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16684><tablebgcolor=#016684> | 파주시민축구단 2024 시즌 스쿼드 |
1 박민선 · 2 웰링턴 · 4 박종성 · 5 오상준 · 6 김승찬 · 7 성정윤 · 8 이제호 · 9 류연준 VC 10 예병원 · 12 김찬수 · 13 황규성 · 14 김호준 C · 15 박현우 · 16 정호영 · 17 지의수 VC · 18 이건영 · 19 윤철현 20 이동진 · 21 오재혁 · 22 이승재 · 23 신원철 · 24 전창화 · 25 조승택 · 27 한준영 · 31 노지훈 33 유정재 · 47 권혁찬 · 70 박성혁 · 76 송대훈 · 77 김우홍 · 90 박희준 · 93 유성현 · 97 강형민 · 99 루카스 |
오범석 · 이원재 · 고재윤 변주원 |
* 본 문서는 간소화한 것입니다. 스쿼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타 구단으로 임대한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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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ju Citizen FC | ||||
<colbgcolor=#016684><colcolor=#f37022> 이름 | 오범석 吳範錫 | Oh Beom-seok | |||
출생 | 1984년 7월 29일 ([age(1984-07-29)]세) |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81cm, 79kg | |||
직업 | 축구 선수 (풀백,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해설가 | |||
소속 | <colbgcolor=#016684><colcolor=#f37022> 선수 | 포항 스틸러스 (2003~2007) → 요코하마 FC (2007 / 임대) PFC 크릴리야 소베토프 사마라 (2008~2009) 울산 현대 (2009~201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1~2015) → 경찰청 축구단-안산 경찰청 축구단 (2013~2014 / 군 복무) 항저우 뤼청 (2016) 강원 FC (2017~2020) 포항 스틸러스 (2020~2021) | ||
지도자 | 파주시민축구단 (2024 / 감독) 강원 FC (2025~ / 코치) | |||
해설 | skySports (2022)[1] | |||
국가대표 | 43경기 2골 (대한민국 / 2005~2013) | |||
링크 | | | |||
{{{#000,#ffffff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000000,#ffffff | <colbgcolor=#016684><colcolor=#f37022> 등번호 | 포항 스틸러스 - 14번[2], 47번[3], 32번[4] 수원 삼성 블루윙즈 - 14번[5], 47번[6], 4번[7] 울산 현대 - 8번, 14번 강원 FC - 14번, 47번 경찰청 축구단-안산 경찰청 축구단 - 14번 | ||
학력 | 옥동초등학교 (졸업) 학성중학교 (졸업)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졸업) | |||
가족 | 아버지 오세권, 어머니, 누나 오유미 아내 민수지(1986년생, 2009년 6월 21일 결혼) 장남 오주원(2009년 12월 14일생) 장녀 오주아(2011년 9월 20일생)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해설가, 감독.2. 클럽 경력
2.1. 포항 스틸러스 1기
포항 스틸러스 산하 유소년 구단인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1학년 당시 동갑내기인 황진성, 김동현 등과 함께 포스코 재단의 축구 유망주 유학 프로젝트 1기 신분으로 뽑혀 브라질 지코 클럽에 1년 간 유학을 다녀왔다.이후 2003년,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황진성, 박원재, 송동진 등 동기 13명과 함께 포항의 우선 지명을 받고 프로에 데뷔하였다. 등번호는 32번. 데뷔 첫 해에는 주로 R리그에만 출전하여 정규 리그 한 경기 출전에 그쳤다.
2.1.1. 2004 시즌
지난 시즌처럼 시즌 초반에는 R리그에만 출전했다. 그러다가 전반기 송라클럽하우스에서 열린 자체 연습경기에서 최순호 감독 눈에 들었고, 지난 시즌의 부진을 만회하고자 적극적으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던 팀 기조에 합류하며 1군 기회를 얻게 되었다.주전 스리백이던 이민성, 산토스, 김성근 중 이민성의 대표팀 차출과 김성근 산토스의 부상 등의 공백이 생겼을 때 스리백의 우측 스토퍼로 기회를 받았다.
