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담
- 생전 정리정돈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공사 현장에서 자재를 어질러둔 것을 보고 "저게 공사 자재냐"고 소장에게 물어봤고, 소장은 버리는 자재라며 멀쩡한 자재를 모두 버리고 새 자재를 깔끔하게 정돈해뒀다고 한다.
-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이 붙는 학교의 주인인 포스코교육재단 창립이사장이다. 전신은 1976년에 설립된 학교법인 제철학원으로, 포항공과대학교도 이 법인 산하 학교였으나 1995년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되었다. 평소 "제철소에서 고된 일을 하는 직원의 자녀 중에 나라를 구할 큰 인물이 나올지 어떻게 아냐"며 직원들의 자녀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포항제철고등학교, 광양제철고등학교 등에도 자주 찾아왔는데, 학생들과 찍은 단체 사진들은 초,중,고교 뿐 아니라 유치원들에도 아직도 많이 벽에 걸려있다. 학교 선생님들에 의하면, 부실공사로 잘못 설계돼 한여름에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창문을 보고 당장 뜯어 고치게 하고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했다는 등의 여러 전설들이 두서 없이 전해져온다. 그리고 광양의 경우 학교를 방문한 날 저녁에는 주택단지 공원에서 산책하는 박태준 부부와 인사하는 직원 가족들도 많았다고 한다.
- 상기했듯 박정희와 친분이 있다보니 박정희의 장남인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처하였는데, 박지만 결혼식도 박태준 부부 내외가 함 들어가던 날의 음식 준비를 손수 담당하기도 했다. 만일 박태준이 없었다면 박지만은 지금도 마약에 찌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지만이 현재 회장으로 있는 "EG"의 전신인 삼양산업을 박지만이 인수하는 데 주선한 장본인도 박태준이었다.
-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당시 초대 총장인 김호길 박사가 '지금은 포항제철 부설 포항공대지만 나중에는 포항공대 부설 포항제철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학교 조직, 개설학과, 교수 수준,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은 자기가 모두 다 하겠다'라는 요구를 했다. 원래 이러한 요구는 사학법에 규정된 재단 이사장의 권한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는데, 박 회장은 오히려 '초대 총장은 창업자와 같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잡아야 한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고 한다.
- 2001년 7월에 당시 74세였던 박태준은 미국에서 폐 밑의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걸린 시간은 6시간 30분, 물혹 무게는 3.2㎏이나 됐다. 물혹을 해부한 의료진의 말이다. “혹 속에 이처럼 많은 규사가 들어 있는 경우는 처음 봤다.” 박 명예회장의 부인 장옥자 여사의 설명이다. “포항제철 초창기에, 특히 늦가을부터 봄까지 매일같이 불어댄 모래바람 때문이었을 거다.” #
- KBS 1TV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강철왕"을 기획했다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보류되었다. 결국 KBS에서는 편성을 포기했으며, 이후 몇 년이 지나 2014년 종합편성채널인 TV조선에서 불꽃 속으로라는 이름으로 작품명이 바뀌어 방영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포항시 남구의 청암로[1], 포항공대의 박태준학술정보관 등 포항에는 그를 기리는 지명들이 은근히 많다.
- 포항공과대학교 부설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가 있다.
- 굽시니스트는 자신의 만화에서 박태준의 캐릭터로 아이언맨을 밀고 있다. 역대 총리 사진에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박태준을 그린다든가 자신의 정적 YS를 까기 위해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날라온다든가.
