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06 22:19:19

바클라이 드 톨리

미하일 보그다노비치 바클라이 드 톨리
(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
파일:Barclay_de_Tolly_(Dawe).jpg
<colbgcolor=#FFCC33> 출생 1761년 12월 27일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샤울라이주
(現 리투아니아 셰울레이 주 셰울레이)
사망 1818년 5월 14일 (향년 56세)
프로이센 왕국 동프로이센 인스텐부르크
(現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체르냐홉스크)
작위 공작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군사 경력 【 펼치기 ㆍ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CC33>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771 ~ 1818년
최종 계급 원수
주요 참전 1787-1791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788-1790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코시치우슈코 반란
나폴레옹 전쟁
주요 서훈 성 게오르기 훈장 }}}}}}}}}

1. 개요2. 출생과 그의 군 경력3. 1787년-1791년 러시아-튀르크 전쟁4. 1788-1790년 러시아-스웨덴 전쟁5. 코시치우슈코 반란6. 1805년-1807년 나폴레옹 전쟁7. 1808-18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8. 1812년9. 1813~1814년 전역10. 1815년과 말년11. 쿠투조프와 바클라이

[clearfix]

1. 개요

미하일 보그다노비치 바르클라이 데 톨리 (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 1761년 2월 16일 ~ 1818년 5월 14일)은 러시아 원정제6차 대프랑스 동맹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육군 원수이자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는 이 시기 동안 육군의 보급 체계를 개선하고, 육군 병력 수를 두배로 증강시켰으며 새로운 전투 훈련 원칙을 적용하는 등 여러 군 개혁을 실행했다. 그는 또한 핀란드의 총독이기도 했다.

2. 출생과 그의 군 경력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라이 드 톨리는 아주 오래된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 출신이며 그의 조상은 17세기에 쿠를란트-젬갈렌 공국 리보니아 지역의 리가 시에 정착하였고 그는 1761년 은퇴한 중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76년에 그는 프스코프 기병 연대에 입대했다. (러시아에서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어린 나이에 연대에 입대하는게 보통이었다.)

1786년부터 그는 핀란드 추격병 군단에 복무하였고 중위 시절 앙갈트-베른부르크 대공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788년에 대위로 승진했다.

3. 1787년-1791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그는 1787-1791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처음으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포템킨 타우리체스키 대공의 지휘 하에 2등 소령으로 참전하여, 1788년 12월 6일 오차코프 포위전에 참여하여 4급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듬해, 바클라이는 9월 13일 커우셰니(Căușeni) 요새전과 아케르만벤데르(Bender)에서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4. 1788-1790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1790년 바클라이는 핀란드군에 편입되어 소령으로 핀란드 전역에 참가했다.
그의 군대는 길이 드물고 수많은 호수와 숲 및 늪이 도사린 전선에서 스웨덴과 싸워야했다. 바클라이는 4월 19일 Kerkinossky 요새 공방전에서 전투를 치렀다.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인 1791년 9월 2일에 그는 엘레오노라 폰 슈미텐(Eleonora von Smitten)과 결혼했다.

5. 코시치우슈코 반란

1794년 바클라이가 이끄는 대대는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일으킨 폴란드의 무장 봉기를 진압하고 빌노를 습격하는 데 참여했다. 바클라이는 4급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고 프라하와 바르샤바 점령에도 참여하여 중령의 지위를 얻었다. 1794년 12월 14일 그는 1789년에 제4 경기병 연대로 개명된 에스토니아 경기병 군단의 제1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대령으로 승진하여 이듬해 소장으로 승진했다. 1801년에 제4 경기병 연대는 제3 경기병 연대로 개편되었고 바클라이가 연대장이 되었다.