결국, 포철공고 동기인 박원재, 그리고 이미 지난 시즌부터 중용을 받던 황진성과 함께 많은 기회를 받았다. 우측 스토퍼는 물론, 라이트백, 미드필더를 오가며 포백과 스리백을 병행하는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성장했고 팀의 전기리그 우승과 통합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그리고 이 시즌 하이라이트는 가을에 열린 포스트 시즌으로 12월 5일, 동해안 더비로 펼쳐진 플레이오프 홈 경기에서 매치업 상대였던 당시 에이스
이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챔피언결정전 1,2차전에 모두 출전하여, 김대의, 나드손, 마르셀이란 리그 최고의 삼각편대를 상대로 두 경기 모두 클린시트를 기록하는 활약을 펼쳤다. 비록 팀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이미 오범석의 포텐은 K리그를 대표하는 유망주로 인정받았고, 겨울 전지훈련때 국가대표팀에도 데뷔하게 되었다.
2.1.2. 2005 시즌
시즌 전 김성근이 5번으로 등번호를 변경하자, 2년 간 달았던 32번 대신 전임 최순호 감독의 선수시절 번호이자 향후 본인을 상징하는 14번을 달았다.기존 주전이던 이민성이 팀을 떠났고 새로 부임한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에 의해 팀내 핵심 수비 자원으로 급부상했다.
2월, 제주에서 열린 A3 챔피언스컵에서 김성근-산토스와 함께 스리백 라인을 구축해 대회 무패 및 최소 실점에 기여했지만, 지난해에 이어 또 수원에 밀리며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3월부터 5월까지 열린 하우젠컵에선 전 경기에 출전하며 팀이 3위에 오르는 것에 기여했다.
5월 개막한 K-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전기리그 3위에 기여했지만 후반기 국가대표팀 차출로 결장했고, 후기리그 6위에 머물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시즌 중반 조성환이 합류한 뒤엔 센터백이 아니라 우측 윙백으로 나서는 등 특유의 유틸리티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게 파리아스 감독 아래 기량이 만개했으며 국가대표팀에도 계속 차출되고 있다.
리그에서도 33경기에 나서 2득점을 기록하는 등, 본격적으로 리그를 대표하는 수비수로 거듭났다.
2.1.3. 2006 시즌
지난 시즌에 이어 본격적으로 우측 윙백으로 나섰다. 물론 센터백이나 아예 중앙 미드필더로도 간간히 출전하였다.지난 시즌보다 더욱 적극적인 모습으로 플레이 스타일이 바뀌었는데, 지난 시즌과 같은 리그 33경기에 나섰지만, 무려 50개나 늘어난 128개의 파울을 기록했다. 그리고 지난 시즌처럼 2득점을 기록했고, 2도움도 기록하며 공수 양면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이동국, 신화용, 황진성, 박원재, 이창원 등 구단 유스 포철공고 출신 중 가장 압도적인 입지를 자랑했는데 특히, 파리아스의 페르소나로 불리며 신임을 받으면서, 팀의 프렌차이즈 스타로서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팀의 전후기 및 통합리그 2위에 기여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또 수원에게 패하며 탈락을 막진 못했다.
2.1.4. 2007 시즌
시즌 시작 전 해외 이적시 6억원의 바이아웃 조항이 발동되는 3년 재계약을 체결했다.새로 영입된 최효진과 공존하기 위해,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나오는 등 세르지오 파리아스 포항 전술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2.1.5. 요코하마 FC(임대)
2007년 아시안컵 이후 당시 해외 진출을 강력하게 원했던 본인의 의지로 시즌 중 J리그 요코하마 FC로 임대되어 10경기에 출전했다.[8] 허나 팀은 리그 최하위로 결국 강등되었다.2.2. 크릴리야 소베토프 사마라
복귀 후에도 이미 시즌 중반 해외이적으로 관해서 구단과의 마찰로 계속 구설수에 오르던 와중에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소속의 크릴리야 소베토프 사마라가 바로 바이아웃 오퍼를 제시하면서 이에 이적시장이 닫히기 며칠 전, 포항이 이적동의서를 발급을 하여 이적을 확정했다.[9][10]2008 시즌에는 데뷔전에서 MOM으로 선정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이며 꽤 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2009 시즌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벤치 멤버로 전락했고, 2시즌 간 28경기에 출전했다.