- 임랑해수욕장 입구에 생가가 있으며, 현재 기념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
1.1. 스포츠 매니아
박태준은 열혈 축구 마니아로 유명했다.[2] 포항제철 이전부터 축빠 성향이 있었는지, 대한중석(現 대구텍) 사장 시절에 축구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때 멤버들은 포항제철 축구단으로 그대로 흡수된다. 그리고 1973년에 포항제철 실업축구단(포항 스틸러스 전신)을 창단했다.덕분에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으로 1990년 지어진 포항스틸야드 건설에도 관여하고[3] 유스 시스템 구축에도 도움을 주는 등[4] 이런저런 공헌을 해서 훗날 K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참고로 포항스틸야드가 지어진 이유가 다소 즉흥적인데, 당시 한국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본선에 연속 진출하면서 월드컵 진출 통산 횟수가 3회를 넘긴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되자 한 이탈리아 언론에서 "축구전용구장 하나 없는 나라가 월드컵에 나온다."라며 한국 축구를 조롱하는 어그로를 시전했고, 이에 축빠였던 박태준이 열받아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제안했다고 한다. 참고로 후술되어있듯 이후 축구전용구장을 한개 더 짓는데, 마찬가지로 포스코와 관계된 광양축구전용구장.
전용구장을 시공한 업체는 당시 축구장 건축에 대한 아무런 경험과 노하우도 없었던 포스코이앤씨였다. 경험과 노하우는 없었지만 포철 축구단 직원들이 해외 유수의 축구장을 둘러보며 벤치마킹한 것들을 오롯이 담아내면서 무사히 전용구장을 지을 수 있었다. 박태준 본인도 전용구장 그라운드에 내려가서 잔디 사이사이에 자라난 잡초를 스스로 뽑아내기도 했을 정도로 전용구장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원래 전용구장은 포항시내에 지으려 했지만 당시 중앙정부가 전용구장 건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시내에 마땅한 부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포항제철소 뒷동산을 밀어버리고 지었다. 이후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도 현대적이고 미려한 전용구장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포스코 부지 내에 건설된 경기장이다 보니 위치는 좋진 못해서 상업시설이 뒷받침 되지 못하고, 접근성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 흠이지만 스틸야드 앞에 시내버스가 다녀서 접근성은 엄청 나쁘지도 않다.
이런 이유로 포항 서포터즈들의 걸개에도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포항 구단측에서는 창단 40주년이 되는 2013년에 스틸야드 E석 스탠드를 청암존이라고 명명하며 박태준 회장을 기렸다. 청암(青岩)은 박태준 회장의 호다.
두 번째 전용구장은 광양에 건설했는데, 이 경기장은 애초부터 구장 확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 건설했다. '언젠가 광양시가 커지면 구장도 확장하겠다'라는 비전을 갖고 지은 것이다. 처음 광양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게 된 계기는 프로축구단 전용이 아니라 광양제철소 직원 복지차원에서 건설한 것이다. 포항 스틸야드처럼 광양제철소 공단 안에 위치해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접근성은 스틸야드 보다 더 안 좋아졌다.(...)
축구 매니아이기도 했지만 야구선수 장효조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 예로 실업야구팀인 포항제철 야구단에 장효조를 영입하려고 했을 때, 장효조가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달라."고 하자, 박태준은 강남 아파트도 모자라서 보너스까지 얹어줬다고 한다.
1.2. 긍정적인 일면
- 포항제철소 공사 시 "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핏값이다.[5] 제철소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라고 설파했다. 실제로 공장 착공부터 완공 시기까지 박태준 사장 이하 전 직원이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고 포항에 상주하며[6] 일을 진행할 만큼 열의를 보였다. 열정페이나 혹사 논란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이, 박태준 사장 스스로 공사판에서 같이 굴렀기 때문. 공사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민가를 비롯한 많은 건물을 철거할 때 반발이 심하자 직접 뛰어다니며 설득하고, 가장 난관인 예수성심시녀회(가톨릭 수녀원)도 직접 찾아가 결국 철거 협조를 받아낸다. 그때 수녀들이 "이 흙강아지 같은 분이 사장님이냐"며 놀랐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다.
