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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03:41:11

최순호

최순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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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호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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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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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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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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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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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S ★
<rowcolor=#000000> 이름 포지션 구단 선정 기준 비고
최순호 공격수 포항제철축구단
럭키금성 황소
K리그 베스트 11 1회
홍명보 수비수 포항 제철 아톰즈 K리그 MVP 1회
K리그 베스트 11 5회
신태용 미드필더 성남 일화 천마 K리그 MVP 2회
K리그 득점왕 1회
K리그 베스트 11 9회
K리그 통산 401경기 출전
통산 최다 베스트 11
이동국 공격수 포항 스틸러스
광주 상무 불사조
성남 일화 천마
전북 현대 모터스
K리그 MVP 4회
K리그 득점왕 1회
K리그 도움왕 1회
K리그 베스트 11 5회
K리그 통산 548경기 출전
K리그 통산 228득점
통산 최다 MVP
통산 최다 득점
LEADERS ▲
<rowcolor=#000> 이름 지도자 경력 수상 비고
김정남 유공 코끼리
울산 현대 호랑이
K리그 우승 2회
올해의 감독상 1회
HONORS ◆
<rowcolor=#000> 이름 공헌 이력 비고
박태준 1973 포항제철 축구단 창단
1990 국내 최초의 축구 전용 구장 포항스틸야드 건립
1992 광양축구전용구장 건립
1994 전남 드래곤즈 창단
2001 국내 최초의 클럽 하우스 건립
2003 국내 최초 유소년 체계 도입
}}}}}}}}} ||
Suwon FC
파일:208475667.jpg
<colbgcolor=#00396f><colcolor=#fff> 이름 최순호
崔淳鎬|Choi Soon-Ho
출생 1962년 1월 10일 ([age(1962-01-10)]세)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사창리
(現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사창리)[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2], 미드필더[3]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00396f><colcolor=#ffffff> 선수 포항제철 축구단/포항제철 아톰즈 (1980~1987)
광운대학교 (1980~1983)[4]
럭키금성 황소 (1988~1990)
포항제철 아톰즈 (1991~1992)
로데스 AF (1992~1993)
감독 포항 스틸러스 (1993~2000 / 코치)
포항 스틸러스 (2000~2004)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2006~2008)
강원 FC (2008~2011)
포항 스틸러스 (2016~2019)[5]
프런트 FC 서울 (2012~2013 / 미래기획단 단장)
포항 스틸러스 (2019~2022 / 유스 총괄 기술 이사)
수원 FC (2023~ / 단장)[6]
국가대표 96경기 30골[7] (대한민국 / 1980~1991)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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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96f><colcolor=#ffffff> 학력 청주한벌국민학교 (1968~1974 / 졸업)
청주대성중학교 (1974~1977 / 졸업)
청주상업고등학교 (1977~1980 / 졸업)
광운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 80 / 학사)
가족 부모 최시범 / 김금신
2남 2녀 중 둘째
배우자 박귀주
장남 최원영
차남 최원우
첫째며느리 박승혜
손자 최아론
종교 개신교
}}}}}}}}} ||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행정/경영인 경력
4.1. 비판
5. 플레이 스타일6. 최순호에 대한 언사7. 정치 경력8. 선거 이력9. 여담
9.1. 해외 진출 관련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미드필더.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 모두에서 두루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대한민국의 1986 월드컵1990 월드컵 본선 진출에 공헌했다. 별명은 아시아의 호랑이.

2. 선수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최순호/선수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최순호/지도자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행정/경영인 경력

강원 FC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2012년 FC 서울 미래기획단장으로 선임되었고 2013년부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맡았다.

대한축구협회 시절에도 잡음이 없던 것이 아닌게 자기 라인이자 과거 강원 FC 감독 시절 당시 코치 신분으로 보좌한 김상호에게 U-19 대표팀 감독을 맡겼다가 2014년 대회에서 조별 예선 광탈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포항 스틸러스 감독에서 경질되고 몇 달 후에 유스팀 총괄 기술이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2022년 6월 임기 마무리 이후 7월 1일 직원분들과 송별 인사 이후 구단을 떠났다.#

파일:최순호 단장 2023.jpg
2022시즌이 끝나고 수원 FC 단장 후보군에 이름이 올랐으며, 2022년 11월 30일, 2023 시즌부터 수원 FC 단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2025년까지다.