2008년 인터뷰
이후 사마라의 재정난으로 인해 오범석은 싼값에 시장에 나오게 됐고, 당시 군복무를 위해서라도 국내로 돌아오려고 했던 입장에서 김호곤 감독이 이끌던 울산이 이적시장 마감 직전 영입에 성공하였다.
2.3. 울산 현대
2009년 여름,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낸 울산 현대로 이적하며 국내로 복귀했다.복귀전이 공교롭게도 친정팀 포항과 맞붙는 동해안더비였는데, 당시 포항의 파리아스 감독은 팀의 최효진이 오범석보다 뛰어난 선수라고 도발했지만, 포항은 결국 울산에게 패해 8연승을 저지당하였다.
2010시즌에는 김동진도 국내 복귀를 울산으로 하게 되면서 울산의 국대급 풀백 조합을 완성할 수가 있었고, 김동진과 함께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을 하여 2010 시즌 울산의 리그 4위에 공헌하게 되면서 후에 둘은 같이 나란히 2010 남아공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여담으로 울산 시절 때 유독 동해안더비에서 계속 좋은 활약을 해 당시 포항 팬들의 혈압을 높였었다.
2.4.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1 시즌을 앞두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강민수와 트레이드되었다. 시즌 초반에는 주로 라이트백으로 출전하였으나, 시즌 중반 이후 중앙 수비가 붕괴하자 센터백으로 보직을 변경하여 매 경기 안정적인 수비력과 위협적인 오버래핑을 선보이며 수원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단, 패스 타이밍과 정확도에서 불확실한 면을 많이 보이는 것이 단점이다. 2015 시즌 김은선의 부상으로 인해 4-1-4-1 포메이션에서 혼자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았을 때 이 단점이 크게 드러났다.
2015년 2월 25일, AFC 챔피언스 리그 우라와 레즈전에서 크로스가 엄청난 궤적으로 빨려 들어가며 동점골을 터뜨려 2:1 역전승에 기여했다.
리그 개막전에서 분을 참지 못해 퇴장을 당했으나 그 후 좋은 퍼포먼스로 팀의 ACL 16강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5월 16일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전반 4분 정영총이 기절하자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재빠른 응급 처치로 기도를 확보하며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11]
시즌 후반기에는 부상으로 폼이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원래부터 스피드에 크게 강점이 있는 선수도 아니었는데[12] 30대로 접어들다 보니 스피드가 있는 선수에게 약한 모습을 보임에 따라 파울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게다가 유망주 라이트백 신세계의 등장으로 팀 내 입지까지 잃어 가기 시작했다.
2.4.1. 경찰청 축구단-안산 경찰청 축구단(군 복무)
군 복무를 위해 동료 양상민과 함께 2013 시즌부터 2시즌간 뛰었다.2.5. 항저우 뤼청
2015 시즌 종료 후 FA 신분이 되었고,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항저우 뤼청으로 이적했다.그러나 많은 출전 기회를 받지 못했고, 1년 만에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났다.
2.6. 강원 FC
2016년 12월 11일, 강원 FC로 이적했다. 계약 기간은 2년.강원에서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고 있지만 가끔씩 라이트백, 센터백으로도 나온다. 노장답게 노련한 템포 조절과 헌신적인 플레이로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2018 시즌 종료 후 강원과 2년 재계약을 채결했다.
2019 시즌 8라운드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전반 6분 만에 햄스트링 부상으로 아웃되었다.
2020 시즌 주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시즌 개막 후 2경기 연속 명단 제외되었다.
2020년 5월 21일,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하였다.[13] 구단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영상으로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중 눈물을 흘리는 등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 팬들도 좋은 마음으로 보내 주었다.
2.7. 포항 스틸러스 2기
2020년 6월 2일 포항 이적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왔고, 얼마 후 포항에서 공식 발표가 나오면서 13년 만에 친정 팀으로 복귀하였다.