6. 1805년-1807년 나폴레옹 전쟁

1805년 전역 초기에 바클라이 드 톨리의 제3 소총병 연대는 레온티 베니히센 제2군 소속으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주력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을 통과하는 도중에 그들은 아우스터리츠에서 연합군이 대패하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후퇴 할 수 밖에 없었다. 1806년 9월에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대한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군이 패배한 후 베니히센 장군이 러시아군을 이 전역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바클라이는 풀투스크 전투(1806년 12월 26일)에서 바클라이는 3개의 보병 연대, 텐진스크 소총병 및 울란 연대와 함께 오른쪽 측면에 있었다. 그는 프랑스군 종대의 맹렬한 공격을 견디며 반격했다. 1807년 초 바클라이는 좌익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얀코보와 란트스베르크(1807년 1월 12~22일)에서의 전투에서 바클라이는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을 방어했고 베니히센의 주요 군대가 아일라우에서 집결할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월 26일부터 27일까지 바클라이는 필사적인 프랑스 공격으로부터 아일라우를 방어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 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는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메멜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4월 초 알렉산드르 1세는 메멜에 있는 병원에 방문하였고 바클라이와 접견하여 1급 성 안나 훈장과 2급 성 블라디미르 훈장을 수여하였다.
1807년 4월 말, 바클라이는 6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으로 승진하였지만 여름에 바클라이는 치료를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7. 1808-18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1808년 5월 바클라이는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웨덴과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핀란드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싸웠고 7월 7일 쿠오피오 마을을 점령했다. 그러나 여름이 끝날 무렵 병으로 인해 바클라이는 군단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야 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바클라이를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이듬해 3월 바클라이는 사령관으로서 핀란드로 복귀했다. 3월 7~9일간 러시아군은 바클라이의 계획에 따라 유빙을 타고 보트니아만을 건너 우메오에 상륙했다. 선봉대가 우메오에서 약 1km 떨어져 있을 때 스웨덴 총사령관 크론슈타트 백작으로부터 사절이 도착하여 협상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바클라이는 스웨덴 총사령관 크론슈타트 백작이 자신의 본부에 와서 전투를 중단하도록 요청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서 아주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그는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크론슈타트 백작과 맺은 평화조약에 따라 우메오와 스웨덴 왕국의 1/3에 가까운 영역이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이 공로로 바클라이는 핀란드의 러시아 육군 총사령관과 핀란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8. 1812년

1812년 바클라이는 서부 제1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군대는 빌노에 본부를 두었고 6개의 보병 군단으로 구성되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침공할 장소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러시아 총사령관은 러시아 제국의 거의 모든 서부 국경을 따라 군대를 배치 했다.

그리고 6월 12일 나폴레옹의 군대는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의 침공 당시 러시아 군대는 800 versts(1verst=3500 피트) 공간에 흩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바클라이가 일반 전투에 대해 생각했지만 나폴레옹의 정예군의 수가 러시아 사령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바클라이의 제1서부군은 스몰렌스크로 후퇴했고 제2 서부군의 사령관 표트르 바그라티온도 바클라이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7월 22일 양군은 스몰렌스크에서 만났다.

나폴레옹의 원정군은 8월 5일에 스몰렌스크 인근까지 왔고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치열한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지만 러시아 군대는 사수 할 수 있었다.

표트르 바그라티온은 바클라이가 스몰렌스크를 사수하도록 설득했지만 결국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8월 7일 러시아군은 결국 스몰렌스크에서 철수했다. 이 후퇴는 바클라이에 대한 격렬한 불만을 불러 일으켰고 주변에서 우유부단한 인물이라던지, 반역자라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이에 바그라티온은 바클라이를 싫어했고 그를 불신하였다. 그는 바클라이에 대해 좋게 이야기 할 수 없었고 바클라이의 활동에 대해 알렉산드르 1세에게 항의하는 보고서를 보냈다.

같은 이야기가 다른 장군들 사이에서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장군들은 바그라티온과 바클라이 사이의 끊임없는 적대감에 대해 걱정했다.

그리고 8월 5일 알렉산드르 1세가 바클라이를 해임하고 미하일 쿠투조프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한 특별 위원회를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쿠투조프는 당시 67세였다.

쿠투조프는 매우 영리하고 유능한 장군이었고 이 전쟁에서 바클라이의 전술이 가능한 유일한 것임을 매우 분명하게 깨달았고 그것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쿠투조프 임명 직후 그는 스몰렌스크 이전에 그가 지휘했던 러시아 군대의 해당 부분의 사령관으로 바클라이를 지명했고 바그라티온은 자신의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바클라이는 러시아 군대의 중앙과 우익을 지휘했고 그의 냉철한 지휘에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미셸 네 원수와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 군대의 공격을 받고 기병대와 함께 프랑스 군대의 좌익을 공격했으며 나폴레옹이 주력과 함께 러시아 군대의 중앙을 공격하기 위해 돌진했을 때 바그라티온을 돕기 위해 왔다.

그는 마지막 예비대를 지원하러 혼자서 기병대를 이끌었고 이윽고 그들 앞에 프랑스 기병대가 돌격해 오고 있었다. 그는 기꺼이 맞서 싸웠다.

이날 그의 산하에 말 다섯 마리가 죽었고 그의 부관과 장교 두 명이 전사하고 일곱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그의 모자와 망토가 총에 맞았다. 그의 제복은 피로 물들었고, 두 번이나 포로로 잡힐 뻔했다.

