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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 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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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
Kofi Atta Annan
파일:external/irokoheritage.com/Kofi-Annan.jpg
이름 <colcolor=#000000>코피 아타 아난
(Kofi Atta Annan)
출생 1938년 4월 8일, 영국령 골드코스트 쿠마시
사망 2018년 8월 18일 (향년 80세), 스위스 베른
국적 가나 파일:가나 국기.png
학력 콰메 은크루마 과학기술대학교
종교 개신교
배우자 티티 알라키자 (1965~1984)
나네 라게르그렌(1984~ )[1]
임기 1997년 1월 1일 ~ 2006년 12월 31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px-Kofi_Annan_signature.svg.png

1. 개요2. 어린 시절3. UN 사무총장 시절
3.1. 재임배경3.2. UN 관료출신 사무총장3.3. 국제개입3.4. 미국과의 관계3.5. UN개혁
4. 사망

1. 개요

가나의 정치인, 외교관, 경제학자이다. UN 제7대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가나 최초의 노벨상(평화상) 수상자다.

2018년 8월 18일에 타계했다.

2. 어린 시절

1938년 쿠마시에서 출생. 그 당시 가나는 영국식민지로, 골드코스트(황금 해안)로 불렸다. 가나의 부족인 판테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족장이면서 전 아샨티 주의 주지사였다.

그의 이름 코피는 아칸족에서 금요일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1954년에서 1957년까지 케이프코스트에 있는 감리교 고등학교에 다니고, 그곳에서 기숙했다. 1958년 콰메 은크루마 과학기술대학교에 입학했다.

3. UN 사무총장 시절

3.1. 재임배경

아난이 유엔 사무총장직에 앉게 된 것은 전임 총장인 이집트 출신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와 마찰을 빚은 미국의 지지에 따른 결과였다. 따라서 부트로스 갈리의 행적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임 총장인 부트로스 갈리는 상술했듯 이집트 출신이라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우호적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프랑스 교육을 받았으며, 이슬람 신자가 아닌 콥틱 기독교도이며 그의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안심하여 인준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출범 이래 UN이라는 조직은 강대국들의 대리인에 불과했고, 그렇게 인식되었다. 부트로스 갈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개혁하기 위해서 강한 UN을 주장하였으며 강대국들의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 아낌없이 비판하였고 그들에게 UN을 얕보지 말라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나아가 그는 세계의 경찰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 대항하여 각국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물론 그게 다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은 미국을 제외한 제3세계국가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으며 당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었던 한국도 그를 지지하였다. 1996년 재선 예비투표에서 안보리 상임/비상임 이사국 15개국 중에서 14개국이 지지했으나, 다 아는 어떤 한 나라거부권으로 인하여 떨어졌다. 덕분에 부트로스갈리는 역대 UN사무총장중에 유일하게 연임을 하지 못했다. 부트로스 갈리 총장에 불만을 가졌던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UN의 방만함을 핑계이유로 10억달러 이상의 분담금을 고의로 체납하였다.

반면에 아난은 영어권인 가나에서 태어났고 또한 미국에서 학위를 딴 사람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것으로 예상되어 총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른바 미국이 원하던 관리형 총장의 회귀이다.

3.2. UN 관료출신 사무총장

기존의 유엔 사무총장은 제3세계 외교관들의 자리였으나, 아난은 독특하게도 UN 내부 관료 출신으로 세계보건기구 사무관으로 시작하여 유엔 평화유지군(PKO) 사무차장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무총장직에 오르자마자 시작한 것은 UN의 구조조정이였다. 사실 클린턴 행정부의 메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줄곧 문제로 삼았던, UN의 방만한 조직을 줄이기 위한 그의 첫 행보였다. 약 1,000개의 직책을 폐지하고 기구를 통폐합하는 등의 구조조정을 시도했다.

이 시점에서 아난이 미국의 대변자, 하수인라는 이미지가 부각되기는 했지만, 받은 돈은 없는데(엄밀히 말하자면 주기로 한 측에서 약속을 어긴 것이지만) 적극적으로 개입을 한 전임 총장 시절의 후유중을 UN의 건전성을 위해서도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은 임기 내내 진행되었으며. 후임 총장도 하고 있다. 비록 사무총장으로서의 시작 당시에는 '미국의 대변자, 하수인'이라는 이미지가 붙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UN에서 일한 내부 행정 전문가로서의 면모 덕분에 국제사회의 신뢰를 사기도 했다. 또 내부관료 출신이라는 배경은 UN이라는 조직을 장악하는데 커다란 장점이자 카리스마로 작용하였다.

