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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9 19:07:51

박지철

박지철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5번
김행희
(1992)
박지철
(1994~2007)
김정환
(2008)
LG 트윈스 등번호 46번
윤동건
(2006~2008)
박지철
(2009)
이승현
(2010~2011)
}}} ||
파일:박지철 감독.jpg
박지철
朴志喆 | Park Ji-Chul
출생 1975년 4월 13일 ([age(1975-04-13)]세)
부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동삼초 - 토성중 - 동래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4년 연습생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4~2007)
LG 트윈스 (2009)
지도자 신정중학교 야구부 감독 (2010~)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연도별 주요 성적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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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자 現 신정중학교 야구부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로, 2000년대 초반 롯데 자이언츠의 암흑기 시절에 선발진에서 고군분투했던 선수였다.[1]

2. 선수 경력

2.1. 롯데 자이언츠

주형광과 입단 동기로 1994년에 입단했는데, 실제 입단할 때는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무도 불러 주는 구단이 없어서 입단 테스트를 거친 다음에야 계약금 없이 연봉 600만원의 연습생으로 입단했던 철저한 무명 투수였다.[2] 1994년은 팀내 주축 선수들의 상당수가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 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는 등 선수층이 많이 얇아진 관계로, 성적보다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해로 방향성을 잡은 해였다. 그로 인해 개막전 선발을 프로 입단 후 투수로 전업한 1차지명 신인 강상수가 맡았고, 그제껏 거의 원 포인트 릴리프나 패전처리로만 기용되던 가득염이 그 시즌 풀타임 선발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박지철도 그런 열약한 팀 사정 덕택에 연습생 신분이었음에도 개막전부터 1군 엔트리에 들 수 있었고, 실제로 개막전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하며 1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이라는 나름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신인 첫 해 주로 중간계투나 패전처리로 1군 14경기에 등판, 32와 2/3이닝을 던져 1패 1세이브 2.2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3] 같이 입단했던 600만원의 연습생 멤버들 중 유일하게 정식 계약으로 살아남은 케이스.[4]

1995년 롯데는 위에서 언급한 방위병들이 대거 제대하여 돌아와 전력이 급상승한 데 힘입어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박지철은 이 시즌 중간계투 겸 땜빵 선발로 활약하며 팀에서 없으면 아쉬운 레귤러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5] 당시만 해도 초반부터 치고 나가는 팀이 아닌 포스트시즌 진출을 놓고 다투는 팀들은 잡을 경기는 확실히 잡고 버리는 경기는 버려 버리는 전략이 대세였는데, 이 시즌 롯데에서는 이렇게 버리는 경기의 선발 투수를 박지철이 거의 전담해서 맡았다. 아직 주축 선발투수들보다 기량이 모자라 많은 피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5~6이닝을 꾸역꾸역 버텨준 덕택에 롯데로서는 당초 버리려 했던 경기들이 해 볼만한 경기로 바뀌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심심찮게 승리를 따내곤 했다. 시즌 성적은 5승 4패 3.9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96년부터 에이스 윤학길의 부상과 염종석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풀 타임 선발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나 성적은 대단히 좋지 못해 연패만 거듭하다가 얼마 못가 선발 로테이션에서 배제되었고, 7연패 끝에 간신이 1승을 보탰는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최종 성적은 1승 9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4.70으로 크게 부진하며 밑천이 드러난 게 아니냐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기대한 구단에서 하와이 윈터리그에 박지철을 보냈고, 거기서 불안했던 제구력을 잡아내는데 성공하면서 1997년에 드디어 포텐이 터졌다. 이 시즌 특유의 낙차 큰 커브를 앞세워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등판하면서도 무려 8월말까지 1.96으로 평균자책점 1위를 달리는 등 특급 에이스의 면모를 뽐냈고, 최종 성적은 14승 5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하면서 롯데의 에이스 뿐 아니라 리그 대표급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올스타전에서 당시 최고 타자 이종범을 풀 카운트 끝에 폭포수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잡았던 장면이 그야말로 백미. 이 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즌이 한창일 때 김현욱과 박지철은 다승왕을 비롯한 여러 타이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박지철이 농담조로 "너무 열내지 말고 사이좋게 타이틀 나눠먹자"라고 했는데, 그 말이 있고 나서 갑자기 김현욱이 폭풍처럼 승을 쓸어담아 버렸다(...). 이 때 만약 박지철이 단독으로 했든 공동으로 했든 다승왕을 했다면 꼴찌팀에서 다승왕이 나오는 진기록이 나올 뻔도 했다. 이 시즌 롯데가 48승 1무 77패로 압도적인 꼴찌를 내달린 시즌인데다 팀 사정상 7세이브나 거둘 정도로 마구잡이로 투입되면서도 거둔 성적이라, 관리를 받으면서 선발로만 등판하고 팀 성적도 받쳐줬다면 어쩌면 20승도 가능했을지 모를 정도로[6] 박지철에게 있어서는 기량과 성적 모든 면에서 최고의 전성기 시즌이었다.

