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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손

발레리 사리체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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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손

파일:신의손 천안공고 키퍼 코치 프로필.png
천안공업고등학교 골키퍼 코치
신의손[이름]
申宜孫 | Shin Eui-son
<colbgcolor=#5dacd8><colcolor=#000> 러시아 이름 발레리 콘스탄티노비치 사리체프
Bале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арычев
Valeriy Konstatinovich Sarychev[이름]
출생 1960년 1월 12일 ([age(1960-01-12)]세)
소련 타지크 SSR 두샨베[3]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1960~1991)

[[타지키스탄|]][[틀:국기|]][[틀:국기|]] (1991~2000)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2000~)
종교 기독교(정교회)
신체 193cm / 체중 87kg
직업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코치
선수 SKA-파미르 두샨베 (1978~1981)
PFC CSKA 모스크바 (1981)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1982~1991)
일화 천마/천안 일화 천마 (1992~1998)
안양 LG 치타스/FC 서울 (2000~2004)
코치 안양 LG 치타스 (1999 / 골키퍼 코치)
FC 서울 (2005 / 골키퍼 코치)
경남 FC (2006~2007 / 골키퍼 코치)
대교 캥거루스/경남 대교 캥거루스/고양 대교눈높이 (2008~2011 / 수석·골키퍼 코치)
대한민국 U-20 대표팀 (2009 / 골키퍼 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09 / 골키퍼 코치)
부산 아이파크 (2012~2015 / 골키퍼 코치)
이천 대교 (2016~2017 / 골키퍼 코치)
FC 안양 (2018 / 골키퍼 코치)
김해시청 축구단 (2019~2022 / 골키퍼 코치)
천안공업고등학교 축구부 (2023~ / 골키퍼 코치)
국가대표 1경기 (타지키스탄 / 1997)

1. 개요2. 클럽 경력3. 지도자 경력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기록
5. 신의손에 대한 헌사6. 대한민국 축구계에서의 위치7. 여담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K리그에서 맹활약했던 前 타지키스탄, 現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 선수 출신 코치.

한국에 귀화해 신의손(申宜孫)으로 개명했다고 하는데 실제 주민 등록상의 이름은 '샤리체프'로 되어 있으며 '신의손'은 선수 등록명일 뿐이다. 별명으로 '神의 손'이라고 불리었던 걸 아예 그쪽으로 (한자는 바꿔서) 개명한 것. 구리 신씨(九里 申氏)의 시조다.[4]

2. 클럽 경력

파일:external/fmkorea.net/1486eb70305dbe02961ed6b4e83e6b68.png
선수 시절
프로 데뷔는 SKA-파미르 두샨베에서 했지만 소련에서 주로 활약했던 팀은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시절이며 161게임 출장에 153실점을 기록했다. 10년의 커리어 동안 평균 1경기 1실점 이하를 기록한 것. 토르페도 모스크바는 지금은 비록 러시아의 2부 리그지만 사리체프가 뛰던 1981-1991년 때는 구 소련 1부 리그에서 3위와 6위 사이 성적을 꾸준히 유지했고 소련 FA컵에서 1회 우승, 4회 준우승을 기록한 상위권 팀이었기에 그 또한 UEFA 컵위너스컵, UEFA컵 등의 유럽대항전 출전 경험도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소련 시절 5번째로 많은 우승을 한 팀이기도 하다.

사실 사리체프는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리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고 소속팀에서 주전과 후보를 오갔다. 28세가 되던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전 자리를 꿰찼고 1990년 소련 올스타 33인의 골키퍼 부문 3위, 1991년 소련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며 30대가 되어서야 소련의 최고 수준 골키퍼로 인정받았다.[5]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성기를 맞이한 이 시기에 소련이 해체되었고 그 다음 해인 1992년 일화 천마에 입단하며 한국과 연을 맺게 된다. 일화 천마에서 뛸 당시부터 경기당 실점율이 소수점 이하라는 괴물 같은 성적[6]을 내면서 전년도 리그 최다 실점 팀이, 골키퍼가 바뀌더니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변모되었다. 이 때 뒷날 그의 이름이 되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대미문의 K리그 3년 연속 우승 신화는 덤이다.