2007~2008년 당시 이적 과정에서의 마찰로 인해 올드 팬들에게는 이미지가 안 좋지만, 한편으로는 양쪽 측면의 주전 풀백 김용환, 심상민이 모두 입대한 상황인 데다 현재 포항의 약점인 풀백,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 자원의 얇은 뎁스를 모두 커버할 수 있는 백업 자원으로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왕 왔으니 일단 사과부터 하고 열심히 해라"는 긍정적인 의견도 있다. 하지만 원래 포항이 노렸다고 알려진 신형민, 정재용에 비하면 확실히 부족하다는 점[14]에서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다.[15]
2.7.1. 2020 시즌
9라운드 광주 FC전에서 레프트백으로 선발 출전하며 포항 복귀전을 치렀고, 노련한 수비로 엄원상을 지워 버리면서 팀의 무실점 승리에 기여했다.FA컵 3라운드 경주시민축구단전에서 최영준과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고, 후반 56분 오닐이 박재우와 교체 투입되면서 레프트백으로 들어갔다.
시즌이 끝난후 11월 27일 포항 스틸러스 구단은 오범석하고 1년 재계약 했다고 공식발표했다.
2.7.2. 2021 시즌
2021 시즌 전북으로 임대복귀한 최영준에 이어 포항 스틸러스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구단 역대 최초 유스 출신 주장이 됐다.시즌이 끝나고 신광훈, 신진호를 비롯한 포항에서 뛰었던 선수들이 돌아오자 오범석의 역할이 더 커졌다.
2021년 시즌 5라운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홈 경기에서 전반 37분에 어이없는 백 패스 실수를 범하면서 정상빈에게 데뷔골을 허용하는 원흉이 되었고, 결국 전반전만 소화하고 교체되었다.
8라운드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경기에서 주장완장을 달고 선발 출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17라운드 수원 FC전까지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교체로 나오거나 결장, 심지어 명단 제외되기도 했다.
그러다 18라운드 동해안 더비와 19라운드 광주 FC전에 선발 출전했음에도 주장 완장은 강상우가 달고 있었다. 아마 주전에서 밀린 후로 주장직을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21 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1차전 랏차부리 미트르 폴 FC전에서 다시 완장을 달고 선발 출전했다. 하지만 종아리 근육 부상으로 전반만 소화하고 교체 아웃되었고, 2차전에는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3차전에는 명단에 복귀했지만 결장했다. 이후 4, 5, 6차전 모두 벤치에서 대기한 채 출전하지 못했다.
11월 24일 오범석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12월 4일 K리그1 마지막 라운드인 FC 서울과의 홈경기를 끝으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다고 알렸다. 오범석은 30일 스포츠조선과의 전화인터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선수생활을 더 하고 싶었다. 김기동 감독님께서도 더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해주셨다"며 "제대로 뛰고 싶었는데, 내가 원하는 수준의 축구를 하고 싶은데, 이제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몸이 한 박자씩 늦더라. 경험으로 공을 차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였다.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첫째가 4~5년전에 아빠, 나 초등학교 6학년 될 때까지는 선수로 뛰어'라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게 됐다"고 말했다. 기사
12월 4일 리그 38라운드 FC 서울과의 마지막 홈경기에서 전반 32분, 본인의 데뷔 시절 등번호인 32번을 달고 있는 박승욱과 교체 아웃되면서 397경기를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2021시즌 포항에서의 기록은 리그와 FA컵, ACL을 합쳐 19경기 출전. 비록 2007-2008년에 안좋은 감정을 남겼으나 다시 포항에 돌아와서는 주장을 맡으며 포항을 위해 헌신했고 이에 포항 팬들 역시 2021 시즌 마지막 홈경기 은퇴식에서 오범석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주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마무리 지었다.
