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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23:29:43

민영은

閔泳殷

1870년(고종 7) 8월 3일 ~ 1944년 1월 20일[1]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일제강점기 때의 충청북도 지역 유지이자 갑부. 그리고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이다. 본관은 여흥(驪興)[2], 자는 백경(伯敬), 호는 금오(錦吾)이다.

청주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갑부이며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 되어서 기업가로도 활동했다.

2. 생애

1870년 8월 3일 충청도 청주목 북강내일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내수리[3]에서 아버지 민영호(閔英鎬)와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연일 정씨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외동딸 하나 있는 큰아버지 민충호(閔忠鎬)와 한산 이씨 부부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896년 2월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음서로 1902년 3월부터 1908년 10월까지 충청북도 괴산군·연풍군·보은군·음성군·청안군·진천군·충주군·청주군 등지의 군수 또는 군수서리와 충청북도관찰사 서리 등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1911년 3월부터 청주금융조합 조합장을 역임하고, 같은 해 7월부터 충청북도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5월 충청북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19년 4월 3.1 운동의 확산을 막고자 청주자제회(淸州自制會)를 발기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20년 12월 민선 충청북도 도평의회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4월 충청북도 도평의회원에 관선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충청북도 도평의회원에 다시 뽑혔다. 1930년 4월 충청북도농회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1933년 1월 충청북도 도회의원 보궐선거와 같은 해 5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관선으로 당선된 후 충청북도회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충청북도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조선금융조합연합회 참여(參與)·시중회 평의원 등을 지냈다. 1937년 5월 관선 충청북도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 충청북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을 맡았으며, 8월에는 애국기(愛國機) '충북호' 건조를 위해 1만 원을 헌납하였다. 1938년 4월 매일신보사 감사에 취임하였다.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등 각종 전쟁협력단체 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렇듯 해방 2년 전인 1944년 죽을 때까지 친일 행세를 하다가 사망했다.

3. 여담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다이쇼 덴노 즉위식에 친일파 자격으로 천황 즉위식에 참여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당시 다이쇼 덴노 앞에서 '천황폐하의 즉위를 축하드리며 만수무강하시고 옥체 보존하시어 장수하소서'라든가 '천황폐하의 황은(皇恩)과 성은에 감복하여 일개 미천한 놈이 천황폐하를 뵙게 되어서 감읍하였나이다'라고 망언을 퍼붓는 등 '일제를 찬양하는 매국노'였음을 인증하였다.

2013년 민영은의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땅을 돌려달라며 청주시에 소송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소송에서 승소했다.

[1] 음력 1943년 12월 25일.[2] 감찰공파 28세 영(泳) 항렬.[3] 인근의 신안리·원통리·입동리·입상리와 함께 여흥 민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