-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일부 기업의 안티테제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인재를 유치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이 윤택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욕을 먹으면서도 직원들이 거주할 아파트와 학교, 병원 등 직원들의 복지를 공장 착공 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집은 임대형식도 아닌 직원 소유로 넘겼다. 포항 및 광양 사업장의 직원 주거시설이 건립 시기를 감안해도 상당히 혁신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당시 주변에서 그렇게 회사 운영하면 망한다고 질타가 쏟아졌지만 "사원 복지 잘 해서 망한 회사는 없다."며 일축했다. 심지어는 소련의 대학총장급 지식인이 "우리가 꿈꾸는 모습을 포항제철에서 실현하고 있다."며 극찬을 한 적도 있을 만큼, 박태준 사장의 직원 복지는 호평을 받았다.
-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간 당시, "그런 신문도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5억 원을 기부했고, 포항제철 기업 광고를 꾸준히 실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문재인 변호사, 리영희 교수 등과 더불어 한겨레신문 창간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한겨레신문과 반대쪽 이념의 정당에서 정치 인생을 살았고 젊은 시절에는 박정희의 측근 출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한 파격적인 행보다. 2011년 12월 한겨레에서는 박태준 회장의 부음기사를 실으면서 이례적으로 "별세" 소식 및 고인의 생전 업적을 상세히 소개하기도 하였다. 물론 5.16 군사정변 세력과 가까웠다는 점은 비판했으나, 한겨레가 기업인을 이 정도로 다룬 것만 해도 한겨레의 평소 논조와는 매우 다른, 융숭한 대접이다. 생전에도 한겨레는 박태준 회장의 동정을 자주 소개했을 정도로 군사정권 군인출신답지 않게 한겨레와 원만한 관계를 보였다. 심지어 박태준 5주기 평전 소개 기사까지 쓸 정도로 박태준 사후에도 한겨레가 박태준을 챙기고 있다.
- 1977년에 크레인 기사가 야간근무 도중 졸음 때문에 쇳물을 잘못 부어서 제강공장의 각종 배선이 완전히 망가지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박태준은 해당 기사에겐 징계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중간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들은 잠도 안자나? 야간 근무라면 출근하기 전에 충분히 수면을 취했을 텐데, 그럼에도 사고가 났다면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당신들은 부하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가?'라고 혼냈다고 한다.[7]
- 부실공사 현장을 발견하곤 짓던 공장을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와 폭파시킨 뒤 다시 짓게 했다. 사실 계획안과 30cm 정도 차이였는데 대충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고. 조정래 작가의 전기에서는 콘크리트가 울퉁불퉁한 모양새였고 부하직원이 "그 부분만 뜯어내고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잔소리 마라, 땜질이 대형사고를 부르는거 모르나? 당장 폭파 시켜!"라며 폭발시켰다고 한다. 포항제철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일본기업 도멘(東棉)의 지점 소장인 모모세 타다시(百瀬 格)가 "폭발 충격 때문에 기초 부분이 잘못될 수도 있다"라고 항의하자[8], '그 부분은 군(해병대) 공병대에게 의뢰해서 해결했으니 걱정마시오.'라고 해명했다. 그래서 70%나 진척된 공사가 죄다 폭발해 사라졌다. 또한 잘못 조여진 볼트 하나하나 하얀 분필로 표시해가며 "다시 꼼꼼하게 볼트를 조이도록!"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 표시된 볼트는 모두 400개였다. 또다른 일화로 아직 한창 공장을 짓는중에 기초 공사가 잘못되어 콘크리트 반죽을 붓자 쇠 기둥이 휘어지는걸 보고 간부급을 불러 너는 나라를 말아먹는 놈이라고 질타했다.
- 이렇게 회장이 직접 깐깐, 꼼꼼하게 점검을 하는 분위기였기에 당시, 국내 건설업계에서는 포항제철 공사 또는 미군(美軍) 공사를 맡아 일한다고 하면, 실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고.[9]
- 비슷하게 포항공과대학교를 지을 때도 내진 설계 기준도 없을 당시 강진에도 끄떡 없는 1000년 갈 학교를 만들라고 지시하여서 원리 원칙에 충실하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덕분에 2017년 포항 지진 때도 포항공대는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재조명되기도 했다. 포스텍은 지진 피해가 심각한 포항 북구가 아닌 남구에 위치해 있기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공사 시점이 2017년으로부터 무려 31년 전인 1986년인 점을 감안하면, 그 당시에 철저하게 안전 기준에 따라 공사를 진행했다는 점은 어찌보면 당연한건데도 미담이 되기도 한다. 몇년 후 기본도 지키지 않아 삼풍백화점을 무너지게 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준 회장과 비교하면 더 대조적이다.
