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상원의원 (알래스카 주 클래스 3) | ||||
제86~90대 어니스트 그리닝[1] | ← | 제91~96대 마이크 그래벌 | → | 제97~107대 프랭크 머카우스키 |
미합중국 제91-96대 연방 상원의원 모리스 로버트 "마이크" 그래벌 Maurice Robert "Mike" Gravel | |
<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930년 5월 13일 |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 | |
사망 | 2021년 6월 26일 (향년 91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시사이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전처 리타 마틴 (1959~1981) 배우자 위트니 스튜어트 (1984~) |
학력 | 컬럼비아 대학교 (B.S.) |
정당 | (~2008, 2010~2021) (2008~2010) |
의원 선수 | 2 (상원) |
의원 대수 | 91, 92, 93, 94, 95, 96 (상원) |
경력 | 알래스카 주 하원의원 (1963~1967) 알래스카 주 하원의장 연방 상원의원 (알래스카 클래스 3 / 1969~1981) The Gravel Institute 창립자 |
군사 경력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1951년 ~ 1954년 | |
최종 계급 | 중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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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민주당, 자유당 소속 정치인2. 생애
1930년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캐나다 출신 프랑스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는 성적도 좋지 않고 난독증을 가졌지만 이때부터 정치인의 전단지를 나눠 주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18세에는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측 의용군으로 참전하려 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가톨릭계 대학교인 어섬션 대학교에 진학하였다가 2학년에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대학교로 편입학하였다. 성년이 되자 포트 베닝에서 장교 교육을 받아 1952년 소위로 임관하여 서독 슈투트가르트에서 복무하였다. 1년 뒤 프랑스 오를레앙으로 전출되어 1954년까지 정보부대에서 프랑스어 실력을 살려 프랑스 내 공산주의 활동을 감시하는 활동을 하였다. 중위로 예편한 뒤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생활 중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다고 한다.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라벨은 정치 파벌의 조직이 미진하고 선거연령이 낮아 신진 청년 정치인으로 활동하기 좋은 알래스카 준주로 이주하였다. 알래스카 민주당에서 활발히 활동하였고 1958년 준주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낙선하였다. 1960년에는 앵커리지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또다시 낙선하였다. 정치경력 초기 그라벨은 감세와 알래스카 주 승격을 지지하였다. 알래스카 주 승격 이후 중대선거구제인 주 하원의원에 출마하여 14인 중 8위로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주 하원의장을 지냈다. 1966년 알래스카 광역구 연방하원의원에 출마하려 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랄프 리버스(Ralph Rivers)에게 패했다.
196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그라벨은 "알래스카 주 승격의 아버지"로 꼽히는 자당 소속 어니스트 그리닝의 상원의원 의석을 노렸다. 그리닝은 알래스카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으로 주 승격 이전부터 1968년까지 준주지사와 상원의원으로 30년간 주 정치에 종사하였다. 외교적으로는 통킹만 결의안에 웨인 모스와 함께 유이하게 반대표를 던진 반전파 상원의원이었다. 그라벨은 특정한 공약과 이슈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선전하는 30분 영상 광고를 상영하고 취임 이후의 입장과 달리 베트남 전쟁에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면서 부동층을 포섭하였다. 81세의 고령인 그리닝의 고령과 대비되는 그라벨의 젊은 나이도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그라벨은 2,000표 차이로 그리닝을 꺾었고, 본선에서도 공화당 후보인 엘머 E. 라스무손(Elmer E. Rasmuson)과 경선에 불복하고 기명 투표[2]로 출마한 그리닝에게 승리하였다.
상원의원 임기 중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알래스카 횡단 파이프라인(Trans-Alaska Pipeline System) 건설 기여가 있다. 파이프라인 건설은 석유에 경제적으로 의존이 큰 알래스카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지만 1969년 통과된 # 국가환경정책법에 따른 환경영향평가 의무화와 환경주의자들과 원주민들의 반대로 발목이 잡히고 있었다. 그라벨은 파이프라인에 대한 환경영향평가를 면제하는 법안을 발의하였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지지를 얻었다. 그라벨의 발의안은 상원에서 49:49로 동률을 이뤘고 스피로 애그뉴의 타이브레이커 투표로 통과되었다. 1차 석유 파동 뒤 미국의 에너지 자립을 위한 알래스카 석유 개발은 더욱 촉진되었다. 1977년 완공된 파이프라인은 알래스카의 경제발전과 인구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외교적으로 그라벨은 반전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