3. 국가대표 경력
3.1. 청소년 대표팀
브라질 유학을 다녀온 후인 2001년부터 박성화 감독에 눈에 띄어 월반하며 U-18 팀에 합류했다.포항에 입단한 이후 본격적으로 U-20팀에 합류했고 2003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아랍에미리트에 참가해 주전 우측 윙백으로 활약했고, 16강 진출에 기여했다.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3.2.1. 본프레레호
이후 2005년 겨울, 대표팀 합류를 고사한 최진철을 대신해 미국 전지훈련을 떠나는 본프레레호에 합류하며 첫 국가대표팀에 소집됐다. 그리고 1월 16일, 콜롬비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여름에 열린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도 부름을 받으며 일본과의 3차전 풀타임 출전했다.3.2.2. 베어벡호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나고 부임한 핌 베어벡 감독에게 중용을 받았다. 베어벡호 첫 경기인 대만전 교체출전 하는 등, 꾸준히 베어벡호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선 조원희와 이종민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결승골을 기록하는 등, 주전으로 나섰다.3.2.2.1. 2007 AFC 아시안컵 아세안
1 이운재 C · 2 송종국 · 3 김진규 · 4 김동진 · 6 이호 · 10 이천수 · 11 이근호 · 12 이동국 · 13 김치곤 · 14 김상식 · 15 김치우 · 16 오범석 · 17 김정우 18 우성용 · 19 염기훈 · 20 손대호 · 21 김용대 · 22 강민수 · 23 정성룡 · 27 오장은 |
핌 베어벡 코치 압신 고트비 · 홍명보 · 코사 |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송종국을 누르고 주전 우측 풀백으로 낙점받으며 출전하여 공수 양면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한국의 3위 달성에 기여했다.
3.2.3. 허정무호
이후 부임한 허정무 감독 체제에서도 꾸준히 차출되었고, 이종민, 최효진, 조원희, 최철순, 신광훈 등 수준급 우측 풀백이 즐비한 당시 대표팀 자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국대 주전 멤버로 자리 잡았다.2009년 10월 14일, 세네갈과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넣었다. 하지만, 풀백으로 전향한 차두리가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 복귀했고, 차두리 특유의 피지컬과 비교돼 주전 경쟁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수비력은 오범석이 더 좋았지만, 월드컵에 출전하는 세계적인 공격수들을 상대하기에는 피지컬의 열세가 컸다. 때문에 수비 스킬이 떨어지고 지공에 약한 대신 피지컬이 우수한 차두리에게 밀린 것이다.
3.2.3.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
허정무 정해성 스태프 박태하 · 김현태 |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명단에도 선발되었다.
조별리그 2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 선발 출전했다. 허정무 감독은 인터뷰에서 그리스전 차두리의 플레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오범석을 출전시켰다고 설명했지만 결과는...
곤잘로 이과인, 앙헬 디 마리아, 리오넬 메시, 카를로스 테베즈, 세르히오 아궤로 등에게 말 그대로 완벽하게 발렸다. 국내 언론들도 오범석 카드는 실패라며 열심히 까고 있다. 특히 디 마리아는 정말 자기 집 안방처럼 오범석 뒷공간을 휘젓고 다녔다.
물론, 저 때 당시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스쿼드의 이름값을 보면 오범석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풀백이었던 마이콘, 다니 아우베스가 와도 아르헨티나의 막강한 공격력을 막아내는 것이 쉽지 않기는 했다. 오범석 본인도 메시를 막아내는 것이 정말 어려웠던 것을 스스로 인정했고, 전력질주를 해도 메시가 공을 몰고 드리블하는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고 했었다.[16]
아르헨티나전 이후 오범석은 그야말로 역적보다 더한 매국노 수준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지만, 사실 이 경기는 오범석 한 명만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이 날의 패배는 허정무호가 갖고 있던 크고 작은 불안 요소들이 누적되어 있던 것이 월드 클래스급 팀을 만나자, 적나라하게 문제점이 까발려진 참사라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일단 레프트백 이영표의 경우 1:1 수비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협력 수비로 상대를 사전에 옥죄는 스타일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미드필더와 연계 플레이가 필요하고 그만큼 중원에 과부하가 걸린다.
