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공화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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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공화국 제3대 대통령 바하루딘 유숩 하비비 Bacharuddin Jusuf Habibie[1] | |
<colbgcolor=#C13130><colcolor=#ffffff> 출생 | 1936년 6월 25일 |
네덜란드령 동인도 술라웨시 파레파레 (現 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 주 파레파레) | |
사망 | 2019년 9월 11일 (향년 83세)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 |
사저 | 보고르궁(Istana Bogor, 보고르) 독립궁(Istana Merdeka, 중앙자카르타) |
재임 | 인도네시아 제3대 대통령 |
1998년 5월 21일 ~ 1999년 10월 20일 | |
인도네시아 제7대 부통령 | |
1998년 3월 11일 ~ 1998년 5월 21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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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학자, 인도네시아 7대 부통령, 3대 대통령.술라웨시섬 남술라웨시주의 중소도시 파레파레(Parepare)에서 부기스-고론탈로[2]계 농학자 아버지와 자바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자바, 술라웨시 남부, 술라웨시 북부의 혈통을 모두 가진 혼혈이다.
이런 출신 배경은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종족적으로 자바-발리계 혼혈이었던 사실과 비교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정치적으로 비교적 소외받는 고론탈로 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각별히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부인인 하스리 아이눈 하비비(Hasri Ainun Habibie)는 인도네시아 대학교를 졸업한 의사였으며, 그녀와는 1962년에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일함 악바르 하비비(Ilham Akbar Habibie), 타렉 케말 하비비(Thareq Kemal Habibie) 2남을 두었다.
2. 교육 및 연구
반둥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항공우주공학 공부를 위해 유럽 유학을 가려고 중퇴하고,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 델프트 공과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50년대 수카르노가 주도하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네덜란드령 뉴기니의 귀속 문제로 네덜란드와의 외교 관계가 극악으로 치닫자, 하비비는 델프트 공대에서 중퇴하고 독일로 옮겨 가 라인 베스트팔렌 아헨 공과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이곳에서 1960년 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1965년 우수한 평을 받으며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박사 논문의 제목은 "이방성 캔틸레버 디스크의 온도 응력에 대한 기여(Beitrag zur Temperaturbeanspruchung der orthotropen Kragscheibe)"였다. 지도교수 한스 에브너(Hans Ebner)는 하비비가 학계에 남아 연구 주제였던 열탄성(thermoelasticity) 연구를 지속하면서 교수 자격 시험을 준비하고 실적을 쌓아 아헨 공대 교수로 지원할 것을 권했지만, 실제로 항공기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싶었던 하비비는 산업체로 취직 방향을 정했다.
이후 여러 곳을 알아보다 오늘날 에어버스의 모체가 된 기업 중 하나인 함부르크 소재 항공기 제조사 MBB(Messerschmitt-Bölkow-Blohm)에 연구원으로 입사해 연구를 지속하며 에어버스 A300B 개발을 맡았고, 1974년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독일에서 공학 연구자로 있을 당시에는 항공공학 등 분야에서 하비비의 이름이 붙은 '하비비 정리(Habibie theorem)', '하비비 방식(Habibie method)' 등을 만들며 초기 항공공학 발전에 기여했다. MBB 시절 쓴 유명한 논문으로는 특히 균열 전파의 진행 과정을 예측하는 것들이 있었다.
1988년, 아헨 공대는 하비비와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해 하비비를 아헨 공대의 '명예 시민(Ehrenbürger)'으로 선정했다.
