 & 즉흥 연주 영상 최근의 연주 영상 일본 록의 조상님 격인 야자와 에이키치와 함께한 영상

반면 장르 구분은 애매한 면이 있다. 호테이 하면 호쾌한 로큰롤이 떠오르지만 의외로 일본 일렉트로니카의 고참이기도 하며 간간히 블루스 & 재즈 풍의 음악도 하는 등 폭넓은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싱글 Liberty Wings의 자켓에는 나가이 고가 직접 그린 데빌맨큐티 하니를 박아 넣기도 했으며, 이번 북두의 권 201X의 테마곡인 STILL ALIVE의 작업도 맡는 등(물론 자켓엔 켄시로가 그려져 있다.) 마초한(…) 만화 & 애니메이션 쪽과도 인연이 있다. 또 의외로 미야비와 친분이 깊은데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그리고 히데와의 친분으로도 유명하다. 히데의 사망 이후 트리뷰트 앨범의 2번 트랙인 ROCKET DIVE를 호테이 토모야스가 커버했고, 이 버전에는 원곡에 없는 가사가 추가되어 있다. 해석의 내용은 히데 항목에 있고 친분에 관한 것은 아래에 이모저모 항목에서 상술한다.

활동 기간도 길고, 그에 비례해 앨범도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한국의 J-POP 팬덤에서 인지도는 거의 0에 수렴해 앨범 물량도 적을 뿐더러 오래된 건 가격도 엄청 비싸다. 덕질하기 여러모로 곤란한 사람이다(…).[38]

3. 배우 활동

1998년 영화 '사무라이 픽션'의 주역인 카자마츠리 란노스케 역으로 분하여, 사무라이 픽션 자체는 코미디 사극 영화지만 거의 유일하게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는 빌런캐릭터로서 특유의 흉악한 얼굴을 맘껏 어필한 바가 있으며(…) 그 덕분에 한동안 네이버 인물정보에는 배우로 등재되어 있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심지어 2016년 기준으로도 직업은 가수, 기타리스트인데 데뷔는 1998년 영화 '사무라이 픽션'으로 되어있다(...). 사무라이 픽션 영화 자체의 음악도 모두 호테이 토모야스가 작곡했다.

新 仁義なき戰い(신 의리 없는 전쟁)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OST 작업에도 참여하였는데,(전부 작업인지는 불명.) 사실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는 이 영화의 OST 수록곡이다. 新 仁義なき戰いのテーマ라는 곡명으로 수록되어 있고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는 이 곡의 영제인 셈이다.

4. 디스코그래피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이 분류에 대한 설명은 호테이 토모야스/디스코그래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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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친숙한 노래들

5.1. TV, 영화

한국인들이 가장 친숙한 호테이의 곡이라면 역시 킬빌무릎팍도사(…)에 삽입되었고 혼다 어코드[39]혼다코리아를 통해 한국에 처음 출시될 당시 TV 광고 배경 음악으로 쓰였던 Battle Without Honor or Humanity다. 본래는 호테이 토모야스가 출연하고 음악 감독도 담당한 영화 <신 의리 없는 전쟁>의 OST에 있던 곡이다. 이후 트랜스포머에서도 잠깐 쓰이기도 하였다. 범블비의 투정(?)에 삐져서 카마로 5세대로 새로 스캔해서 등장할 때 브금으로 깔렸다.[40]

무한도전에도 상당히 자주 나왔다. 화면이 느려지고 긴박한 상황에서 쓰였던 노래는 대부분 사무라이 픽션 OST와 Electronic Samurai 곡에서 나왔다. 2015년 12월 26일 방송된 무도 공개 수배 편 도입부를 보면 Strangers 앨범의 How The Cookie Crumbles가 나온다. 2015년에 발매된 앨범인데… 팀 내에 팬이 있을 수도?

MBC GAME워크래프트 3 프라임 리그에서 가장 좋은 평을 받았던 시즌 4의 오프닝에 쓰였던 곡도 호테이 토모야스의 Frozen Memories다. 원래는 영화 KT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2006년에 개봉했던 폭력 써클이란 영화에서는 GUITARHTHM 앨범의 수록곡인 GLORIOUS DAYS가 삽입되었다. 이 곡의 가사가 100% 영어였기 때문에 넣는 데 거부감이 없었을 지도 모르고, 아니면 영미 락인 줄 알고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엘르가든이 알려진 사례와 비슷하다고 추정한다. 또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다룬 영화 KT의 OST에 수록되었던 Frozen Memories, Kill The Target도 같이 삽입되었다. 때문에 영미 락인 줄 알고 넣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5.2. 게임, 만화

닌텐도 DS 유저라면 응원단 시리즈 1편의 스릴과 2편의 밤비나에 익숙할 것이다. 밤비나는 드럼매니아 2nd에서도 판권곡으로 등장해 익숙하다. 커버 보컬로 수록되었고 그나마 국내 정발판은 보컬이 짤려서 MIDI 음으로 대체되었다.