4.1. 비판

수원 FC 단장 이후 속된 말로 구시대적 꼰대에 가까운 막장 행보로 인해 수원은 물론 K리그 내 타 팀 팬들에게도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먼저 시작은 2024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권경원, 이승우등 핵심 선수를 떠나 보내고 특별한 보강 없이 이적시장을 끝내 버린 것, 이후 수원은 김은중 감독 체제에서 우승 경쟁을 이어갈 정도로 굉장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기에 최소한 아시아 무대 진출권 정도는 따낼 수 있다는 기대가 컸으나 시즌 중반 이적시장이 지나간 이후 이는 팀이 급격히 무너진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팬들의 비판을 받았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이 보증을 선 것과 다름없는 조건으로 여름 이적시장에서 전북 현대 복귀가 무산된 손준호를 영입했는데, 2024년 9월 11일, 손준호가 승부조작에 연루된 선수에게 금품을 받았다는 것을 사실상 시인하면서[8] 일이 커지게 되었고, 전북 현대 모터스, FC 서울, 대전 하나 시티즌같은 기업들이 손준호에게 접촉했다가 해당 리스크에 대한 문제 때문에 영입을 거부했음에도[9]문제가 발생시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발언만으로 무리수를 뒀다가 결국 해당 사건 이후 팀은 팀대로 망가지고, 손준호에게 연봉은 연봉대로 퍼주며 엄청난 비판과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사고를 쳐놓고 대한축구협회의 정해성과 마찬가지로 난 모른다는 식으로 책임을 안 지려는 태도를 보였으며, 후에 사과 했으니 책임 진 거 아니냐는 식의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아 축구팬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또한 시즌이 끝난 이후에도 잡음은 끊이지 않았는데, 시즌 내내 김은중이 호성적을 내고 있었으나 뒤에서 최순호가 선수 기용 등에 대해 엄청난 간섭을 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김은중을 팀에서 쫓아내기 위해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 2024 시즌 수원 FC는 김은중 체제에서 상술했듯 우승 경쟁까지 노릴 정도로 순항 중이였으나, 여름 이적시장에서 주축 선수가 대거 팀을 떠나고 손준호 리스크까지 터진 이후 엄청난 부진에 시달리며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사실상 최순호가 본인의 입맛대로 팀을 주무르려다가 잘 나가던 팀을 말아먹은 셈인 것이다.

5. 플레이 스타일



이회택-차범근의 뒤를 잇는 80년대 한국 축구의 에이스이자 대한민국 축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 중 한 명.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피지컬,[10] 스피드, 제공권, 속도감 있는 드리블, 뛰어난 개인기, 강력한 슈팅, 창조적이고 정확한 패스 등 축구 선수가 갖추고 있어야 할 긍정적 요소를 대부분 갖춘 9.5번 스트라이커이자 공격형 미드필더. 185cm의 장신임에도 유연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100m를 11.7초에 주파할 정도로 빨랐다. 주발은 오른발이지만 왼발도 그에 못지 않게 잘 썼으며, 슈팅 역시 날카롭고 강력했다. 미드필더로도 뛰었으면서 A매치 30골을 기록한 점에서 알 수 있듯 뛰어난 포지셔닝으로 상대 진영에서 기회가 오면 어김없이 골을 터뜨렸다. 발기술이 뛰어나 드리블과 볼터치도 부드러웠으며, 시야가 넓어 패싱 능력도 일품이었다.[11]

오프 더 볼 무브먼트도 뛰어났다. 빠른 스피드로 상대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데 탁월했으며 오프 더 볼로 상대진영을 흔들고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공간을 창출했다.

80년대 초중반에는 최전방에 고정된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뛰었으며 필요할 때만 뛰고 많이 움직이지 않는 스타일 때문에 활동량이 적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또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힘과 피지컬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상대에게는 다소 열세를 보이기도 했다.

포항제철의 한홍기 감독은 최순호에게 요한 크루이프의 경기 테이프를 보여주면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성장하길 요구했고, 이때부터 크루이프를 자신의 롤모델로 생각하면서 다재다능한 스타일로 변해갔다고 한다.

이후 다재다능해진 최순호는 뛰어난 플레이메이킹 능력으로 득점 기회를 만드는 플레이를 펼쳤다. 또한 좌우 측면으로 이동해서 연계 플레이를 하기도 했고 측면에서의 플레이도 수준급이었다. 스타일이 공미에 가깝게 변하면서 2선, 심지어 3선까지도 내려오며 경기에 관여했다. 그렇게 전형적인 스트라이커에서 미드필더 스타일로 변하기 시작했고 감독들의 요구에 따라 전형적인 스트라이커, 미드필더, 둘의 중간인 9.5번을 번갈아 맡았다.