1997년의 대활약을 밑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었고 팀은 그에게 다음 시즌 마무리 투수의 중책을 맡겼지만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발 뒤꿈치 부상과 어깨 부상. 1998년 시즌 개막전 오른발 뒤꿈치가 찢어지는 부상 탓에 밸런스가 무너져 시즌을 완전히 그르치고 만다. 그래도 시즌 초 마무리로 몇 경기에 등판은 했으나 부진 끝에 마무리 투수 보직을 일찌감치 내려놔야 했으며, 최종 성적은 2승 11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7.73에 그치는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시즌 종료 후 어깨의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며 1999년 시즌은 아예 통으로 날리게 된다. 때문에 전설의 1999년 플레이오프 때도 불참.[7]

오랜 재활을 마치고 2000년에 복귀해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6승 9패 평균자책점 4.60을 기록했다. 2001년부터는 풀 타임 선발로 활약하기 시작해 다승왕 손민한을 받치면서 13승 7패 4.0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야구 팬이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롯데의 암흑기인 8888577이 시작된 때라 결국 가을 야구는 경험하지 못했을 뿐더러 박지철의 활약도 암흑기와 함께 묻혀버렸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가을야구는 더 이상 못 했다.

2002년에는 시즌 초반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았으나, 5월 1일 한화전에서 어깨 통증을 호소한 뒤에 강판되었고, 검진 결과 근육 일부가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아 결국 시즌 아웃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어깨 부상은 박지철의 남은 커리어를 좀먹게 된다.

이후 2003년부터 2년간 다시 풀 타임 선발로 활약하기 시작하며 2003년 8승 7패 평균자책점 3.89, 2004년에 9승 7패 평균자책점 3.87으로 팀 성적을 감안하면 매우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완전치 못한 어깨로 2년 연속 풀 타임 선발을 돈 탓에 어깨에 과부하도 많이 걸린 상태였던데다, 2005년 시즌엔 고참들을 배제하고 젊은 선수들 위주로 기용하던 양상문 감독과의 불화까지 겹쳐 등판 기회가 크게 줄어 고작 1승에 그치는 부침을 겪었다.#

2006년에는 재부임한 강병철 감독 밑에서 다시 기회를 얻어 롱 릴리프로 2.9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꽤 좋은 모습을 보여줘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2007년 갑작스런 구위 저하로 거의 2군에만 머물다가 시즌 후 롯데에서 방출당했다. 롯데에서 방출될 당시 나이가 고작 32세밖에 안 된 것으로 미뤄서, 짐작컨대 더 이상 재기하기 힘들다고 구단 측에서 판단한 듯.

결론적으로 롯데의 암흑기인 8888577이 시작되던 시기 손민한과 함께 롯데 선발진의 축으로 고군분투했으나, 2002년 어깨 부상을 당했음에도 2003~2004년에 걸쳐 많이 던진 후유증으로 2005년부터는 많은 이닝을 던지지 못하게 되며 커리어가 급격하게 내리막을 탔다. 은퇴 후 본인의 말에 의하면, 2002년부터 어깨 통증이 재발했으나 참고 던졌는데, 그게 일이 커졌다고 한다. 1~2개월만 쉬면 될 것을 아프다는 말을 못 해 통증을 참고 던지는 바람에 결국 부상을 달고 다니게 됐다는 것. 그래도 본인은 보잘 것 없는 연습생으로 팀에 들어갔음에도 당시 김용희 감독이 잘 봐 줘서 첫 해부터 1군에서 던지기 시작해, 14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프로에서 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2.2. LG 트윈스

1년 휴식 후 2009 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에 입단 테스트를 받아 입단했는데, 노쇠화의 여파로 2군에만 머물렀다. 8월 23일 공교롭게도 시즌 첫 선발 등판이 사직에서의 롯데전이었는데, 원래 이 날 경기는 서승화가 선발로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승화가 2군에서 작뱅을 폭행한 사건이 드러나 잔여 시즌 출장금지 처분이 내려지면서 서승화 대신 선발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친정팀을 상대로 2⅓이닝 동안 4안타 3실점하고 조기 강판당하며 패전의 멍에를 썼다. 2009년 시즌 최종 성적은 3경기에만 등판하여 2패만 기록했으며, 시즌 종료 후 LG에서 방출되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현역에서 은퇴한 후 귀향한 그는 2010년 8월에 새로 창단한 부산 신정중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현재까지 햇수로 15년이나 장기 근속중이다.