스릴(スリル)은 리듬 게임리플렉 비트 콜레트유비트 소서에 수록되었다. 자세한 설명은 항목 참조.

귀무자2의 메인 테마곡으로 쓰인 Russian Roulette도 나름 유명한 편이다. 이 곡도 드럼매니아에 판권곡으로 등장한 적이 있었다.

북두의 권 201X에서는 테마곡인 STILL ALIVE를 불렀다.

2013년에는 게임 진삼국무쌍7에서 사실루트 엔딩곡인 "폭풍의 언덕(嵐が丘)"을 불렀다. 게임 자체도 재밌다는 평가에 맞물려 반응이 제법 괜찮은 편이다.

6. 가족사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계 혼혈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일본인러시아인혼혈이며 일본 국적이다. 자신의 데뷔 25년이던 2005년에 발간한 자서전 <비밀(秘密)>에서 처음으로 밝힌 내용이다.

아버지는 한국일본을 넘어다니며 무역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41] 당시 호테이의 집에 달린 명패에는 "야나가와"라는 명패와 "호테이"라는 명패가 같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호테이는 왜 자신은 엄마의 성씨인 호테이인지 궁금해했고, 어머니는 "호테이의 아버지는 한국인이란다."라고 알려줬다고 자서전에서 털어놓았다. 여기에 큰 충격을 받은 호테이 토모야스는 평생을 "나는 누구지?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를 고민하였다 하고 그 계속된 고민으로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인 IDENTITY를 만들었다고도 밝혔다.

나중에 자신의 아버지는 한국에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일본에 살림을 또 차렸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호테이네는 '일본용 가족'이었다. 결국 호테이가 고교 3학년 무렵 두 사람이 결별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 국적이 없던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가 아버지의 빚을 몽땅 떠안게 되어 힘든 생활을 보냈다고 당시의 상황을 밝혔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나중에 보위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호테이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의 직원을 통해 아버지가 당뇨병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기 전에 호테이 가족을 만나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연락이 닿은 적이 있었던 때, 호테이의 여동생은 "이제는 만나서 사과를 받자."고 했지만 호테이는 끝까지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여 무산됐다. [42]

<사무라이 픽션>이 국내 개봉되고 배우 자격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아버지의 한국인 자녀(즉, 호테이의 이복 형제)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 내용에 한국의 가족도 무너져서 힘든 세월을 보냈고 아버지는 1992년에 지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는 내용과 함께, 아버지가 일본의 가족들에게 늘 사죄하며 후회했으며 자신이 버리고 온 아들 호테이에 대한 미안함과 일본 내 최고의 록 밴드인 보위의 기타리스트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활동에 관련한 신문 기사, 비디오, 앨범 등 모든 것을 소장하면서 보위의 기타리스트 호테이 토모야스를 자랑스러워했단 사실, 당뇨병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던 1988년 당시에 보위의 마지막 도쿄돔 콘서트를 찾아갔다는 사실 등의 호테이가 몰랐던 이야기가 들어있었다.[43]

현재는 자신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자서전 발매 이후 추가로 밝힌 적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단지 이전보다는 조금 누그러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2024년 3월 3일, 300여명이 모인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에서 역사적 첫 공식 내한 공연을 하였는데 사실상 아티스트의 네임 밸류를 생각하면 거의 적자에 가까운 시도였다. 호테이는 이 공연을 아마 자신을 위해서 한것으로 보인다. 그의 공연 후기 (인스타에 본인이 직접 올린) 내용을 보면 큰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내서 아버지가 잠든 한국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의미있는 일을 해냈다는 안도감 섞인 멘트를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62세가 된 호테이는 이제서야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충분히 회복한 것으로 보여진다.