이렇게 최순호는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많이 움직이지 않는 스타일 때문에 2차전에 출전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피지컬을 키우고 활동량과 활동 범위도 늘려 적극적으로 뛰면서 유럽과 남미의 수비수들과 대등하게 맞섰다.

패스에 관련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8경기에서 17골을 터뜨렸다. 최순호의 기록은 1골 2도움이었지만 PK 유도, 골대 맞고 나온 공, 세컨드 어시스트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8골에 기여했다. 당시 8경기에서 그 중 절반인 8골이 최순호의 발 끝에서 만들어진 것. 당시 최순호는 대표팀에서 골 가뭄을 겪으며 부진을 겪던 시기였는데, 동료 선수들이 최순호를 잘 받쳐주지 못하다보니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중앙에 고립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자신이 직접 골을 노리는 대신, 더 좋은 위치에 있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활동량을 늘리면서 패싱과 어시스트 위주의 경기를 했다고 한다. 이후 골을 넣는 것보다 골을 만드는데 재미를 느껴 플레이메이킹에 주력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구 잘한다는 선수들이 모인 국가대표팀에서도 어느 누구도 적시에 최순호에게 패스를 넣어주지 못했고, 차범근을 제외하면 누구도 최순호의 패스를 받을 최적의 위치를 선점하지 못했다.

월드컵에서 1골 3도움[12]으로 2022년 현재 손흥민과 함께 대한민국 월드컵 개인 통산 공격 포인트 공동 1위 기록을 보유 중이다.[13]

6. 최순호에 대한 언사

최순호 감독은 개인 기량 자체가 (피지컬 능력도 좋지만 상당히 유연하고) 발기술이 매우 좋고 베르바토프처럼 볼터치가 매우 유연하고 상당히 창의적이다. 상대 수비를 달고 다니다가 넣어주는 토킥, 로빙패스라든지 경기를 보는 시야 이런 것들이 미드필더 역할까지도 소화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기질이 있다.
장지현 #
한국의 데니스 베르캄프.
한준희
우리 축구사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싶은 걸출한 공격수.
이회택
공격도 보는데 미드필더적인 플레이도 상당히 잘한다. 아주 유려하다. 볼을 차는게 진짜 부드럽고 볼줄 딱딱 끊어주고 슈팅 때리고, 아마 한국 축구 역사에서 유럽에 가지 못한 가장 아까운 재능.
박문성[14] #

7. 정치 경력

현역 은퇴 후 프랑스 등지에서 축구공부를 하고 돌아와 1994년 봄부터 고향 청주시에서 어린이축구교실을 운영하던 중 민주자유당 관계자와 주변 지인으로부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 권유를 받았다.

선수 시절부터 박태준포스코 회장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도의원 출마와 직접 관련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박 회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대선 전부터 정치적 갈등을 겪다 김 대통령의 당선 뒤 일본 등 외국을 떠돌고 있을 때였고, 출마를 앞둔 최순호는 박 회장과 상의했는데 박 회장은 “정치는 어렵고 힘든 일”이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축구를 비롯한 체육 관련 일을 풀려면 정치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최순호는 결국 민자당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중앙당의 지원 속에 친구와 지인, 지역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3개월 가량 선거운동을 했다.

고향 발전과 체육 꿈나무 육성에 기폭제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충북도의회 선거에 출마했으나 결과는 낙선이었다.[15]

확고한 정치철학으로 무장해 정치인으로 존재 기반 자체의 이전을 꾀한 것이 아니라 ‘체육계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 한번만 도의원을 하고 축구 지도자로 복귀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중앙정치의 대세와 지역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북도의회 청주 6선거구)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2,325 (26.9%) 낙선 (2위)

9. 여담

9.1. 해외 진출 관련

제일 처음 받은 오퍼는 포르투갈의 보아비스타 FC이다. 대표팀에서 처음으로 뛸 때 보아비스타와의 3번의 경기에 최순호가 3골을 넣어 보아비스타의 오퍼를 받았다.

