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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8:07:54

박태준/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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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
1.1. 스포츠 매니아1.2. 긍정적인 일면1.3. 부정적인 일면

1. 여담

1.1. 스포츠 매니아

박태준은 열혈 축구 마니아로 유명했다.[2] 포항제철 이전부터 축빠 성향이 있었는지, 대한중석(現 대구텍) 사장 시절에 축구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때 멤버들은 포항제철 축구단으로 그대로 흡수된다. 그리고 1973년에 포항제철 실업축구단(포항 스틸러스 전신)을 창단했다.

덕분에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으로 1990년 지어진 포항스틸야드 건설에도 관여하고[3] 유스 시스템 구축에도 도움을 주는 등[4] 이런저런 공헌을 해서 훗날 K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참고로 포항스틸야드가 지어진 이유가 다소 즉흥적인데, 당시 한국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본선에 연속 진출하면서 월드컵 진출 통산 횟수가 3회를 넘긴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되자 한 이탈리아 언론에서 "축구전용구장 하나 없는 나라가 월드컵에 나온다."라며 한국 축구를 조롱하는 어그로를 시전했고, 이에 축빠였던 박태준이 열받아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제안했다고 한다. 참고로 후술되어있듯 이후 축구전용구장을 한개 더 짓는데, 마찬가지로 포스코와 관계된 광양축구전용구장.

전용구장을 시공한 업체는 당시 축구장 건축에 대한 아무런 경험과 노하우도 없었던 포스코이앤씨였다. 경험과 노하우는 없었지만 포철 축구단 직원들이 해외 유수의 축구장을 둘러보며 벤치마킹한 것들을 오롯이 담아내면서 무사히 전용구장을 지을 수 있었다. 박태준 본인도 전용구장 그라운드에 내려가서 잔디 사이사이에 자라난 잡초를 스스로 뽑아내기도 했을 정도로 전용구장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원래 전용구장은 포항시내에 지으려 했지만 당시 중앙정부가 전용구장 건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시내에 마땅한 부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포항제철소 뒷동산을 밀어버리고 지었다. 이후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도 현대적이고 미려한 전용구장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포스코 부지 내에 건설된 경기장이다 보니 위치는 좋진 못해서 상업시설이 뒷받침 되지 못하고, 접근성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 흠이지만 스틸야드 앞에 시내버스가 다녀서 접근성은 엄청 나쁘지도 않다.

이런 이유로 포항 서포터즈들의 걸개에도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포항 구단측에서는 창단 40주년이 되는 2013년에 스틸야드 E석 스탠드를 청암존이라고 명명하며 박태준 회장을 기렸다. 청암(青岩)은 박태준 회장의 호다.

두 번째 전용구장은 광양에 건설했는데, 이 경기장은 애초부터 구장 확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 건설했다. '언젠가 광양시가 커지면 구장도 확장하겠다'라는 비전을 갖고 지은 것이다. 처음 광양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게 된 계기는 프로축구단 전용이 아니라 광양제철소 직원 복지차원에서 건설한 것이다. 포항 스틸야드처럼 광양제철소 공단 안에 위치해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접근성은 스틸야드 보다 더 안 좋아졌다.(...)

축구 매니아이기도 했지만 야구선수 장효조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 예로 실업야구팀인 포항제철 야구단에 장효조를 영입하려고 했을 때, 장효조가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달라."고 하자, 박태준은 강남 아파트도 모자라서 보너스까지 얹어줬다고 한다.

1.2. 긍정적인 일면

1.3. 부정적인 일면



[1] 포항공과대학교 캠퍼스를 관통하는 찻길이다.[2] 당시 기준으론 1988~1993년 대한축구협회 45, 46대 회장까지도 맡았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과 함께 재계에서 손꼽히던 열혈 축빠였다.[3] 물론 본인 사재로만 다 지은건 아니라 시공사는 포스코이앤씨이다.[4] 참고로 국내 최초의 유소년 축구 클럽은 1988년 시작된 차범근 축구교실이다.[5] 포항제철소 조성 비용에 일본의 청구권 자금이 들어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6] 현장에 '롬멜하우스'라는 별칭이 붙은 막사를 지었고, 박태준도 이 막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7] 그리고 이 사고로 인한 복구 공사는 원래대로라면 6개월, 아무리 서둘러도 3~4개월이 걸린다고 예측했는데, 박태준이 독촉해서 28일 만에 끝냈단다. 그렇게 서두르는 와중에 부실공사가 벌어지지 않은 건 신기한 일이었다.[8] 모모세 타다시가 항의한 이유에는 사실 개인적인 감정 문제도 아주 살짝 있었다. 본문에서 말한 땜질 처리는 도멘 측에서 맡았고, 일이 끝난 뒤 마침 연말연시라서 모모세 타다시는 오랜만에 신년 휴가로 일본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시무식 때문에 도쿄의 도멘 본사로 왔더니 박태준이 현장을 폭파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포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근데 모모세 이 양반은 박태준에게 억하심정이 있기는커녕 이후 출간한 자서전 에세이에서 박태준에 대해 거의 책의 1/2 분량을 할애해 가며 칭송한다. 이 에세이의 제목이 골때리는데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 제목과는 달리 혐한 서적은 아니고 한국 경제계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지적하며 '이러이러한 부분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정도의 논조이다.[9] 2023년 현재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사고, 검단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사고를 보면 그 면이 더 높게 평가를 받을만 하다.[10] 조정래의 평전에 따르면, 하루에도 수십번씩 청탁이 몰려들었다고 한다.[11] 실제로 박태준이 밀려나고 아래사람들이 이후 그를 공격하고 밀고하자 박태준은 매우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12] 박태준과 김영삼은 특히 사이가 안 좋았고, 노태우와도 긴밀한 사이는 아니었다.[13] 하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오해인데 대일청구권 자금은 쿠데타의 명분이 될 국가발전을 위한 자금이 필요한 박정희에 의해 발생된 것이고 박태준은 그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 뿐 박태준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박정희에게 청구될 자금이었다.[14] 심지어 포항제철에 사용된 대일청구권 자금은 이미 일본으로부터 청구되어 농업용 예산으로 배정된 자금의 일부분이었고 포항제철이 아니라 원래 예정이던 농업용 예산으로 쓰였어도 일제 피해자들은 보상금을 제대로 수령하지 못했을 것이다.[15] 다시 강조하자면 박태준이 아니라 박정희가 제공한 근거다.[16] 사실 이때 이미 경영으로부터 떠난 명예회장이며 이떄 박태준이 만나줬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데다, 같은 시기 대기업을 키운 삼성, 현대 기타 모든 기업과는 달리 박태준은 절대 회사를 개인의 소유로 두지 않고 국가에 환원시켰으며(퇴직 당시 포스코 주식이 단 1 주도 없었다.) 심지어 주식회사가 된 포스코이기에 포스코의 주주라면 모를까 박태준은 포스코와 어떠한 연관도 없는 사람이었다.[17] 그리고 농업으로 무의미하게 사라질 예산을 공업국가로 성공적으로 만든것 자체로 국가에 진 빚은 갚은 셈인 데다 일제피해자는 국가가 보상하고 지원해야 할 대상이고, 심지어 포항제철부터 포스코까지 사회로의 환원은 국내 대기업중 최고수준으로 끊임없이 하는 기업이다.[18] 물론 당시 물가 고려하면 지금보단 훨씬 큰 가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