2023년 9월 4일 샤베쿠리007 방송에 출연했는데, 주제가 어린 시절에 관한 내용이었다. 동창들이 출연해 에피소드를 말했는데, 엄청 부유한 집이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가족에 대한 얘기도 나왔는데, 호테이 토모야스가 말하길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유복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다만 무역업에 종사해서 절반은 일본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계나 러시아계에 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7. 여담



[1] 국내에서도 PRIDE라는 곡으로 유명한 가수이다.[2] 메인(Main)이라는 이름답게 항상 메인 기타로 공연에 임한다. 회사 사이트에 소개란에도 이름 그대로 본인의 메인 기타를 복각한 기타라 설명한다. 기타에 대한 자세한 관련사항은 http://www.zodiacworks.com을 참조.[3] 이는 보위 해산 이후의 둘의 음악적 행보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강렬한 하드록을 추구했던 호테이와 다르게 히무로는 솔로 활동 초기에는 평론가들로부터 "전설적인 록 밴드인 보위의 보컬리스트 출신이 맞냐?"는 비판을 들을 만큼 상대적으로 팝적인 면을 많이 보여주었다.[4] 이는 훗날 평론가 요시다 고우의 라디오 방송에서의 증언을 통해서도 사실임이 밝혀졌다.[5] 그도 그럴 것이 밴드 멤버의 4분의 3이 다른 가수의 백밴드로 서게 되는 셈이다.[6] 히무로나 호테이나 둘 다 자신들의 공연에서 여러 번 보위 곡을 부르거나 연주했으나 호테이는 연주는 완벽하지만 보컬에서 아쉬움을 샀고 반대로 히무로의 경우에는 보컬은 훌륭하나 그가 자신의 페르소나 수준으로 아꼈던 기타 서포트 멤버인 다이타가 연주 테크닉은 뛰어나지만 보위 곡을 연주할 때만큼은 호테이 특유의 맛을 살리지 못하여 아쉬움을 샀다.[7] 비록 히무로는 미디어에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완벽주의적 기질이 강한 만큼 자존심이 세고 예민하며 독고다이 기질에 다소 독선적인 면이 있는 것은 팬들 사이에서 정설로 통한다. 실제로 솔로 활동 당시 보위의 보컬로서의 이미지와 징크스를 벗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나름의 철학으로 임했으며, 보위의 재결성이 계속해서 불발되었던 것은 이런 측면이 강하게 작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8] 히무로에게 다소 외골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보위 해산 후 수십년 간 이어진 기나긴 프로 음악인으로서의 세월 중에 그는 단 한번도 사적인 면에서 잡음을 일으키거나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다. 복수의 여성 문제, 업계 동료들과의 충돌 및 각종 폭력 사건 등으로 다양한 스캔들 보도가 끊이지 않았던 호테이와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히무로를 제외한 보위의 세 멤버들은 각각 자서전을 출판하여 보위 해산 및 당시 멤버들의 언동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정황을 서술하며 본인 버전의 스토리를 공개하고 있으나 (서로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또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히무로는 내내 '방향성의 문제' '4명이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무난한 변 외에는 일절 본인의 입장을 호소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해산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일화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관련자들을 통해 흘러나오며 해산 결정 및 그 실행을 둘러싼 과정에서 호테이가 히무로에게 상당히 부적절한 태도를 취했다는 설이 어느 정도 사실로 굳어진 현재, 히무로가 재결합에 대하여 취해 온 일관성있는 스탠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허언과 번복이 없기로 알려진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더욱 그렇다.[9] 이전 문서에서 작성한 원인은 히무로가 2011년 6월, KYOSUKE HIMURO GIG at TOKYO DOME "We Are Down But Never Give Up!! 이라는 자선 목적의 도쿄돔 라이브 콘서트에서 호테이가 작곡한 곡을 포함한 BOØWY의 레파토리들을 불렀다는 것인데, 타카하시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이 소식에 '아티스트로서 훌륭한 결단'이라며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심 서운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히무로 본인은 '가능한 관객들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수익이 증가하여 자선 효과는 보다 높아진다. 청중을 많이 모으기 위해, 보다 강한 임팩트를 주자는 발상으로 ‘BOØWY’로 연결했으나… 멤버의 기분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건 잘못이었다.' 