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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선/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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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여담3. 18대 대선 박근혜 지지 시도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박주선에 관한 여담을 설명하는 문서.

2. 여담

5번이나 기소된 적이 있고 그중 4번은 구속 수사를 받았는데 4번 모두 무죄판결로 풀려난 매우 특이한 경력이 있다.

보통 구속 수사를 받을 정도의 사안이면 대부분 실형이나 못해도 집행유예 판결은 받아내지만 한번도 아니고 네 번을 모두 무죄판결 받는 경우는 박주선 의원의 경우 빼곤 거의 없다. 이는 검찰의 정치 편향성 때문으로 보기도 하는데 보통 검찰에서 야당계 의원들에게 무리한 기소를 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반 형사사건에선 피의자가 무죄 판결을 받으면 사건의 책임을 지고 검사가 시말서를 쓰거나 심하면 징계성 인사를 당하는게 보통인데 야당 정치인을 구속해서 재판을 몇년간 질질 끌다 무죄가 나와도 검사가 도리어 영전하는 케이스가 적지 않기 때문.

일각에선 벌금 80만원의 유죄라며 거품물고 대단한 범죄라고 주장하는데 구속된 사건과 별건이 병합심리 되어 술자리에서 동장들에게 법에 허용하는 선에서 도와달라 발언이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유죄로 인정되어 80만원 벌금형을 선거 받은것이다. 보통 80만원 벌금형은 약식재판으로 기소하며 선거법의 경우만 정식재판이 열린다. 벌금 80만원형은 벌금 100만원 이상이면 당선무효가 되는 국회의원들에게 별다른 타격이 없고 검찰도 체면을 세우는 법원의 솔로몬 재판급 고정형량에 가깝다.

선거 관련하여 특이한 사항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불과 4년 간격으로 해당 선거 당선자 전국 최고득표율과 최저득표율을 모두 경험해본 기록이 있다. 최고득표율은 18대 총선에서의 88.7%[1], 최저득표율은 그 다음 총선인 19대 총선에서의 31.6%다.

2018년 당시 바른미래당 내에서는 69세로, 최고령 국회의원이었다. 통합 전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각각에서는 박지원, 강길부가 동년 76세로 최고령이었다. 바른미래당에 가장 최근에 합류했고, 국민의당 내 중재파여서 출범 당시 기대 반 우려 반이 있었으나, 정작 공동 대표가 된 이후 구 바른정당 측 지지자들과 당원들에게도 특히 정치 스타일이나 정치력 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 박종진 前 앵커(당시 송파구 을 지역위원장)와는 형동생 사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국 민생당으로 총선을 치렀으며, 친윤 인사가 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국민의당 내에서는 바른정당과 통합에 대해서는 처음엔 반대파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재파로 분류되었다가 통합에 찬성해서 바른정당 통합 반대파가 세운 민주평화당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다보고있다. 막내아들[2]은 IT 사업가인 듯 하다. ## 그 영향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IT/블록체인 산업 쪽에서 꽤 활동을 하기도 했다. 총선 이후에 중소기업뉴스와의 인터뷰를 했다. # 장남과 차남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점이 없다. 다만 21대 총선 직전에 유튜브에 얼굴이 공개되었다.

아들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3] 비슷한 시기에 지역구 세습 논란을 빚은 후반기 국회의장과는 대비되는 부분.

민주당계 정당에 오랫동안 몸담긴 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기호 2번으로 선거에 나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또한 기호 1번도 2008년 18대 총선말고는 달고 선거에 참여한적 없다.

3. 18대 대선 박근혜 지지 시도

당적을 갖지 않고 무소속 신분으로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활동하던 시절,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지지를 고려했으나 지지자들 및 지역구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된 경력이 있다. 2012 조선일보

참고로 18대 대선 당시에는 구 민주계의 주요인사였던 한화갑, 한광옥을 시작으로[4] 김경재, 김원길, 안동선, 이윤수 등이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철회했다.

실제로 박주선은 동교동계 중에서도 민주당 쪽을 지지하는 권노갑을 따르지 않고 보수화된 한화갑을 따랐다고 한다.[5] 박지원 의원은 트위터에서 펄쩍 뛰면서 '당신에겐 아직 미래가 있다'고 직설을 했을 정도.

이후 10년 뒤인 20대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 또한 축사에서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지난 21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부정선거가 광범위하게 자행됐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라고 말하며 부정선거 음모론마저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당시 민생당은 부정선거 음모론을 지지하긴 커녕 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 양당을 비판했으며, 그 미래통합당 내부에서도 황교안친박, 친황같은 강경보수~극우 세력들이 주로 주장했는데 골수 진보인 호남출신이 그런 음모론을 지지하는 모습이 거의 드물다.[6]


[1] 이는 대구 달성군에서 무려 88.2%를 얻은 박근혜보다도 높은 수치이다.[2] 본인의 말로는 첫 구속 시기 11살이였다고 한다. 이를 감안하면 꽤 늦게 막내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저 시기에는 아들만 있거나 혹은 딸만 있는 집에서는 뒤늦게 늦둥이를 갖는 경우가 꽤 있었다. 정황상 아들 둘이 있는 상황에서 늦둥이를 추가로 본 것으로 추정.[3] 비슷한 예시로 오승록 노원구청장의 아들 오상준은 아버지에 관련한 언급을 기피하는 편이다.[4] 앞의 두 사람은 무려 국민의 정부 시절에 새천년민주당(집권여당) 대표를 맡은 이력이 있었고, 각각 야권정치인 시절의 김대중 의원 비서와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이력이 있었다. 다만 이후 실형을 살고 나온데다가 친노계(문재인), 범 친노 정세균 정동영 세력, 386 세력, 민평련 등이 이후 민주당 계열의 주류로 자리잡았던데다가, 박지원과 박주선이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복당하면서 자리를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2009년에 서거하면서 완전히 존재감을 잃었다. 이후 신당을 창당해서 나름의 대책을 마련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박근혜 지지를 고려해본 것이다.[5] 호남 지역이라도 보수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다만 그들이 보수정당에게 표를 대체로 주지 않을 뿐이다.[6] 게다가 유리한 세력에 철새처럼 붙는 기회주의자로 악명이 높은 친이 출신의 친윤 국회의원인 장제원조차도 "심정은 이해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정도니 세월이 지나면서 성향이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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