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미하일 로자노프 (Михаил Лозанов/Mihail Lozanov) |
생년월일 | 1911년 6월 15일 |
사망년월일 | 1994년 12월 3일 (향년 83세) |
국적 | 불가리아 |
출신지 | 차르넬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75cm / 77kg |
소속팀 | PFC 레브스키 소피아 (1930-1935) SK 모라브스카 슬라비아 브르노 (1935-1936) PFC 레브스키 소피아 (1936-1937) FC 바이에른 뮌헨 (1937-1939) PFC 레브스키 소피아 (1939-1941) |
국가대표 | 38경기 / 10골 (1931-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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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로자노프는 페르니크 인근의 차르넬[2](Tsarnel)에서 태어나 9살 때부터 형제 토도르와 SC 크라크라 페르니크(SC Krakra Pernik)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소피아로 이사를 가면서 자신의 축구 커리어 대부분을 보낼 PFC 레브스키 소피아에 입단하게 되었다.로자노프는 레브스키에서 아센 판체프(Asen Panchev), 아센 페셰프(Asen Peshev)와 공격 트리오를 이뤘다. 그러던 1935년, 로자노프는 학업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르노로 건너가 SK 모라브스카 슬라비아 브르노(SK Moravská Slavia Brno)에서 1년을 보낸 후 다시 소피아에 왔다.
1937년에는 토목공학 공부를 위해 뮌헨 공과대학교에 입학, 2년을 수학했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에 입단, 루트비히 골트브루너, 야코프 슈트라이틀레 등 바이언의 초기 레전드들과 함께 2년간 활약하기도 했다. 물론 이 시기의 바이언은 지금처럼 독일을 대표하는 강팀이 아니라 독일 챔피언십에까지 들어가진 못하고 가우리가 바이에른에 참가하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이 시기 로자노프는 바이언에서 주장으로 경기에 참여하기도 할 정도로 구단에서 인정받는 선수였다.
1939년에 다시 불가리아에 돌아온 로자노프는 1941년에 은퇴할 때까지 레브스키 소피아에서 활약했고 총 7시즌동안 79경기에 출전, 43골을 넣었다.[3]
2.1.2. 국가대표
로자노프의 불가리아 대표팀 데뷔전은 1931년 4월 19일의 발칸 컵 유고슬라비아전이었고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에 0대1로 패했다.로자노프는 불가리아 대표팀으로 이탈리아 월드컵과 프랑스 월드컵 지역예선에 참가했지만 1934년에는 분더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1938년에는 전대회 준우승팀 체코슬로바키아가 같은 조에 걸렸다. 불가리아의 전력을 한참 뛰어넘는 팀들과의 싸움이라 결과는 뻔했고 불가리아는 월드컵 본선에 참가하지 못했다.
로자노프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1939년 10월 22일의 독일전이었고 불가리아는 1대2로 패했다. 로자노프는 대표팀에서 총 38경기 출전, 10골을 기록했다.
2.2. 이후
로자노프는 은퇴 후 토목공학 전공을 살려 페르니크에서 광산 기술자로 일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탱크라 불리던 강력한 포워드. 강력한 슈팅으로 이름 높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슈팅으로 크로스바가 부러진 적도 있다고 한다.4. 수상
4.1. 클럽
- 불가리아 주 축구 챔피언십 우승 2회: 1933, 1937(PFC 레브스키 소피아)
- 불가리아 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9-40(PFC 레브스키 소피아)
4.2. 국가대표
- 발칸 컵 우승 2회: 1932, 1935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현재는 률린(lyulin)으로 불린다.[3] 당시 불가리아 리그는 1937년까지 토너먼트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79경기 출전은 결코 적은 출장 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