라는 반성의 멘트를 띄우기도 했다. 보위의 거의 대부분의 악곡은 작사자인 히무로, 작곡자인 호테이가 퍼블리셔와 함께 저작권 상의 권리를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이와는 별개로 해산 이후 각 멤버들은 자유롭게 본인들의 공연에서 보위의 악곡을 사용해 왔기에 물론 법적인 문제는 없다고 하나, 보위의 이름을 건 자선을 목적으로 개최된 공연을 앞두고 멤버들과 사전 상의가 없었다는 점에서 팬의 입장에서도 서운함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히무로는 애시당초 재결성을 할 의사가 없었으며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 시 보위의 재결성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자 '좋은 질문이네요... 없습니다.' 라고 발언한 영상이 남아있기도 하다.[10] BOOWYを歌う氷室京介は、何年経っても、何歳になっても、せつないまでに、あの頃のままだった。素晴らしいステージ、そして、素晴らしい時間でした。#[11] 880,585,362엔. # 히무로는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의 자작곡 'IF YOU WANT'를 발표하였는데, 이 곡은 니혼TV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인 NEWS ZERO의 테마 송이 되기도 했다. 훗날 히무로는 공연수익금 외에도 이 곡의 저작권 수익료 전액을 추가로 더 기부하였다.[12] 654,318,473엔. #[13] 원이 아니다. 엔이다.[14] 한쪽 귀는 이미 들리지 않을 정도라고 밝혔다.[15] 2019년 실제로 히무로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뭉쳐 호테이의 솔로 앨범에서 협업하여 만든 을 공개하기도 했고, 라이브 투어에 참여하기도 했다.[16] 히무로 솔로 곡의 경우 그의 보컬 변화를 고려해 발라드 친화적으로 성향이 많이 바뀌었다.[17] 다만 히무로가 나이로 인해 성량, 체력 등의 기량이 감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50대가 넘어서도 라이브에서 심심찮게 샤우팅을 하고 뛰어다니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과거의 열기를 재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지나친 발언이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솔로 명의로 돔 투어를 매진시킬 수 있는 멤버는 객관적으로 히무로 쿄스케 한 명 뿐이기도 하다. 물론 돔을 매진시킬 관객동원력을 보유한 일본의 솔로 아티스트 자체가 애초에 매우 드물다.[18] 사실, 아예 안 불렀던 것은 아닌데 갓 솔로 1집을 발표하여 자신의 곡만으로는 도저히 공연의 세트리스트를 채울 수 없었던 솔로 초기에는 공연에서 Image down, ハイウェイにのる前に, Cloudy heart, Honky Tonky Crazy, わがままジュリエット와 같은 보위 시절의 곡들을 의외로 많이 불렀었다. 데이빗 보위의 Suffragette city나 Rebel Rebel, Billy Idol의 Mony Mony처럼 유명 해외 아티스트의 곡을 부르기도 하였으며 3번째 앨범인 Higher Self를 테마로 한 Over Soul Matrix 투어에 이르러서야 순수하게 자신의 솔로곡만으로 세트리스트를 채우기 시작했다.[19] 30곡의 세트리스트 중 18곡이 보위 곡이었다.[20] 히무로 쿄스케는 1960년 10월 7일 태생이다.[21] 히무로 쿄스케 LAST GIGS 마지막 날을 관람하였습니다. 청력 이상과 싸워가면서 35곡을 풀파워로 완창한 보컬리스트 정신, 끝까지 관철한 스토익한 미학에 가슴 떨리고 감동했습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아쉽지만, 컨디션 회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창작 활동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만나 당신 곁에서 비트를 새기고, 노래하고, 춤추고, 미소를 나눈 것이 기타리스트로서 가장 큰 기쁨이자 자부심입니다. 진심 어린 감사와 최대의 리스펙트를 담아. 고마워요.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I truly want to thank you from the bottom of my heart. HOTEI.[22] 이것은 보위의 보컬이었던 히무로 쿄스케와 COMPLEX의 보컬이었던 킷카와 코지의 스타일 차이에서 기인하였는데, 제이락 계에서 '꺾고 떠는' 창법의 선구자라 불릴만큼 기교적 측면이 강조되었던 히무로에 비해 킷카와는 상당히 직선적인 창법의 소유자였다.[23] 가령 2人のAnother Twilight 같은 곡은 형식적으로는 서양의 훵크 록이면서도 그것을 체감하기 힘들 정도로 일본적인 멜로디 진행을 느낄 수 있다.[24] 호테이 토모야스의 전 밴드였던 보위의 음악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컴플렉스 시절이 좀 더 근본적인 하드 록을 추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컴플렉스의 음악은 기타 '리프'의 비중이 보위의 음악에 비해서 훨씬 크다.[25] 당장 나무위키의 B'z 항목에도 서양의 하드 록 파쿠리에 대한 언급이 있고, X JAPAN의 요시키도 이를 비판한 바 있다는 소문이 있다.[26] 허나 킷카와와 호테이 한동안 둘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 듯 하다. 둘의 불화설은 주지의 사실이며 훗날 대지진 자선공연으로 재회할 때까지 계속 소원했다.