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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05 14:27:35

미틸레네의 테오파네스

이름 미틸레네의 테오파네스
(그리스어: Θεοφάνης ὁ Μυτιληναῖος)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역사가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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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 출신 역사가.

2. 행적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출신으로, 아버지는 키에로이타스였다. 기원전 80년대에 폰토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침략에 맞선 항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67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해적 토벌을 위해 미틸레네를 해군 기지로 삼았을 때 이에 가담했고, 폼페이우스의 해적 토벌전에서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스트라본은 그가 성실함과 좋은 품성을 보이면서 폼페이우스의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며, 폼페이우스의 모든 일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폼페이우스는 테오파네스로부터 레스보스 섬을 포함한 동방의 관습, 문화, 지형에 대한 많은 유용한 정보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테오파네스는 폼페이우스의 원정사를 집필하고 그 대가로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테오파네스가 집필한 폼페이우스의 원정사가 왜곡된 부분이 많으며 폼페이우스 정적들의 평판을 해칠 목적으로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줘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키케로는 절친한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많은 편지에서 테오파네스를 언급하면서, 자신과 폼페이우스간의 교류를 위해 테오파네스에게 의존했으며, 테오파네스가 폼페이우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한 키케로는 테오파네스가 로마의 정치적 상황과 폼페이우스의 입장을 모두 잘 알고 있다고 여겼다.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게 되었을 때, 키케로는 테오파네스에게 폼페이우스가 로마를 떠나 히스파니아로 가지 않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실제로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에 부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를 보내 자신 대신 통치하도록 하고 본인은 로마에 남았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한 폼페이우스는 한 요새에서 자살한 미트리다테스 6세 소유의 서류를 발견했다. 이때 당시 동방에서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소아시아에 체류 중이었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을 학살하라고 촉구하는 서신이 발견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을 보내 루푸스를 죽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서신이 폼페이우스의 아버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오랜 적이었던 루틸리우스 루푸스를 미트리다테스 6세와 연루시켜 폼페이우스를 흡족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테오파네스의 악의적인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테오파네스가 폼페이우스에게 이집트에서 쫓겨난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키기를 권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에 따랐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은 것에 보답하고자 테오파네스의 고향이며 기원전 79년 로마에 맞섰다가 속주로 전락해버렸던 미틸레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에 미틸레네 시는 테오파네스를 구세주이자 후원자이며 도시의 두번째 설립자로 칭송하는 비문을 세웠으며, 훗날 테오파네스가 사망한 뒤에는 도시의 수호신으로 신격화했다. 이 비문에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테오파네스'라고 명기되었는데, 이는 테오파네스가 시민권을 받은 뒤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로 확고하게 들어갔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한 뒤 어느 곳으로 망명할 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을 때 여러 사람이 파르티아로 망명하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테오파네스는 파르티아는 로마의 명백한 적인데 그들에게 망명하는 것은 지극히 수치스럽고 비 로마적이며, 파르티아인들은 위험한 종족이라서 폼페이우스의 고귀한 아내 코르넬리아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면서, 지난날 폼페이우스에 의해 복위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현재 파라오로 군림하고 있으니 이집트로 망명한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의견에 따라 파르티아 대신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테오파네스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군림한 시기에 테오파네스를 신격화하는 비문이 미틸레네에 세워진 것을 볼 때 그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