이렇게 열심히 싸운 바클라이는 9월 21일 쿠투조프에게 병 때문에 군대를 떠나겠다는 보고를 하고 수리가 되어 블라디미르로 떠났다.

바클라이는 11월 말까지 블라디미르에서 머물렀고, 이후 Beckhof로 가기로 결정했고, 그 후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 그곳에서 알렉산드르 1세의 생일에 그는 겨울궁전에 왔지만 그곳에서 환영 받지못했다.

그러나 이날 바클라이는 차르로부터 편지를 받았고, 편지의 내용에는 바클라이에게 군에 복귀하도록 설득하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후 바클라이는 라트비아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 달 동안 요양하였고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빌노로 갔다.

9. 1813~1814년 전역

바클라이는 1813년 차르에게 다시 사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1월 31일 그는 알렉산드르 1세가 ​​병에 걸린 바실리 치차코프 제독 대신 바클라이를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는 쿠투조프로부터 통보 받았다. 하지만 4월 17일 쿠투조프가 사망하고 비트겐슈타인 백작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4월 말에서 5월 초에 뤼첸과 바우첸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고, 나폴레옹의 승리와 연합군의 후퇴로 끝났다.

뤼첸 전투와 바우천 전투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실책으로 연합군 러시아-프로이센 총사령관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5월 17일 바클라이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다.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참전한 후 연합군은 보헤미아군, 슐레지엔군, 북부군의 세 군대로 재편되었다

바클라이는 모든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보헤미안 육군 사령관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지휘를 받았다. 바클라이는 러시아와 프로이센 군단(126,000명)으로 구성된 육군 예비군을 지휘했다. 8월에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드레스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연합군은 테플리츠로 후퇴했다. 보헤미아군의 선봉대를 지휘하던 바클라이는 드레스덴 동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테르만-톨스토이 장군에게 방담 장군의 프랑스군이 테플리츠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연합군의 후방을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방담 장군의 첫 번째 공격은 쿨룸 근처의 오스테르만-톨스토이의 지휘하에 러시아 군이었다. 다음날 아침. 바클라이는 전투를 지휘하는 쿨름에 왔다.

이 전투에서 방담 군단(약 12,000명)은 포로가 되었다. 쿨룽 전투는 바클라이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9월 중순에 모든 연합군이 라이프치히로 진군했고 나폴레옹의 주력군도 그곳에 접근했다.10월 4일 아침, 바클라이의 부대는 3열로 구성된 오른쪽 측면에 머물렀다. 첫 번째 줄에는 비트겐슈타인의 군단이 있었고 두 번째에는 라옙스키 군단이 있었고 세 번째 줄에는 콘스탄틴의 지휘하에 예비군이었다.

바클라이의 군대는 와하우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나폴레옹의 주력부대를 공격하여 라이프치히로 돌려보내야 했다.

첫 전투에서 러시아-프로이센 군대는 와하우와 클레베르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와하우 너머로 약 100문의 대포를 집결시켜 바클레이의 군대에 발포했고 동시에 프랑스 보병이 공격에 돌입했다. 바클라이는 와하우를 공격하는 군대를 지원하는 라옙스키의 군단을 전진시켰다.

나폴레옹은 그의 기병대 대부분을 라옙스키의 척탄병 부대에 진격시켰지만 척탄병들의 방진형 때문에 프랑스 기병대를 격퇴했다. 바클라이는 라옙스키를 도우려고 경기병 부대를 그에게 보냈지만 이 부대는 도착하기도 전에 프랑스 기병대에게 분쇄되었다.

그런 다음 나폴레옹의 옛 근위대가 공격에 돌입했고 바클라이는 중기병과 러시아 및 프로이센를 상대로 선전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약해졌지만 연합군은 결정적인 전과를 얻지 못했다.

다음날 전투가 재개되었다. 바클라이 부대의 주요 공격은 Probetgate 마을에 머물고 있던 빅토르와 로리스톤의 프랑스 군단에 대한 것이었다.

전투는 거의 하루 종일 계속되었지만 바클라이의 군대는 이 요새화된 마을을 점령할 수 없었다.

10월 7일 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로 후퇴하고 도시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개시하였지만 바클라이의 병력은 투입되지 않았다.
러시아 원정 혹은 조국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원정군은 60,000명이 넘는 사상자와 20,000명의 포로, 325문의 대포를 손실하였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바클라이는 백작 작위를 받았다. 10월 24일 바클라이의 군대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입성하였고, 1814년 1월 1일 라인강을 건너 바젤에 입성했다.

