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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8:03:59

박진철(야구선수)

박진철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7

파일:KBO 퓨처스리그 엠블럼.svg
1995 KBO 퓨처스 남부리그 다승왕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8번}}}
김대현
(1986~1988)
박진철
(1993~1996)
이원식
(1999~2004)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41번}}}
최재영
(1994~1996)
박진철
(1997~2000)
이윤학
(2001)
해태/KIA 타이거즈 등번호 14번
김경진
(1999~2000)
박진철
(2001~2003)
심재학
(2004~2008)
두산 베어스 등번호 35번
진필중
(1995~2002)
박진철
(2004)
김태구
(2005)
}}} ||
박진철
출생 1975년 2월 28일 ([age(1975-02-28)]세)
전라남도 함평군[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서림초 - 진흥중 - 진흥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프로 입단 1993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해태)
소속팀 해태-KIA 타이거즈 (1993~2003)
두산 베어스 (2004)

1. 개요2. 선수 경력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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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해태-KIA와 두산에서 활약했던 잠수함 투수였다.

2. 선수 경력

원래는 투수가 아니라 1루수였다. 그러다가 광주진흥고 입학 당시 키가 크다는 이유로 1루수에서 언더핸드 투수로 전향했으며, 진흥고 졸업 후 1993년 고졸연고계약으로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데뷔 첫 해인 1993년에 1승을 기록한 걸 제외하면 1994년까지 거의 2군에만 머물렀다. 1995년 시즌 1군 1경기에 등판했으나 승수를 올리지는 못했다. 한 때 오버핸드 투수로의 전향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그 즈음 영장이 나와 현역으로 입대해 군 복무를 수행했다.[2]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1997년부터 1군에 자리잡아 추격조로 간간히 나오기 시작했고, 199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2차전에 팀이 지고있는 상황에 추격조로 등판했다. 팀이 우승해 우승반지를 얻었고[3], 그 다음해인 1998년 시즌에는 1승을 기록했다.

타고투저가 심각했던 1999년 시즌에는 팀 사정상[4] 선발투수로 전업해 114이닝 3승 7패 ERA 5.20을 기록하며 sWAR 2.10을 달성했다. 그해 4월 17일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9회 1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하다가 연속 몸에 맞는 볼과 패스트볼 그리고 박경완스퀴즈 번트로 실점해 KBO 역사상 실점으로 노히트노런이 무산된 유일무이한 사례를 기록하였다. 여담이지만 해태 타이거즈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마지막 경기[5]에서 선발투수로 출전하였다. 즉, 해태의 마지막 선발투수다. 하지만 그 경기는 난타전이 되면서 노디시전.

이후 팀명이 KIA 타이거즈로 바뀐 2003년까지 주로 추격조로 활동했으며, 2003년 시즌 종료 후 심재학을 상대로 황윤성과 함께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되었으나 1년만에 두산에서 방출당하며 그대로 은퇴했다.[6]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태완이 술회하기를 대만 전지훈련 당시, 그가 묵던 객실에서 바깥으로 술병을 던져 대만 경찰이 긴급히 출동하는 사태가 있었으며 자칫 대만 전훈 중단 및 전원 귀국의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매니저가 온갖 선물 공세로 대만 경찰을 되돌려 보냈다고 말했다.

3. 여담

4. 관련 문서


[1]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태어난 곳은 함평이고 이후 광주로 이사가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2] 당시 상무 피닉스 야구단은 프로 선수들의 입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홈 경기에 한해 출장이 가능한 방위병으로 병역의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아예 현역으로 입대한 사례가 종종 있었는데, 최향남, 이도형 등이 90년대에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사례다.[3] 다만 기여도가 낮아서인지 우승 보너스가 50만원밖에 안나왔다고 한다.[4] 이 해 해태는 팀 홈런 210개, 팀 타점 723개로 양준혁, 홍현우, 트레이시 샌더스, 장성호가 버티고 있던 막강한 타선에 비해 투수진이 매우 부실했다. 우선 임창용삼성 라이온즈로 현금 트레이드되었고, 이강철이대진은 각각 무릎과 어깨 부상으로 일찌감치 시즌 아웃, 여기에 시즌 중에는 젊은 유망주 김상진이 위암으로 작고했다. 팀 내 최다승 투수였던 곽현희의 경우 평균자책점이 무려 6.15였으며 팀 평균자책점은 무려 5.21로 투수진이 최악인 상황이었다.[5] 2001년 7월 29일 광주 삼성전[6] 겨우 트레이드가 되었던 참에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프런트에서 자비로 수술하라는 말에 격분해서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7] 1998년 당시에는 196cm라고 OB 베어스와의 개막전 경기에서 중계방송했던 MBC 중계진이 언급하였다.[8] 미자네숯불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