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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왕실 깃발 무함마드 알리.png | ||
케디브 시기 문장 [1867~1914] | 현행 왕실 문장 | ||
창립일 | 1805년 | ||
창립자 | 무함마드 알리 파샤 | ||
현재 수장 | 푸아드 2세 | ||
국가 | 이집트 속주 이집트 케디브국 이집트 술탄국 이집트 왕국 | ||
링크 |
1. 개요
1805년~1953년에 걸쳐 한세기 반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무함마드 알리 파샤(메흐메드 알리)의 왕가. 알리/알라위/알라위야 가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집트 외에도 수단(1820-85)[2], 히자즈(1812-40), 네지드(1818-24, 1836-40), 시리아(1832-40) 등지를 통치했다. 사우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같은 왕조가 여러 차례 국호 및 작위를 바꿨지만[3], 존속 기간 동안 끊김 없이 이어져 덜 복잡한 편이다.명목상으로 1805년~1914년간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이었지만[4] 대부분의 시기 사실상 독립된 상태였다. 실질적으로 따지면 1805년 (혹은 1832년)~1882년간 독립국이었고, 1882년~1953년(혹은 1922년)에는 영국의 보호령 내지는 식민지였다. 따라서 11명의 군주들 중 독립 군주로 평가받는 이는 무함마드 알리 파샤, 이브라힘 파샤, 아바스 힐미 1세, 사이드 파샤, 이스마일 파샤의 5인 뿐이다.
2. 작위
- 이집트 속주의 왈리(1805~1867)오스만 제국의 명목상 속국
- 이집트 케디브국의 케디브(1867~1914)오스만 제국의 명목상 속국 / 영국의 실질적 속국 (1882 ~)
- 이집트 술탄국의 술탄(1914~1922)영국의 실질적 속국
- 이집트 왕국의 국왕(1922~1953)영국의 실질적 속국
3. 국기 및 문장
3차례 정치체(국호 및 작위)가 바뀌며 4개의 다른 국기와 왕실 문장을 지녔다. | |
이집트 속주 시절 (1805~1867). 이때도 케디브를 자칭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왈리' 칭호로만 인정되었다. |
- 1844년에 새로 제정된 깃발의 초승달은 기존에 쓰이던 오스만 국기의 초승달보다 덜 굽어 있는 정도의 차이만 있다. 왈리는 제국의 일개 총독이었기에 독자적인 왕실 문장을 지닐 수 없었지만, 1854년 들어 수에즈 운하 건설에 나선 것으로 유명한 사이드 파샤가 유럽 왕실들의 문장을 모티브로 하여 오른쪽과 같은 왕관을 올린 문장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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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케디브국 시절 (1867~1914). 이스마일 파샤가 크레타 반란 진압을 돕고 연공을 증대하는 대가로 술탄-칼리파 압뒬아지즈에게 페르시아어 계통인 케디브 (헤디브) 칭호를 인정 받았다. 그 지위는 술탄 아래, 그랜드 바지르 (대재상) 위였다. |
- 좌측의 국기는 1867년~1882년까지 불과 15년만 쓰이다가 왕실 문장이 반영된 아래의 초승달 & 별이 3개의 형태로 교체된다. 따라서 초승달 & 별이 3개인 깃발을 보면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이집트가 배경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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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술탄국 시절 (1914~1922). 1차 대전 발발 후 영국의 영향력 하에 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립을 선포, 그와 대등한 술탄국을 선포하며 새 국기와 문장이 제정되었다. 다만 표면상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결국은 이전보다도 못한 영국의 속국이었다. |
- 사실 좌측의 국기는 이집트 케디브국이 누적된 재정 악화를 겪다가 결국 영국 치하 이집트로 전환되는 1882년에 새로 제정된 것이다. 따라서 사용 기한은 1882년~1922년이다. 1919년 이집트 혁명 당시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이 내세운 깃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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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왕국 시절 (1922~1953). 민족주의 여론이 독립을 요구한 1919년 이집트 혁명 후 영국이 자치권을 좀 더 부여한 이집트 왕국 시절의 깃발로, 오스만 제국 및 영국이 연상되는 적색 계통 대신 아랍을 상징하는 녹색 계통으로 제정했다. |
- 비록 왕정 자체는 1952년 이집트 혁명 후 이듬해에 폐지되었지만, 좌측의 깃발 자체는 1958년까지 이집트 공화국의 공동 국기로 사용되었다. 1953년에 제정된 이집트 공화국 국기[5] 역시 살라딘의 독수리 가슴팍에 왕실 문장의 원형 부분을 품은 형태였다가 1958년에 이르러서야 아랍 연합 공화국 깃발로 바뀌었고, 아랍 공화국 연방 깃발을 거쳐 1984년에 현행 깃발이 체택되었다.