그리고 여기서 연합군이 다시 재편성되었고 바클라이는 러시아, 프로이센 및 바덴 군단으로 구성된 보헤미아 육군, 예비군 일부가 통합된 사령관이 되었다. 2월 초에 연합군 본부에서 전략회의가 열렸고 바클라이는 계속해서 적의 추격을 선언했으며 장군 대부분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가 파리로 가자고 제안했을 때 더 이상 모든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3월 19일 아침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그리고 이날 바클라이는 야전 원수의 계급을 받았다.

4월 2일 그는 콘스탄틴에게 자리를 내주고 블뤼허 원수를 대신해 슐레지엔 군대의 지휘를 맡았다 5월 바클라이는 알렉산드르 1세의 영국 여행에 동행했다.

1814년 여름에 그는 다시 6개의 보병 군단으로 구성된 제1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육군의 본부는 바르샤바에 있었다

10. 1815년과 말년

바클라이는 1815년 2월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프랑스로 돌아와 백일천하가 시작되었을 때 바르샤바에 있었다. 그해 4월 바클라이는 군대(225,000명)를 이끌고 프랑스를 향해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군대가 갈리시아, 보헤미아, 독일을 통과했을 때 그들은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의 승리에 대한 전갈을 받고 그는 전쟁에서의 활약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게 되었다. 여태껏 풍부한 군경험을 사용하여 바클라이는 "The Rules of Loose Order Or Manual About Scattered Actions Of Infantry For Chasseur Regiments"를 출판하여 훗날 이 책은 러시아 군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바클라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알렉산드르 1세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 수리와 관절염 치료를 위해 휴가를 줄 것을 요청했다. 차르는 그에게 2년 동안의 휴가를 주었고 4월 말에 바클라이의 가족은 베코프(Beckhof)를 떠났다. 졸벤(Solben)에 있는 그의 새 영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들은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날이 건강이 나빠지고 흉통이 심해지는걸 느꼈다. 이로 인해 메멜, 리가 및 틸지트를 가는 일정을 중단하였다. 5월 13일 인스텐부르크에서 바클라이의 주치의는 슈틸리첸(Shtilitzen)에서 요양 할 것을 주장했지만 그날 바클리이가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보고 받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즉시 슈틸리첸에 근위대를 파견하도록 명령하였고, 그의 운구를 호위하여 러시아 국경으로 옮겼다.

11. 쿠투조프와 바클라이


쿠투조프는 뛰어난 전술가. 젊었을 때 용맹하고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최고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가 젊은 시절 루먄체프에서 심한 인간적 모욕을 받았고 그 이후로 내성적이고 사람들을 불신하게 바뀌었다. 결국 그는 책임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항상 모든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고 했다.

한편 바클라이는 알렉산드르 1세에게 환심을 사게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승리를 얻기 위해 무의미한 희생을 치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겨 이러한 명령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눈밖에 나서 승진이 느렸다. 그래서 바클라이는 부하들을 전투상보에서 나오는 영혼 없는 인물이 아니라 한명의 인간으로 상대했기 때문에 그의 휘하의 장교와 병사들로부터 매우 인기 있고 존경을 받았다. 반대로 궁정과 고위 장성들 사이에서 그를 항상 낙동강 오리알 존재로 여겼다.

바클라이는 바그라티온과 쿠투조프처럼 조지아의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의 왕자라는 명성있는 혈통, 수도를 뿌리로 둔 귀족 가문 같이 자랑할 만한 혈통이 없었다. 수많은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고위 직책을 맡아서 그들의 이름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조상은 멀디 먼 스코틀랜드에서 이민을 왔고 귀족이라지만 타지 출신이라는 점에서 '바클라이 드 톨리'라는 이름과 인물은 러시아인들의 귀에 매우 이상하게 들리고 굴러들어온 돌 같은 존재로 여겼지 때문에 종종 차별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차별대우를 감수하고 바클라이는 조국전쟁에서 가장 힘든 부분을 짊어졌다. 러시아가 막대하고 무의미한 손실 없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전술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바클라이였다. 그러나 그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령과 건강상 이유로 전쟁장관과 러시아군 총사령관직에서 자의 반 타의 반 해임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바클라이를 고도로 숙련된 장군, 현명한 전략가, 매우 영리하다고 평가했지만 나폴레옹을 두려워한 귀족 지도자들의 압력에 의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세계에서 바클라이는 영원한 이방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