4.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약간 호리호리한 체형임에도 위에서 내리꽂는 투구폼으로 전력투구시 145km/h 언저리의 직구 스피드를 기록했으며, 특히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브의 각이 절륜했다. 이 장점들이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했던 커리어 초기엔 불안한 제구력까지 더해져 많은 피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하긴 했으나 땜방 선발로 등판할 때 어떻게든 5~6 이닝은 먹어주는 모습을 보였고, 커리어 하이 시즌인 1997년은 완전히 포텐이 터져 팀에서는 물론이고 리그 전체에서 손꼽히는 에이스로 활약할 정도였다. 다만 전성기 시절에도 제구력이 A급 까지는 아니었고 커맨드가 좋은 유형은 아녀서 볼넷/삼진 비율이 썩 좋지 않은 등 한계도 있었으며, 구위로 찍어누른다기보단 나름 준수한 구위와 커브를 비롯한 구질들의 시너지 효과로 타자를 맞춰잡는 유형의 투수였다. 똑같이 맞춰잡는 스타일이었지만 제구력과 커맨드가 A급이었던 손민한과는 어느 정도 대척점에 있었던 스타일이라고 보면 된다.

어깨 수술 이후 패스트볼 최고구속이 140km/h를 넘는게 쉽지 않을 정도로 구위가 많이 저하되었지만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의 비중을 대폭 높인 기교파 투수로 스타일을 변경해 2001년 13승, 2003년 8승, 2004년 9승을 거두는 등 팀의 암흑기 시절 선발진의 완전 붕괴 직전에서 마지막까지 지탱하던 선수였다. 그러나 2002년 어깨 부상 재발에 발목이 잡혀 이후로 롱런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은퇴한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ed1c24> 연도 출장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sWAR
1994 롯데 14 32⅔ 0 1 1 0 2.20 28 3 21 18 1.38 0.47
1995 28 77⅓ 5 4 0 0 3.96 73 7 46 36 1.45 0.39
<rowcolor=#000000> 연도 출장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sWAR
1996 롯데 26 99⅔ 1 9 2 0 4.70 98 8 57 53 1.53 0.68
1997 40 157⅔ 14
(3위)
5 7 0 2.45
(3위)
118 8 67 96 1.14 5.27
1998 36 80⅓ 2 11 2 0 7.73 114 12 54 63 2.03 -0.72
1999 1군 기록 없음
2000 29 109⅔ 6 9 0 1 4.60 99 9 44 87 1.24 2.34
2001 34 156⅓ 13 7 1 2 4.03 163 13 64 104 1.44 3.98
2002 5 24⅔ 1 2 0 0 5.11 25 4 10 20 1.34 0.31
<rowcolor=#ffffff> 연도 출장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sWAR
2003 롯데 28 129⅔ 8 7 0 0 3.89 128 16 66 78 1.43 2.06
2004 27 139⅔ 9 7 0 0 3.87 131 9 66 94 1.37 3.35
2005 13 49 1 5 0 0 6.06 58 9 32 39 1.76 -0.12
2006 18 48⅓ 1 2 0 0 2.98 43 0 32 23 1.51 0.81
2007 6 7⅓ 0 1 0 0 6.14 9 0 6 5 1.91 0.01
<rowcolor=#ffffff> 연도 출장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WHIP sWAR
2009 LG 3 5⅓ 0 2 0 0 13.50 11 2 6 3 3.19 -0.25
<rowcolor=#373a3c> KBO 통산
(14시즌)
307 1117⅔ 61 72 13 3 4.22 1098 100 573 719 1.44 18.58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7 3완투 0완봉
2003 1완투 0완봉
2004 1완투 1완봉
<rowcolor=#373a3c> 통산 5완투 1완봉

6. 여담

7. 관련 문서


[1] 2013년 부산을 방문한 펠릭스 호세가 박지철에 대해 그 당시 우리 팀 최고의 투수였고 다른 투수들은 모두 아플 때 혼자 잘해줬다며 그를 기억했다.[2] 초-중-고 내내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으며, 당시 야구명문인 경남고에 진학했었으나 경남고 출신인 아버지의 얼굴을 앞세운 속칭 뒷문입학이었기에 팀 내에서도 입지가 없다시피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에 야구를 중단하고 학교도 대충 다니는 등 방황했으나, 동래고로 부임한 중학교 은사 전창웅 감독 덕분에 동래고로 전학해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투수를 시작했다.[3] 그 와중에 1994년 4월 16일 사직 LG전에서 서용빈에게 9회초 2루타를 허용해 KBO 리그 신인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 기록의 희생양으로 허용투수가 된 적도 있다.[4] 시즌 종료 후 정식 선수 계약으로 전환되어 계약금 1,100만원을 받았다.[5]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 연장전에서 김상현의 뒤를 이어 패전처리로 등판했으나 실점하지는 않았다. 6차전에도 등판하였다.[6] 실제로 다승왕 경쟁자였던 김현욱은 팀 성적 버프에 힘입어 20승 달성에 성공했으며, 지금까지도 중간계투로 20승을 거둔 투수는 김현욱이 유일하다.[7] 그렇긴 한데, 2013년 6월 26일 사직 NC전에 있었던 1999년 레전드(펠릭스 호세, 박정태, 주형광, 마해영 등)들이 롯데 구단의 초청을 받은 행사에 초대되어 참석하기도 했다. 예우 차원에서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영상[8] 주형광은 부산고, 박지철은 동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