사리체프에 이어 부천 유공에서 영입한 샤샤(알렉산드르 포드쉬발로프, Александр Подшивалов) 또한 무지막지한 실력을 보이면서 프로축구의 모든 팀들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는 붐이 일었다. 결국 대한민국 축구 팀들이 토종 골키퍼들을 외면하면서 그의 등장이 1997년 이후 K리그에서는 외국인 골키퍼를 불허[7][8]하는 규정을 만들었을 정도.(이 때 김병지가 군계일학의 실력을 보인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2000년에 귀화 자격을 갖춰서 귀화 시험을 통과, 이름을 자신의 별명인 신의손으로 짓고[9]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양 LG 치타스로 복귀했는데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동계훈련에는 10일밖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하면서 안양 LG 치타스에 우승을 안겨 주고 2005년 5월에 정식으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2005년, FC 서울의 GK코치로 부임했다.

2006시즌을 앞두고 창단한 신생팀 경남 FC GK코치로 부임해 2년 간 활동했다.

2008년, WK리그대교 캥거루스의 GK코치로 부임했다.

그러다가 2009년 3월, 홍명보의 스카웃으로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의 GK코치를 병행했고 2009 FIFA U-20 월드컵 이집트 8강 신화에 일조했다. 이후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 있다가 2010년, 다시 경남 대교 캥거루스로 돌아갔다.

2012년, 안익수 감독의 부름을 받고 부산 아이파크의 GK코치를 맡았다. 이후 윤성효 체제까지 잔류했지만 팀의 강등을 막진 못했다.

2016시즌을 앞두고 이천 대교로 복귀해 2 시즌을 보냈다.

2018년, 고정운 감독의 부름을 받고 FC 안양의 GK코치로 부임했다.

2019년, 윤성효 감독의 부름을 받고 김해시청 축구단의 GK코치로 부임하였다.

2023년, K리그2에 새롭게 참가하는 천안 시티 FC의 U-18 팀인 천안공업고등학교 축구부의 GK코치로 부임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기록

5. 신의손에 대한 헌사

느낌상 분명 '골이다' 싶어 세리머니를 펼치려는 순간 손을 뻗어 막아냈다. '이번에는 정말 들어갔다' 싶어 동료들에게 뛰어가려는 순간 발을 뻗어 막아냈다. 정말 밉더라.
차상해[10]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골키퍼들은 공격수의 모션에 많이 속는 편이었다. 사리체프는 공격수가 모션을 취할 때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 덩치에 골문 앞에서 모션에 속지 않고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골 넣기가 쉽지 않았다. 국내 골키퍼라면 골이다 싶었던 것도 사리체프에게는 많이 잡혔다. 아마 사리체프가 아니었다면 나도 더 빨리 100골을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윤상철[11]
대한민국 축구의 골키퍼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
한준희 해설위원[12]

6. 대한민국 축구계에서의 위치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골키퍼의 중요성을 일깨운 주인공이다. 신의손 등장 이전까지는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골키퍼는 단지 필드 플레이어에서 밀려난 키 큰 선수들이 보는 포지션이었고, 골키퍼 전담 코치 따위는 사치였다.

하지만 소련에서 정규 골키퍼 코치에게 배워 온 신의손이 차원이 다른 선방을 선보이면서 일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자, 1994년에 일어난 대한민국 골키퍼의 양대 비극 중 하나인 미국 월드컵 독일최인영의 실수[13],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의 주전 골키퍼 차상광의 알까기[14][15]가 맞물려서 골키퍼의 중요성과 체계적인 양성이 대한민국 축구의 과제로 떠올랐다. 게다가 신의손 등장 이후 너도나도 다른 팀에서도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니까 연맹에서 외국인 골키퍼의 영입 금지까지 만들 정도니 이 때부터 최소한 프로 팀들은 전담 골키퍼 코치를 두기 시작했고, 학원 팀에도 필드 플레이어와는 전혀 다른 골키퍼 양성이 과제로 주어졌다.

특히 월드컵 독일전 때문에 최인영에 대한 실망감이 극에 달했을 때는 "한국인 골키퍼로는 희망이 없으니 사리체프를 귀화시켜서 대표팀에 발탁하자"는 여론도 있었다. 이후 김병지, 이운재가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면서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갔지만, 대표팀과는 관계 없더라도 결과적으로 귀화를 하기는 한 셈이다.