그런데,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사용한 변형 4-5-1 포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좌우 측면으로 볼을 전개했을 때 2선에서 침투할 때까지 볼을 간수하면서 패스를 넣어 주는 선수가 키를 쥐고 있었다. 즉, 이영표를 괴롭히면 왼쪽 윙어 염기훈까지 세트로 무력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성용, 김정우의 중원 조합이 테베즈마저 놓치면서 어쩔 수 없이 박지성까지 내려와야 했다. 이것은 결국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압도적인 기량 탓이었지, 단지 오범석 한 명에게만 책임을 미룰 수는 없었다.
반대로 오른쪽 윙어 이청용은 세 개의 폐를 가진 사나이가 아니었을 뿐더러, 이청용마저 오범석과 세트로 묶여 버리면 사실상 반코트 경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청용은 최대한 공격적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고[17] 오범석이 홀로 방대한 구역을 책임지게 되었다.
경기를 보면 한국 선수들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개인기 한 두 동작에 너무 쉽게 제껴지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으며, 수비라인도 계속해서 무너졌다. 특히 후반전 실점장면에서는 체력과 집중력을 모두 잃은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그간 스쿼드에 비해 경기력이 별로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개개인들의 컨디션과 호흡이 매우 좋아보였고, 전반적으로 경기의 운도 본인들쪽으로 오는 등 충분히 승리할만한 경기를보여줬다.
결과적으로, 모든 실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전 패배에 큰 지분을 담당한 염기훈과 함께 앞글자를 따서 한국에선 오염라인이라고 불리면서 죽도록 까였다. 미국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 역시 "차두리를 빼고 오범석을 넣은 것이 패착이다." 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다만, 차두리는 피지컬과 돌파력이 장점이고 수비력은 그렇데 좋은 선수는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강팀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내보내기엔 애매했던 측면도 있었다. 그래서, 차두리가 메시를 상대로 전담마킹했어도 그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수는 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경솔한 태도 역시 문제였는데, 보통은 월드컵같이 큰 무대에서 참패를 하게 되면 "내가 부족해서 졌다." 라고 자책하는 것이 맞지만,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정말 잘하더라.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 특히나 전술적으로 매우 뛰어났다. 정말 최고의 선수들이었다" 라는 경솔한 망언까지 했다.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이 오범석의 인터뷰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대표팀이 한참 기세를 올릴 때도 결코 이쪽 페이스에 말리지 않으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가, 적기라고 판단한 한순간 달려들어 단숨에 오른쪽 수비를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몰아넣는 능력은...과연 클래스가 있는 팀이라 스쿼드와 기량 차이가 너무 심했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4:1이라는 결과에서 눈을 돌려 경기를 복기하면, 전반 17분 박주영의 불운한 자책골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리듬이 좋았으나, 이후 경기가 급속도로 꼬이면서 전원이 삽질을 거듭하고 33분 추가 실점까지 허용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농락당한 경기 내용에 비하면 의외로 잘 버텼으며, 심지어 전반 종료 직전에 추격골까지 넣었다. 이후 후반전에 기세를 올렸지만, 후반 13분 염기훈의 슛이 빗나가는 순간 전원이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정신줄을 놓는다. 이 때부터는 아르헨티나 공격진의 일방적인 순회 공연이었고, 후반 31~35분 연속 실점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386세대 이상의 중장년층 팬들은 데자뷰를 느꼈을 장면인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게 5:0으로 참패했을 때도 저 패턴으로 쉽게 당했다. 이게 단순히 오범석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엄연한 실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가 한계점을 넘은 순간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또 다른 악재는, 이런 상황에서 감독이 허정무였다. 넷상의 악평과는 달리 실제 허정무 감독은 대한민국 역사상 둘째 가라면 서러운 전술가이다. 다만, 한 가지 심각한 단점은 임기응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에 맞춰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해 오는데, 상대가 예상대로 나오지 않으면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마라도나가 들고 나온 다이아몬드 4-4-2는 선수들의 기량이 우월할 경우 허정무가 들고나온 4-2-3-1을 카운터 치기 딱 좋은 포메이션이다. 거기에 초장부터 자책골로 분위기를 내준 데다, 우려했던 메시는 그럭저럭 잡았지만 마라도나가 날린 회심의 일격은 테베스와 디 마리아였고 중원까지 마스체라노에게 무너졌다.