3. 기술관료로서
독일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며 인정받던 하비비였지만, 197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가 조국의 산업화와 기술 발전을 위해 하비비에게 귀국할 것을 권했다. 여기에 응한 하비비는 독일 생활을 접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연구기술부 장관, 기술평가응용청(BPPT) 청장 등을 지내며 기술관료로서 인도네시아 항공 산업의 기틀을 닦았다.하비비가 인도네시아에 돌아오고 2년이 지난 1976년, 대통령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항공기 제조사 IPTN을 설립해 하비비에게 CEO를 맡겼다. 하비비가 지휘하는 IPTN은 1980년대부터 헬리콥터와 소형기를 제조하며 성장했고, 유럽 기술 선진국들과의 기술 협력으로 SA 330 퓨마, CN-235 등을 생산하기도 했다. IPTN은 1990년대에는 자체 설계 역량도 어느 정도 축적해, 기념비적인 터보프롭 여객기 IPTN N-250을 자체 설계하고 1995년 처음으로 시제기를 생산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어진 아시아 금융 위기로 추가 개량 등 후속 개발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빈약한 기반에서 개발과 생산 역량을 쌓아올려 20년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1998년 3월, 수하르토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하비비는 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아시아 금융 위기로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가 동시에 가중되면서 동년 5월 수하르토가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굴복해 사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부통령이었던 하비비가 다소 급작스럽게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4. 대통령으로서
하비비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는 야당, 민주화 세력, 시민 사회, 종교계의 개혁 요구가 드높았던 때였다. 엔지니어이자 기술관료로 출중한 경력을 쌓은 하비비는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골카르에 당적을 올린 것 외에는 무색무취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가 어떤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할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비비는 취임 직후부터 조기 선거를 약속하고, 주요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논란이 되었던 수하르토 시대의 법률들 일부를 폐지하여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조기 대선이 시행되기까지 1년 5개월 동안 이어진 하비비의 재임기는 인도네시아가 수하르토 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고 개혁 시대(Era Reformasi), 즉 민주화 시대로 나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과도기에 해당했다. 비록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수하르토 신질서 시대의 제도적 장치들이 본격적으로 제거된 것은 후임 대통령 압두라만 와힛과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시대이기는 했지만, 하비비는 본격적인 개혁을 위한 길을 조심스럽게 닦아나갔다. 정치 제도 측면에서 하비비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확대했고(특히 정보부를 해체해 정치 검열을 대폭 완화했으며, 노동조합을 자율화했다) 정당 설립 제한을 없애 다당제 자유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하비비 행정부는 또한 아시아 금융 위기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던 인도네시아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사력을 다했고, 1998년 -13.1%라는 초유의 역성장을 기록한 인도네시아 경제를 간신히 1년 만에 플러스 성장(1999년 0.8%)으로 돌려놓았다.
4.1. 동티모르 문제
한편 하비비는 독립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인도네시아 점령지 동티모르의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하비비는 개인적으로는 동티모르 독립에 반대했지만 일단 동티모르에 특별 자치권을 제안했고, 나아가 1999년 1월 27일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에게 유엔이 동티모르 지역에서 특별 자치권과 독립 중에 선택하도록 하는 국민 투표를 중립적으로 실시해 달라고 요청했다.결과적으로 1999년 8월 30일 동티모르에서 자치권과 독립 가운데 택일하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독립이 78.5%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는 하비비가 인도네시아군과 충분히 조율하지 않고 진행한 것이었고, 투표 직후 동티모르에서는 친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민간인을 공격하고 임시 치안 유지를 맡은 인도네시아군이 방치하면서 내란이 벌어졌다. 9월 10일 인도네시아군 사령관 위란토(Wiranto)는 동티모르에 국제 평화유지군 투입을 허용하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하비비를 협박했지만, 9월 12일 하비비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유엔 평화유지군 투입을 허용했다. 군은 전 세계의 이목이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로 쏠린 이 상황에 감히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했다.
4.2. 조기 선거 정국
하비비는 짧은 임기 막바지에 골카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고 골카르의 차기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당 대표 악바르 탄중(Akbar Tanjung)을 비롯한 골카르 주류 인사들은 오히려 하비비에 대한 지지를 점차 거두었다. 원래는 하비비가 골카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었지만, 하비비가 국회에서 수행한 책임 연설이 골카르 내 탄중파의 반대표로 부결된 후 하비비는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결과적으로 탄중파(주류)와 하비비파(비주류)로 갈린 골카르의 내분으로 1999년 10월의 조기 대선에서 골카르는 대통령 후보도 내지 못하게 되었고, 하비비는 국민계몽당의 압두라만 와힛(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중도개혁 성향의 성직자)이 대통령으로 당선됨[3]에 따라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탄중이 이끄는 골카르는 대선보다 조금 일찍 실시된 1999년 6월 총선에서도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지휘하는 투쟁민주당에 패배해 원내 2당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이후 골카르는 2004년 총선에서는 다시 반짝 원내 1당으로 올라섰다가, 그 뒤로는 만년 2당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와 같은 당시 골카르의 부진에 하비비 책임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짧은 임기 내 모든 결정을 빠르게 내려야 했던 하비비에게 골카르 약화의 근본적 책임이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비비 시대 이래 골카르가 수많은 정당(대표적인 골카르 파생 정당으로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이끄는 위대한 인도네시아 운동당, 위란토가 이끌었던 인민양심당, 토미 수하르토가 이끌었던 근로당이 있다. 국민민주당 등 다른 당들에도 골카르계 인사가 일부 참여했다)으로 분열했던 점을 생각하면, 수하르토 시대의 골카르 자체가 하나의 정당으로 묶기에는 과도하게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어서 자유 선거에 대한 대응이 늦었다고 볼 수도 있다.