3.3. 국제개입

'관리형 총장'으로 간택된 그는 국제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취임하자마자 동티모르 분리독립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후 IMF 외환위기와 국제사회의 비난에 부딪힌 인도네시아가 분리독립을 허용, 유엔 평화유지군(PKO)가 주둔하여 치안을 담당하였으며 우리나라도 상록수 부대를 파견하였다.

그는 이라크사담 후세인정부의 사찰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라크의 원유 수출을 허용하고 대신 식량을 제공하는 "석유-식량" 정책을 통해서였다.[2] 전임 총장과는 달리 PKO를 통한 적극적 개입보다는 외교적 또는 정치적인 개입을 우선하는 성향이었다. PKO 사무차장 시절의 경험을 충분히 활용했다는 평가다.

그리고 키프로스북키프로스연방제 통일안을 제시한 아난 계획 역시 그의 작품이다. 물론 실패했긴 하지만. 아난 계획에 대해서는 영문 위키백과를 참조하도록 하자.

르완다 학살을 코피 아난의 실책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개입에 늦은 건 서방 눈치보느라 늦게 반응한 부트로스 칼리의 책임이 크다. 물론, 당시 PKO 사무차장으로서의 책임을 묻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본인도 이 일에는 죄책감을 느끼는듯. 기사

9.11 테러를 직접 목격한 사무총장으로서, 미국의 패권주의이라크 전쟁에 적극 반대하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유엔헌장 위반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침공을 막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3.4. 미국과의 관계

아난과 미국과의 관계는 임기 초에는 동반자로 볼 수 있었지만, 임기 중/후반에는 원수 관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부트로스 갈리 총장 시절에 13억 달러의 UN분담금을 고의로 체납하였으며, 코피 아난 총장 시대에도 계속 연체중이였다. UN의 구조조정을 완수하는 와중에도 못내겠다고 뗑깡을 부리는 미국을 연임 전에 비판하였고, 다행히 연임하였으나. 연임 이후에는 이른바 도덕적 배신이라 불리우는 미국의 폭주체제를 정면에서 맞선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외교적인 역량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이라크 문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 세력이 대량살상무기 차단이라는 미명하에 깽판을 치면서 중동이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버렸고, 결국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라는 희대의 괴물이 태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고별연설에서 임기동안 후회스러웠던 점을 이라크 전쟁으로 꼽는다고 밝혔다. “미국, 다른 나라 위에 군림하지 마라”

3.5. UN개혁

위에서 말한 구조조정을 통해 고학력, 고연봉으로 방대해진 UN조직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재정기여도 1위의 미국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재정적 자립을 하기 위해서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 구조조정은 채택되어 후임인 반기문 사무총장 임기 때 지속된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1945년 전승국인 미국, 영국, 중국(당시는 중화민국), 러시아(당시는 소련)로 이루어진 상임이사국들이 UN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좌우하는 체제가 현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두 가지의 제안을 한다.두 가지 안 모두 기존 상임이사국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계획으로 당연스럽게도 기존 상임이사국들이 모두 반대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아시아 국가들의 권리불충분하게 대변되어 UN의 합법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평가가 있었으며 최소 4개의 상임이사국의 자리가 아시아에 배당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인도, 한국과 일본(1~2년 번갈아가며), ASEAN 1개국이 받아야 한다는 의견등으로 아시아 출신 UN사무총장에 힘이 실렸다는 의견도 있다.

4. 사망

짧은 투병을 한 뒤 스위스 베른의 한 병원에서 2018년 8월 18일에 생을 마감했다. 향년 80세.#
[1] 2차대전 중 활약한 라울 발렌베리의 이부 여동생이 낳은 딸이다.[2] 물론, 이 정책이 말이 많은건 사실이다. 대북 쌀 지원 수준이라고 폄훼하는 부류도 있고, 코피 아난의 자녀와 관련된 비리 스캔들이 터져 입지가 흔들리기도 했다. 게다가 이라크 전쟁이 터져 이러한 평화적 시도는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