4. 역대 군주
- 1. 무함마드 알리 파샤 (왈리, 자칭 케디브) [재위: 1805년~1848년]
- 2. 이브라힘 파샤 (왈리, 자칭 케디브) [재위: 1848년]
- 3. 아바스 힐미 1세 (왈리, 자칭 케디브) [재위: 1848년~1854년]
- 4. 사이드 파샤 (왈리, 자칭 케디브) [재위: 1854년~1863년]
- 5. 이스마일 파샤 (왈리 -> 케디브) [재위: 1863년~1879년][1867]
- 6. 테우피크 파샤 (케디브) [재위: 1879년~1892년]
- 7. 아바스 힐미 2세 (케디브) [재위: 1892년~1914년]
- 8. 후세인 카멜 (술탄) [재위: 1914년~1917년]
- 9. 푸아드 1세 (술탄 -> 국왕) [재위: 1917년~1936년][1922]
- 10. 파루크 1세 (국왕) [재위: 1936년~1952년]
- 11. 푸아드 2세 (국왕) [재위: 1952년~1953년]
5.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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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의 가계도는 기존에 왕궁이던 알렉산드리아의 엘 살라멕 호텔에 걸려 있다.
6. 제위 계승법
왕조 초기에는 대부분의 아랍 왕실들이 그렇듯이 연장자 상속제였다. 따라서 무함마드 알리의 사후 그 아들들 사이에서 형제간 혹은 숙질 간 계승이 이루어졌다. 그러다 1866년 (무함마드 알리의 장손) 이스마일 파샤는 장자 상속제로 전환했고, 1879년 그가 영국에 의해 폐위된 후에도 장남 테우피크 파샤가 옹립되었다. 다만 1914년 테우피크 파샤의 장남 아바스 힐미 2세가 폐위된 후 영국은 후자의 장남 모하메드 압델 모네임을 옹립하지 않고 아바스 힐미 2세의 동생 후세인 카멜을 옹립했다. 그리고 1917년 후세인 카멜의 암살 후 영국은 그의 아들 카멜에딘 (카말 앗 딘)을 옹립하려 했으나 후자가 거부하자 후세인 카멜의 동생 푸아드 1세를 옹립하며 뜻하지 형제 상속이 이어졌다. 그나마 푸아드 1세에서 시작된 이집트 왕국기에는 장자 상속이 정착하나 싶었으나 3대만에 왕정이 폐지되고 말았다.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이집트 속주 시기: 연장자 계승
- 케디브국 시기: 장자 계승
- 술탄국 시기: 형제 계승
- 왕국 시기: 다시 장자 계승
아미르 앗 사이드의 깃발
한편 이집트 왕국 들어 계승 서열 1위, 즉 왕세자에게는 상이집트의 왕공을 뜻하는 아미르 앗 사이드 (أمير الصعيد) 칭호가 부여되었다. 푸아드 1세가 당시 아가 (장교) 직위에 있던 파루크 1세에게, 다시 파루크 1세가 1952년에 태어난 아들 푸아드 2세에게 부여했다. 공식적으로 아미르 앗 사이드를 역임했던 인물은 마지막 두 군주 뿐이지만, 푸아드 2세 역시 비공식적으로 아들 모하메드 알리에게 부여했다.
7. 여담
11명 군주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약 13.5년이다.2대 이브라힘 파샤와 11대 푸아드 2세의 경우 재위 기간이 1년도 되지 않아 누락되는 경우도 있다. 그 두 명을 빼고 계산할 경우 평균 재위 기간은 16.3년으로 늘어난다. 최장 기간 재위한 군주는 초대 무함마드 알리로, 무려 43년간 재위했다. 그 다음으로는 아바스 힐미 2세가 22년으로 장기 재위했지만, 영국 치하 이집트의 꼭두각시였기에 주권 군주 중에서는 16년간 재위한 이스마일 파샤가 된다.