- 광양제철소 건설 당시 잠수복을 입고 비서와 함께 광양 앞바다에 입수해 직접 줄자를 들고 치수를 쟀다. 바다를 메워서 공정을 진행하는 만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걸 염두에 두고 회장이 앞장섰던 것.
- 포스코의 초대회장인 만큼,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수많은 청탁과 압력을 받았으나 대부분 거절했다.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가 "문중 사람들을 써주면 안되겠냐"고 했고, 이 말을 들은 박태준 회장은 그대로 방을 나와 포항제철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게 지나쳐서 당시 박정희 주변에서 떡고물을 받아먹던 측근들에게 밉보인 덕에 중앙정보부에선 허구한날 박태준의 집을 수색하고 꼬투리를 잡으려 하자, 박태준은 "이렇게는 못 해먹겠다"고 박정희를 찾아가서 "포항제철 건설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이에 박정희는 비서에게 종이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종이에 써주는 걸로 화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또한 군 시절 국방부 인사과에 있을 때 정치판의 더러움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10] 정치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박정희가 3선을 위한 개헌을 시도할 당시, 이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했을 때도 "난 정치에는 개입 안해." 라고 딱 잘라 버렸는데, 보고를 들은 박정희도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이나 잘 하게 냅둬." 하고 놔뒀다고. 참고로 그 서명은 중앙정보부장(Flying 돈까스 김형욱)이 진행한 일이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위상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박태준을 지켜보았던 김재규는 그 뒤로 박태준을 달리 보았다고 한다.
- 포항제철 창립 당시 세계은행의 보고서에서 '한국은 철강 생산을 하면 투자금을 다 날린다'고 나오는 바람에 원조를 받지 못했다. 결국 박태준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해서 포항에 제철소를 짓고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1986년 박태준은 런던에서 당시 보고서를 작성했던 존 자페와 만나 그 때 똑같이 보고서를 쓰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자페가 한 말이 걸작. "나는 그 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쓸 거다. 철강 수요가 없는 나라가 백만톤짜리 제철소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
- 중국의 개방/개혁 초기인 1978년 8월, 덩샤오핑이 일본에 가서 "포항 제철소 같은 제철소를 하나 지어달라"고 하자,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은 "공장이야 지을 수 있지만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어서 그런 제철소는 못 짓는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덩샤오핑은 껄껄 웃었지만 내심 속이 쓰렸을 것이다. 그해 말 일본 도쿄에서 박태준을 만난 이나야마 회장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 중국에 납치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나중에 중국의 초청으로 방중한 후 포항제철 임원들에게 "광산을 최대한 확보해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중국이 경제개발 착수 전이라, 직원들이 충고를 소극적으로 이행했는데,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아프리카, 호주, 동남아시아 등지의 자원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회했다는 설도 있다.
- 1992년 포항제철 회장직 사퇴 발표 후 포항과 광양의 제철소 직원들이 회장 사퇴를 반대하며 시위를 하는 국내 기업 역사상 전무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아직까진 포스코 역사에서 본사 정직원들이 일으킨 유일한 시위다. 단순히 작은 시위가 아니라 포항, 광양시 주민, 포스코 임직원들과 주부, 지역 의사들, 학교 선생님들까지 뛰쳐나갔다는 증언들도 있다. 실제 포항에서 박태준의 위상은 울산광역시에서 정주영 회장의 그것에 비견될만했다. 물론 전미가 울었다 수준은 아니고, 포스코 내부에도 엄연히 박태준 반대 세력은 있었기에[11] 당시 포항, 광양에선 이들이 정치권과 결탁해[12] 박태준을 밀어내고 포스코를 먹으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회장직을 내려놓은 박태준은 "이젠 국회에서 포항제철을 지키겠다"는 말로 다독였고 시위는 해산됐다고 한다.