그리고 신의손이 은퇴한 이후 다시 귀화하면서 현역으로 복귀한 뒤에 재은퇴하고 잠시 프로팀 코칭스탭이나 여자 축구 골키퍼 코치 등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코치가 아닐 때가 있었다. 이 때 부천 유공의 니폼니시 감독 통역이었던 강창석 통역과 함께 거의 무보수로 전국의 중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골키퍼 클리닉을 열기도 했다. 지금 꽤 큰 선수들 중 여럿이 신의손의 지도를 어렸을 때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이 태반이 넘는다고. 기량 부분에선 언젠가 신의손을 능가하는 선수가 나올수도 있겠지만, 그 골키퍼들의 선수 은퇴 뒤의 밥벌이를 만들어 주고 자기가 은퇴 뒤에도 그러한 지도자로서의 롤 모델을 저렇게 세운 선수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몇 없을 것이다.

이후 한국 축구계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중반까지 치열하게 경쟁한 김병지이운재의 시대를 거쳐 꾸준히 좋은 골키퍼들이 나오고 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에는 누가 주전이고 서브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마지막까지 경쟁이 치열했다. 결과적으로 신의손 코치는 대한민국이 아시아 골키퍼 강국으로 서게 만든 기초공사에 참여한 중요한 인물임은 확실하다.

더군다나 K리그1K리그2에서는 외국인 골키퍼를 금지시킨 이유도 신의손이 너무 잘 한탓에 너도나도 외국인 골키퍼만 써버리다보니 한국인 골키퍼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탓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본인 하나로 그 규정까지 추가가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이 끝난다.

7. 여담

8. 관련 문서



[이름] 주민등록상의 이름은 사리체프가 아닌 특이하게도 "샤리체프"이다.[이름] [3] 두샨베는 지금은 타지크인이 주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만, 불과 35년 전인 소련 말기, 그가 30살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인 주민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4] 단, 본인만 귀화하고 다른 가족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리 신씨는 1대밖에 없다.[5] 사실 골키퍼 포지션 특성상 필드 플레이어에 비해 전성기가 늦게 찾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30대에 전성기가 온 것이 특이 케이스는 아니다.[6] 한 경기당 실점이 한 골 이하[7] 1997년 전체 경기 2/3 출전, 1998년 전체 경기 1/3 출전, 1999년 완전 출전금지로 바뀌어 갔다.[8] 단, 필드 플레이어가 경기 중에 골키퍼의 퇴장, 부상 등으로 포지션을 대신 맡아야 하는 경우에는 허용된다. 사실상 영입 금지.[9] '사리첩', '구체포' 등 생소한 한자어도 후보에 올랐었다.[10] 1993시즌 K리그 득점왕[11] 1990년대 FC서울의 레전드[12] 이웃집 찰스에 신의손 코치와 함께 출연할 때의 소개멘트. 동시기에 촬영한 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에서 K리그 역대 Top7 키퍼 순위에 장지현 위원과 함께 신의손을 역대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13] 결국 후반전에 이운재로 교체된다.[14] 이 때문에 대한민국 아시안게임 대표팀은 우즈베키스탄과 맞붙은 4강전에서 0:1로 패해 3,4위전으로 밀리고 만다. 그리고 쿠웨이트에 패해 4위에 그쳤다. 그것도 그 알까기가 우즈베키스탄의 유일한 슈팅. 오죽하면 구글 검색어에도 '차상광 알까기'가 거의 20년이 가까이 된 지난 지금도 있으며, 최인영은 한때 국대 No.1 골리라 이름이라도 남았지 차상광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수준의 흑역사 취급이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중국을 결승전에서 만나 꺾고 축구 금메달을 차지했다.[15] 여담으로 당시 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팀에서 뛴 선수이자 간판 선수였던 미르잘랄 카시모프는 우즈베키스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2015 아시안컵 8강전에서 대한민국과 맞붙었다. 방콕 대회까지 아시안 게임 축구가 A매치로 취급되기 때문에, 히로시마의 패전은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현재까지도 유일한 A매치 1패(역대성적 9승 3무 1패)다.[16] 이 경기도 평가전 상대가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그는 무려 4골이나 허용하며 팀은 4:1로 졌다.[17] 지금의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전신.[18] 다만 황종휴는 행정학이 속칭 방어 과목이었으며, 합격하던 해에도 행정학은 40점대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학자 이름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축구 선수 이름을 써 냈는데도 과락을 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