5. 말년
이후 하비비는 대통령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회고록을 집필했다. 2006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에는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 있었는데, 1998년 5월 수하르토 사임 직후의 긴박한 상황에 전략예비군 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 충성파 프라보워 수비안토 중장이 하비비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비비를 겨냥한 쿠데타 준비로 해석 가능한 일을 벌였고, 이에 따라 프라보워가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는 것이었다.[4] 프라보워는 직후 군 내 반프라보워 파벌의 위란토에게 밀려 전역해야 했지만, 이후 여러 차례의 도전 끝에 대통령으로까지 당선되었다.2019년 9월, 하비비는 지병 심근증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인 2019년 7월, 동티모르의 독립을 이끈 전 대통령 샤나나 구스망이 투병 와중인 병상의 하비비를 방문해 슬퍼하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8 | 인도네시아 부통령 선거 | 인도네시아 | 649 (100.00%) | 당선 (1위) | 초선[5] |
7. 여담
- 수하르토 시대에 주로 활동한 골카르계 인사임에도, 정치 성향과 종족에 무관하게 인도네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정치적으로 다양성이 높은 인도네시아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그 외에는 수카르노 정도뿐이며, 자바 지역으로 한정하면 압두라만 와힛 정도를 더 꼽을 수 있다.
- 인도네시아의 점령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은 동티모르에서도 하비비는 평가가 나쁘지 않다. 인도네시아군의 방해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지만, 하비비의 결단(독립 투표 시행, 유엔 평화유지군 투입)이 동티모르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 동티모르 수도인 딜리 교외에는 하비비를 기리는 '하비비 대통령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2019년 8월 29일 개통되었는데, 동티모르 전 대통령 샤나나 구스망은 동티모르 독립 국민 투표 20주년에 개최될 다리 개통식에 하비비를 초대하러 2019년 7월 자카르타로 갔지만, 하비비는 당시 중병으로 입원 중이었기 때문에 수락할 수 없었고, 구스망은 하비비에게 동티모르 국민을 대신해 감사한다는 말만을 전달해야 했다. 하비비는 다리 개통이 이루어지고 약 2주 후 사망했다.
- 여러모로 대만의 리덩후이와 비슷한 점이 많다. 구 식민지 국가 출신으로 식민 지배국에 유학한 경력이 있지만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점, 민족적으로 정치적 주류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으면서도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점, 지명된 부통령/부총통 자리에서 전대의 사임 혹은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총통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재 정권 인사로서 그렇게 대통령/총통이 되었을 때 민주화의 길을 닦았다는 점 등이다. 다만 당 장악에 실패해 짧은 임기로 대통령 단임에 그친 하비비와 달리 리덩후이는 중국국민당을 휘어잡고 정식으로 총통에 두 번 당선되었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1] 약칭으로 B. J. Habibie를 애용했다.[2] 부기스는 남술라웨시 동부의 주요 종족이며, 고론탈로는 술라웨시 북부 고론탈로주의 주요 종족이다.[3] 당시 대선은 국회의원(500명) 및 별도로 뽑힌 추가 선거인단(200명)이 각 1표씩을 행사하는 간선제였는데, 골카르 주류 표는 와힛과 메가와티 가운데 그나마 덜 미운 와힛으로 집중되었다는 후문이 있기는 하다. 2당으로 내려앉았다고는 해도 골카르 의석은 120석에 달했고, 와힛이 메가와티를 373:313으로 꺾었으므로 충분히 골카르가 캐스팅보터 역할이 가능한 상황이었다.[4] "Prabowo Dipecat atau Diberhentikan? Ini Cerita BJ Habibie," detik.com, 2017년 7월 31일.[5] 1998.5.21. 대통령직 승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