1.3. 부정적인 일면
- 포항제철 건설 당시 한일기본조약에 따른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박태준이다. 이 때문에 일제의 피해자들은 보상금을 제대로 수령하지 못했고[13][14] 20세기 후반 ~ 21세기에 들어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우린 1965년에 이미 배상을 마무리 지었다." 라고 두고두고 반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15]피해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개인 배상금을 정부가 사용한 격. 이에 황당한 강제징용자 등 일제시절 피해자들도 여러차례 포스코에 배상을 요구하며 박태준이 살아있을 적엔 당시 명예회장이던 그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으나, 정작 '조상 핏값'까지 외쳤던 박 회장은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 사실 이때 이미 경영으로부터 떠난 명예회장이며 이때 박태준이 만나줬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데다, 같은 시기 대기업을 키운 삼성, 현대 기타 모든 기업과는 달리 박태준은 절대 회사를 개인의 소유로 두지 않고 국가에 환원시켰으며(퇴직 당시 포스코 주식이 단 1 주도 없었다.) 심지어 주식회사가 된 포스코이기에 포스코의 주주라면 모를까 박태준은 포스코와 어떠한 연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농업으로 무의미하게 사라질 예산을 공업국가로 성공적으로 만든것 자체로 국가에 진 빚은 갚은 셈인 데다 일제피해자는 국가가 보상하고 지원해야 할 대상이고, 심지어 포항제철부터 포스코까지 사회로의 환원은 국내 대기업중 최고수준으로 끊임없이 하는 기업이다.
-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의 처남인 이창석에게 특혜를 봐 준 적이 있었다. 이건 국제그룹 케이스를 보더라도 정권에 찍히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부분적인 옹호론도 있지만, 애초에 정부 돈 들어간 포항제철은 기업의 성격부터가 다른데다, 어찌됐든 인맥이 있던 정권 시절에만 신념을 지키는듯하다 정권이 바뀌자 시류에 순응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듯하다.
- 적극 가담만 안했을 뿐 엄연히 5.16 군사정변 공범이었다. 주로 정계와 떨어진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애초에 출신부터가 당시 정계와 손을 뗄 수가 없는 관계인 것.
- 자수성가 기업인으로 오인될 수도 있지만, 사실 박태준은 기업가로는 재벌 2세 못지않게 금수저로 시작한 인생이었다. 대통령 그것도 독재자로 절대 권력을 휘두른 사람이 뒤를 받쳐주었고, 포항제철을 일으킨 돈도 결국 일제 피해자 보상금을 빼돌린 사실상 정부 돈이었으며, 기술도 상술되어있듯 여러 일화가 있긴 했지만 어찌됐든 불평불만 다 걷어내고 보면 무에서 유가 나온게 아닌 엄연히 일본 제철소에서 배운 것이었다. 저 어디 아프리카 국가의 제철 기업가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 비자금으로 90년대 초반에 이미 380억이 넘는 재산을 형성했고, 이 재산 분배 과정에서 탈세를 위해 온갖 친인척을 통해 분배하다가 증여세 탈세로 68억원을 징계 받았고 그중에 납부한 것은 55억원이다. 다만 박 회장을 옹호하는 측에선 사이가 영 좋지 않던 김영삼 전 대통령 측의 정치 보복으로 혐의가 지나치게 과장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할 문제. 물론 비리 자체가 잘 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뭐 어쨌건 이후엔 본인 재산이 적었는지 기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계 직전 본인 명의로 된 재산은 거의 없었고 병원비는 자녀들이 대신 내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남은 재산인 북아현동 자택도 팔아서, 당시 박원순 변호사가 운영하던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쿠데타군 출신에 여러 탈세를 저지르긴 했어도, 오늘날 비판받을거면 그냥 그 인생 자체로 비판받지 딱히 정치적 좌우로 갈려서 평가받는 경우는 드문 것은 상기된 한겨레 건도 그렇고 생전 본인이 진영 논리에 딱히 갇히지 않은 덕분도 있었다.