[27] 정확히는 년차로 3년이고, 실제 활동은 만 2년 가량이다. 이 기간 중 COMPLEX는 정규 음반 2장, 라이브 앨범 1장 (위 은퇴 도쿄돔 공연), 이 후 베스트 음반 1장이 나왔다.[28] 당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일본 전체의 분위기는 상당히 침채되어있었다. TV에서도 즐거움을 연상시키는 CM이나 프로그램은 철저히 배재되었고, 수많은 아티스트가 예정되어있던 콘서트를 취소하는 등 엔터테인먼트의 암흑기였다. 그러던 와중에 몇몇 아티스트들이 일본을 응원한다는 취지로 공연을 강행하였고, 점차 이미 해체하거나 활동을 중단한 밴드들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재결성을 하는 케이스가 많아졌다.[29] 호테이가 대부분의 작곡을 담당한 보위 곡 중에서 몇 안되는 히무로 작곡의 대표곡이다.[30] 라이브에서 거의 보기 힘든 곡 중 하나였다.[31] 라이브 후 코부치 켄타로가 어릴때부터 쭉 본인의 히어로였던 분의 라이브에서 함께 노래를 할수 있어서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32] 해산 후 마코토는 히무로와 같은 소속사에 속했었다.[33] 공식적인 보위의 해체 후 이렇게 라이브에서 모인것이 34년만이다.[34] 하지만 안타깝게도 위에 항목에서 적혀진 바와 같이, 히무로와의 협연은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히무로가 은퇴한 이상 이후로도 힘들다고 판단된다.[35] 물론 대부분 우익들의 반응은, '(밴드의 인기를 견인하고 해산 후 솔로 아티스트로도 성공한) 히무로와 호테이가 먹여준 공짜밥은 맛있었냐'며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적었던 타카하시를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발언이 압도적이다.[36]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오무 울음소리도 그가 기타로 녹음했다.[37] 사실 보위 초창기에도 로커빌리 스타일의 곡을 시도한 바 있는 만큼, 해당 곡의 커버 영상 어느 정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연주인이었다.[38] 이것은 한 때 같은 밴드 멤버였던 히무로 쿄스케와도 일맥상통한다.[39] 한국 런칭 당시 일본명 인스파이어[40] 황색 바디에 검은색 라인이 가미된 범블비의 컬러링이 킬빌에서 우마 서먼이 입었던 복장을 연상시키는 것에 대한 오마쥬인 듯하다.[41] 아버지는 일본 최초로 흑진주를 수입하였다. 당시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았었는데, 하우스 전문 잡지에 이 저택의 모습이 게재될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이었다.[42] 사실 아래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아버지는 임종하기 전까지 시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당시 호테이의 이복 동생이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였고 임종을 지켜보았다. 호테이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언을 바로 이 이복 동생이 소니워크맨을 외부 마이크로 연결하여 녹음을 하였는데 조작을 잘못하여 녹음이 되지 않아서 평생 후회하고 있다. 이 유언의 녹음 실패를 미안해 한다는 이야기를 호테이에게 전달한 편지속에서 언급하였다. 호테이의 아버지는 향년 67세에 암으로 사망하였다.[43]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당시 호테이 토모야스의 아버지는 티켓을 구할 수 없어 도쿄돔 외벽에 귀를 대고 공연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잘못 기재된 내용이다, 실제로는 호테이의 아버지가 도쿄돔에 갔을 당시에는 시력엔 문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도쿄돔 공연 시작 직전 티켓부스, 아들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의 모습, 도쿄돔의 전경 등을 본인의 카메라로 직접 촬영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에 한국의 이복동생에게 편지를 받고 진상을 알게된 후 호테이는 엄청나게 울었다고 자서전에 기록하였다.[44] INU 리더로, 소설가로 데뷔해 아쿠타카와상을 수상한 적이 있는 뮤지션이다.[45] 다만, 본인도 아버지 때문에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으면서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46] 이마이 미키와 결혼하고 나서도 사생활 굴곡이 꽤 있다. 불륜설이 아닌 실제로 정황이 확실한 배우들만 쳐도 타카오카 사키, 모델 토미나가 아이 등등... 그러고도 친구 남편 빼앗아서 결혼했다는 이유로 현 부인 이마이 미키 역시도 니가 저지른 만큼 돌려받는 거라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굉장히 여론이 차갑다. 당대 최고급의 기타리스트와 당대 최고급의 여가수가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음악적인 성취 이외에는 둘 다 이미지가 영 별로다.[47] 이후 몇 달 후에 공식 인스타그램에 자기 아내 콘서트 홍보를 하는 걸 보면 찌라시가 확실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