1981년 청소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유럽의 여러 팀들이 최순호를 주목했다. 당시 이탈리아를 상대로 최순호가 득점까지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여 승리하자 여러 팀들이 나선 것이다. 인터 밀란 관계자가 최순호를 꼭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벨기에의 RSC 안데를레흐트에게는 아주 구체적인 제의를 받았다. 그외에도 함부르크 SV, FC 쾰른, 유벤투스 FC 등에서도 제안을 받았고 그리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 전의 활약까지 이어지자 더욱 제안이 들어왔다. 벨기에의 세르클러 브뤼허 KSV에서 1만달러의 이적료를 내겠다는 제안이 왔고 유벤투스에서는 구단의 스카우트 담당자들은 물론 구단 수뇌진까지 나서 최순호를 잡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최순호의 플레이를 직접 보기 위해 그가 출전하는 국제대회 현장에 구단 관계자들이 파견되기도 했다. 그런 노력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유럽으로 진출하지 못한 이유는 병역법 때문이다. 당시 병역법에 의하면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은 선수는 국내에서 5년간 해당 분야에 종사해야 했다.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우승으로 병역특례를 받은 최순호는[16] 어쩔 수 없이 강제로 국내에 남아야 했다. 그리고 이 5년 제한이 풀린 이후엔 최순호는 유망주가 아니라 즉시전력감으로 가치를 보여주어야 할 나이였고, 자연히 유럽 측의 관심도 그전보단 미지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17] 최동원도 비록 종목은 다를지라도 적용되는 병역법 규정은 동일했기 때문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MLB에 진출하지 못했다. 물론 현재는 관련법령이 개정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경력도 인정해준다. 그래서 기성용 등의 선수들이 2012 런던 올림픽 축구 동메달로 병역특례를 받고도 해외에서 커리어를 이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J리그를 준비하던 일본 사커 리그에서도 거액으로 최순호를 스카우트하려 시도한 바 있다. 하여튼 최순호 본인은 이 당시, 이탈리아 행을 은근히 원했기에 무산된 것을 무척 아쉬워한다.


[1] #[2] 스트라이커[3] 공격형 미드필더[4] 포항제철 축구단 소속 선수로 광운대학교 야간 전기공학과 80학번으로 입학, 즉 일반 직장인이 주간에 회사에 다니고 야간에 대학에 다니는 것처럼 낮에는 포항제철 소속의 축구 선수로 활동하고 밤에는 대학을 다녔다. 졸업할 때 전기공사기사 1급 자격증도 땄으며 4학년에는 광운대학교 축구부에서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 대학연맹전 등에 출전했다.[5] 시즌 도중 경질[6] 수원 FC B팀, 수원 FC 위민팀 단장 겸임[7] 1999년 105경기 출전으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으나 국제축구연맹에서 몇몇 경기를 인정하지 않아 제외되었다.[8] 금품을 받은 것은 맞으나 교류가 많던 친한 사이라 준 것인줄 알았다고 둘러대며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해 손준호에 대한 여론이 사실상 180도 뒤집어지기 시작한 원인이다.[9] 전북은 영입하는 대신 중국리스크가 터질 경우 구단은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조건을 내놨지만 손준호 측이 단칼에 거절하며 마지막 협상이 끝내 결렬되었고 소식을 들은 최순호가 손준호와 접촉 > 구단주인 수원시장 이재준과의 회의를 거쳐 영입까지의 과정이 단 2시간만에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10] 1986 월드컵 때는 유럽과 남미의 선수들에게 몸싸움에서 열세였지만, 1990 월드컵에서는 대등하게 맞설 정도로 키웠다.[11] 1986 월드컵과 1990 월드컵 영상을 보면 기본기가 굉장히 튼실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대 수비수 여러 명이 에워싸고 있는 중에도 공중 볼을 트래핑한 다음에 패스를 하거나 볼을 간수해내는 능력은, 그것도 아르헨티나(1986 월드컵 우승팀)와 이탈리아(1982 월드컵 우승팀)의 수비수들을 상대로 해내는 재능은 분명히 대한민국, 아니 아시아 축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심지어 당시 이탈리아 수비진은 가에타노 시레아안토니오 카브리니, 피에트로 비에르코보드, 풀비오 콜로바티였다. 지금보다 인프라, 훈련 체계 등의 환경이 훨씬 열악했던 1980년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일.[12]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 도움 기록, 이탈리아전 득점 및 도움 기록,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스페인전 도움 기록.[13] 손흥민의 경우 3골 1도움으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알제리전 득점 기록,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멕시코전과 독일전 득점 기록, 2022년 카타르 월드컵 포르투갈전 도움 기록.[14] 최근 선수와 비유하면 리버풀각포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평했다.[15] 당시 김종필 총재가 김영삼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민자당을 탈당한 뒤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의 바람이 충청권을 휩쓸 때였다.[16] 당시에는 병역특례가 적용되는 범위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기에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로도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다.[17] 유벤투스뿐만이 아니라 포르투갈 보아비스타에서의 오퍼도 18살 때부터 왔었다. 최순호는 당시에 너무 어려서 잘 몰랐고 병역 문제로 인해 거리낌이 있었지만, 월드컵 출전 이후 해외 진출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유럽팀은 당시 나이가 찬 아시아 선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며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