- 김영삼 정부 출범 후 몇몇 부하 직원들이 등을 돌려 비리를 고발했다. 이에 37억에 달하는 뇌물을 수수하고, 약 7,000만원이 넘는 회사 자산을 유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지만 지병 치료를 구실로 일본에 장기 체류하다 특별사면되었다. 물론 기업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고작(?) 37억으로 그랬겠냐는 말도 있지만[16], 용처(用處)는 차치하더라도 30여억 원을 포항제철 회장 시절 32개사의 계열사 및 협력사로부터 제공받은 것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다만 굳이 옹호하는 측에선, 그 당시 지저분했던 재계 사정을 고려하면 진흙탕에 있으면서도 그나마 30여억밖에 안되는게 어디냐고 상대성을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 포항공과대학교 캠퍼스를 관통하는 찻길이다.[2] 당시 기준으론 1988~1993년 대한축구협회 45, 46대 회장까지도 맡았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과 함께 재계에서 손꼽히던 열혈 축빠였다.[3] 물론 본인 사재로만 다 지은건 아니라 시공사는 포스코이앤씨이다.[4] 참고로 국내 최초의 유소년 축구 클럽은 1988년 시작된 차범근 축구교실이다.[5] 포항제철소 조성 비용에 일본의 청구권 자금이 들어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6] 현장에 '롬멜하우스'라는 별칭이 붙은 막사를 지었고, 박태준도 이 막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7] 그리고 이 사고로 인한 복구 공사는 원래대로라면 6개월, 아무리 서둘러도 3~4개월이 걸린다고 예측했는데, 박태준이 독촉해서 28일 만에 끝냈단다. 그렇게 서두르는 와중에 부실공사가 벌어지지 않은 건 신기한 일이었다.[8] 모모세 타다시가 항의한 이유에는 사실 개인적인 감정 문제도 아주 살짝 있었다. 본문에서 말한 땜질 처리는 도멘 측에서 맡았고, 일이 끝난 뒤 마침 연말연시라서 모모세 타다시는 오랜만에 신년 휴가로 일본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시무식 때문에 도쿄의 도멘 본사로 왔더니 박태준이 현장을 폭파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포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근데 모모세 이 양반은 박태준에게 억하심정이 있기는커녕 이후 출간한 자서전 에세이에서 박태준에 대해 거의 책의 1/2 분량을 할애해 가며 칭송한다. 이 에세이의 제목이 골때리는데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 제목과는 달리 혐한 서적은 아니고 한국 경제계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지적하며 '이러이러한 부분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정도의 논조이다.[9] 2023년 현재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사고, 검단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사고를 보면 그 면이 더 높게 평가를 받을만 하다.[10] 조정래의 평전에 따르면, 하루에도 수십번씩 청탁이 몰려들었다고 한다.[11] 실제로 박태준이 밀려나고 아래사람들이 이후 그를 공격하고 밀고하자 박태준은 매우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다.[12] 박태준과 김영삼은 특히 사이가 안 좋았고, 노태우와도 긴밀한 사이는 아니었다.[13] 하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오해인데 대일청구권 자금은 쿠데타의 명분이 될 국가발전을 위한 자금이 필요한 박정희에 의해 발생된 것이고 박태준은 그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 뿐 박태준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박정희에게 청구될 자금이었다.[14] 심지어 포항제철에 사용된 대일청구권 자금은 이미 일본으로부터 청구되어 농업용 예산으로 배정된 자금의 일부분이었고 포항제철이 아니라 원래 예정이던 농업용 예산으로 쓰였어도 일제 피해자들은 보상금을 제대로 수령하지 못했을 것이다.[15] 다시 강조하자면 박태준이 아니라 박정희가 제공한 근거다.[16] 물론 당시 물가 고려하면 지금보단 훨씬 큰 가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