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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 제국 제7대 페슈와 바지라오 1세 Bajirao I | |
<colbgcolor=#FF9700><colcolor=#fff,#fff> 이름 | 바지라오 발랄 Bajirao Ballal |
출생 | 1700년 8월 18일 |
마라타 제국 신나르 두베레 | |
사망 | 1740년 4월 28일 (향년 39세) |
마라타 제국 라웨르케디 | |
재위 기간 | 마라타 페슈와 |
1720년 4월 17일 ~ 1740년 4월 28일 | |
전임자 | 발라지 비슈와나트 |
후임자 | 발라지 바지라오 |
부모 | 아버지 : 발라지 비슈와나트 어머니 : 라다바이 바르베 |
종교 | 힌두교 |
서명 |
[clearfix]
1. 개요
- 생몰: 1700년 8월 18일 ~ 1740년 4월 28일
- 집권: 1720년 4월 27일 ~ 1740년 4월 28일
18세기 마라타 동맹의 대팽창을 이끈 명장. 직급을 붙여 페슈와(पेशवे)[1] 바지라오(बाजीराव पहिला)라고도 불린다. 비슷한 시기 나디르 샤를 이란의 나폴레옹이라 한다면 바지라오는 남인도의 나폴레옹이라 할 수 있다.
2. 생애
2.1. 시대 배경 : 무굴 제국의 쇠퇴
1660년대, 무굴 제국 황제 아우랑제브의 억압적인 통치에 반발한 시바지 본슬레가 힌두교도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푸네와 수라트가 함락되었고 1674년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니, 마라타 동맹의 성립이었다. 북인도의 반란들을 평정한 아우랑제브는 1686년, 마라타 동맹을 멸망시키는 목적으로 무려 70만 대군을 소집해 남하하며 20여년에 걸친 양국간의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1689년에 마라타의 2대 차트라파티 삼바지가 잡혀 잔혹히 처형되었음에도 그의 동생 라자람이 3대 차트라파티가 되어 항전을 이어나갔다. 한편, 삼바지의 어린 아들 샤후는 20여년간 무굴 측의 포로 신세였다.며느리 타라바이가 공세를 버텨내었고 때론 반격에 나서 보팔까지 진군하며 무굴 제국의 마라타 정복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리고 1706년, 말와 대전에서 마라타 군대에게 패배한 아우랑제브는 후퇴 도중인 1707년 2월에 병사하였다. 엄청난 규모의 돈과 군대를 쏟아부었음에도 패배한 무굴 제국은 기근까지 겹치며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었다.[2]
2.2. 페슈와가 되다
바지라오는 1700년에 콘칸[3] 지방의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발라지[4]는 마라타의 페슈와(대재상) 직을 역임하며 무굴 제국과의 전쟁을 치렀다.1720년 4월 12일, 아버지인 마라타의 페슈와 발라지 비슈와나트가 사망하고, 약간 20세의 아들인 바지라오가 재상이 되었다. 그 세습은 마라타의 차트라파티 샤후 1세에게 인정된 것이었다.
바지라오는 20세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용과 지략에 매우 뛰어나 병사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2.3. 마라타의 확장
힘의 균형을 마라타 쪽으로 돌려놓은 것은 18세기 전반기 마라타의 세습직 페슈와(대제상)였던 바지라오 1세를 비롯한 걸출한 장군과 관료들이었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페슈와의 자리에 오른(1720년) 바지라오 1세는 그로부터 20년 동안 마라타의 군대를 이끌고 전역을 계획하면서 마라타의 영토와 영향권을 크게 넓혔다. 바지라오 1세가 노련한 니잠[5] 아사프 자흐 1세를 팔케드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제압한 것을 시작으로, 말와 남부, 분델칸드, 구자라트 등지에서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을 무렵이 되면 마라타는 어엿한 중북부 인도의 제국이 되어 있었다. 강성해진 마라타에 비해 여러 내외 사정으로 약체화된 무굴 제국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마라타군에 맞섰으나 1737년의 보팔 전투와 델리 전투에서 바지라오 1세의 군대에게 연패당했다. 심지어 바지라오와 그의 군대는 무굴 제국의 수도이자 핵심 도시인 델리까지 쳐들어갔지만 무굴 제국이 끝까지 거세게 저항하여 결국 델리 함락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수도 델리 근교가 마라타군에게 약탈당하였고, 무굴 제국은 군사적 능력을 상실한 채 마라타에 전쟁 배상금과 영토를 뜯기는 신세로 전락했다.2.4. 마라타의 젊은 영웅 쓰러지다.
그러나 끊임없는 전투들은 바지라오의 몸과 건강을 악화시켰고, 결국 1740년 4월 28일에 열사병으로 쓰러져 바지라오 1세는 향년 40세라는 젋은 나이에 사망했다. 마라타의 영토를 10배나 넓힌 인도사에서 손에 꼽히는 정복자의 허망한 죽음이었다.[6]그리고 바지라오 1세의 아들 발라지 바지라오가 마라타의 새로운 페슈와가 되었다.
3. 평가
마라타 제국의 영토를 10배 가량이나 확장시킨 명재상이자 명장이다.20세의 젊은 나이에 집권하여 40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총 43차례의 전투에서 무패를 기록했다.
세계 전쟁사에서 역대급 기병명장을 언급할 때 아시아 대표로 나올 만큼 뛰어난 기병명장이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에르빈 롬멜을 이길 때 바지라오를 연구해서 롬멜의 약점을 파악했을 정도였다.
4. 여담
바지라오 1세는 이순신처럼 개인적인 일기와 군사들 간에 주고받은 편지들 덕분에 연구가 어려운 인도사에서도 연구하기 수월한 인물이다.5. 매체
[1] 대재상[2] 무리한 전쟁으로 인해 무굴 제국에서 약 2백만이 아사했다고 한다. 거기다 옆동네 누군가가 씨게 쥐어팬 덕분일지도....[3] 인도 서해안의 푸네 일대.[4] 생몰: 1662년 ~ 1720년[5] '영역의 통치자'라는 뜻의 니잠 울물크의 약칭으로,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창업군주인 카마루딘 칸이 무함마드 샤로부터 독립하면서 니잠이라는 칭호를 칭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하이데라바드 왕국 군주의 호칭으로 굳어졌다.[6] 만약 바지라오가 이 해 병사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아서 델리를 공격하였다면 무굴제국은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다. 1년전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델리의 보물 약탈과 시민들의 살육 그리고 국고 소진, 병력 상실로 인해 국력이 쇠락한 무굴 제국은 대제국으로서의 전 인도의 통제력을 상실해버리고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인 무함마드 샤 또한 충격으로 쇠약해져갔고 수습할 여력조차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