알리 왕조 군주들의 퇴위 및 사망 사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연사 : 무함마드 알리 파샤[초대], 이브라힘 파샤[2대], 테우피크 파샤[6대], 푸아드 1세[9대]
2. 암살 : 아바스 힐미 1세[3대], 사이드 파샤[4대], 후세인 카멜[8대]
3. (비자발적) 퇴위 후 자연사 : 이스마일 파샤[5대], 아바스 힐미 2세[7대], 파루크 1세[10대]
- 이스마일 파샤의 경우 이탈리아를 거쳐 이스타불에서 여생을 보냈다. (퇴위 후 생존 기간: 1879년 ~ 1895년)
- 아바스 힐미 2세의 경우 이스탄불에서 왕위를 계속 주장하다가 1931년에야 포기하고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퇴위 후 생존 기간: 1914년 ~ 1944년) 아들 모하메드 압델 모네임은 비록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1952-53년 이집트의 섭정을 맡는다.
- 파루크 1세의 경우 많은 재물과 함께 이탈리아로 망명했고, 해외 부동산도 많았기에 사치스러운 여생을 보냈다. (퇴위 후 생존 기간: 1952년 ~ 1965년) 아들 파루크 2세는 1953년 퇴위 후 현재까지 생존 중이다.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이집트 왕실은 멸망 과정에 있어 같은 이-로 시작하는 이탈리아 왕실과 유사한 점이 있다. 2차 대전 패전 후 이탈리아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6년 5월에 왕정 폐지 여론에 떠밀려 다름 아닌 이집트로 망명했는데, 양위를 받은 아들 움베르토 2세 역시 바로 한 달 후에 국민 투표로 왕정이 폐지되면서 왕위를 잃었다.[18] 1947년 12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한다. 그런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망명을 받아주었던 파루크 1세는 불과 4년 8개월 후인 1952년 7월 23일에 자유 장교단의 쿠데타가 벌어지자 3일 후 역으로 본인이 아들 푸아드 2세에게 양위하고 이탈리아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다만 이탈리아의 경우와 달리 당시 푸아드 2세는 생후 6개월의 갓난아기에 불과했기에 정식으로 즉위하지 못하고 같은 날 부친과 함께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집트에서는 푸아드 2세의 6촌인 모하메드 압델 모네임이 섭정을 맡았다가 1953년 6월에 정권을 공화정 군부에 넘겼다.[19]
이집트, 이탈리아 왕실의 멸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두 왕실 모두 실질적 왕정 붕괴 후 망명했다.
2. 두 실질적 마지막 군주들은 모두 망명 직전 아들에게 양위했다.
3. 이탈리아 왕실은 이집트, 이집트 왕실은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4. 두 왕실의 상호간 망명은 6년 사이에 벌어졌다.
푸아드 2세의 아들이자 자칭 '아미르 앗 사이드'인 모하메드 알리 |
- 푸아드 2세는 망명 중 프랑스인 여성 도미닉 (아랍어 이름: 파딜라)과 결혼했는데, 1979년 초엽 아들을 임신한 그녀가 만삭이 되자 당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에게 부탁해 이집트 땅에서 출산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그렇게 카이로에서 태어난 푸아드 2세의 아들 모하메드 알리는 1953년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 땅에 발을 붙인 무함마드 알리 왕족이었다. 현재 푸아드 2세가 73세의 고령이기에, 그가 복위하지 못한 채로 사망한다면 모하메드 알리가 왕위 요구자이자 무함마드 알리 왕실의 당주가 될 것이다. 모하메드 알리는 아프간 (바라크자이) 왕실의 공주이자 모하마드 자히르 샤의 손녀인 노알과 결혼해 아들 푸아드 자헤르 하산을 얻었다.
[1867~1914] [2] 명목상으로는 1899~1953까지도[3] 한국사로 대비하면 같은 전주 이씨 왕조가 조선과 대한제국의 두 정치체 모두를 통치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4] 따라서 해당 시기의 군주들은 모두 이름에 오스만 제국의 고관에게 주어지는 '파샤' 칭호가 들어간다[5]
[1867] [1922] [초대] [2대] [6대] [9대] [3대] [4대] 공식 발표에서는 병사로 공표됨[8대] [5대] [7대] [10대] 다만 아들 푸아드 2세는 부친의 사인이 이집트 정부의 암살에 의한 것이라 의심한다[18] 움베르토 2세는 부친과 달리 포르투갈로 망명했다[19] 여담으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왕위를 잃은 팔라비 2세 역시 이집트로 망명해 1년 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