이렇게 이 날 중원 - 수비 조직력 전반에 걸쳐서 문제가 있었던 만큼 오범석 한 명의 책임만으로 몰아붙이기는 어렵다. 오범석이 이 날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1:4로 대패한 것이 마치 오범석 혼자 잘못한 탓인 양 몰아가는 것은 너무한 것이라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사실 축구 모르는 사람들이 봐도 질만 하니까 진 경기였다. 물론, 오범석이 이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것이 아닌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이다.
당시 국대 부동의 왼쪽 풀백이었던 이영표가 상대했던 건 '메시'였다. 그 '메시'를 꽁꽁 묶어서 수비했던 이영표와 너무 비교되게 털렸다. 당시 경기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영표가 메시를 막기 위해 오버래핑도 거의 안했고 메시 수비에만 전념했다. 그렇다면 오범석이 디 마리아 한 명만이라도 잘 막았으면 그렇게 욕은 먹지 않았을 것이지만, 오범석의 수비는 아르헨 왼쪽 공격의 그 누구도 막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이영표한테 탈탈 털린 메시가 왼쪽으로 가서 어시스트를 했을 정도다. 물애초부터 스쿼드와 기량 차이가 너무 심해서 어쩔수 없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오범석이 메시를 못 막은 것에 대해서 실드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의견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서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내용이다. 최전성기 시절의 메시를 막아낼 수 있는 수비수가 세상에 거의 없고 오범석에게서 이영표 정도의 수비력을 기대한 것은 아니겠지만 위에도 나왔다시피 오범석은 오른쪽 풀백이면서도 중앙에 있는 메시만 바라보면서 플레이를 했던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메시에게 3명가량 마킹이 붙어있어서 마킹 인원은 충분했을 때도 무리해서 마킹하러 가느라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오른쪽 라인은 고속도로처럼 뚫려버렸다.
오범석이 메시를 마킹하러 나간 동안 오범석이 커버해야 했던 공간에 우리나라 선수는 한 명도 없고 세 명의 아르헨티나 선수가 메시에게 공을 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던 것을 보면...만약 오범석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면 아르헨티나에게 오른쪽을 그 정도로 4골이나 유린당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에 오범석 본인은 개인 유투브 채널에서 "내가 최전성기 시절의 리오넬 메시를 못 막아서 욕을 먹은 것이 억울하긴 했지만, 누가 어려운 것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내가 메시를 막을 수 있었으면 남아공 월드컵 끝나고 곧바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을 것이다." 라면서 자조하기도 했다. 글1, 글2 그리고, 훗날 오범석은 리오넬 메시가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을 때, "나는 너가 크게 될 줄 알았다." 라고 축하하기도 했다. 글
염기훈은 나중에 오범석의 개인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서 아르헨티나전에 대한 기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영상1, 영상2
3.2.4. 최강희호
조광래호에는 조광래의 철저한 외면과 아래의 인맥 논란 등 외적인 이유까지 겹치면서 단 한 번도 뽑히지 못했으나, 최강희호 출범 후 다시 뽑혔다. 카타르 원정에서는 최효진이, 레바논과의 홈 경기에서는 오범석이 각각 선발 출전했다.2013년 3월 카타르와의 홈경기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이후 부임한 홍명보, 슈틸리케호에는 선발되지 못하며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했다.
4. 해설 위원 경력
은퇴 직후인 2022년부터 한국프로축구연맹 자체 중계진으로 skySports의 K리그 해설진으로 합류했다. 2022년 2월 19일의 K리그1 개막전 전북 현대 모터스 vs 수원 FC 경기에 박문성과 콤비를 이뤄 해설자 데뷔를 가진다. 2022년 4월 3일에는 前소속팀인 포항 스틸러스의 홈구장 포항 스틸야드에서 FC 서울과의 경기를 해설하였다.[18]5. 예능인 경력
골 때리는 그녀들 시즌 2 챌린지 리그를 앞두고 FC 원더우먼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원더우먼에서는 호화 라인업에도 불구하고 챌린지리그 3위에 그치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으나, 시즌 2 종료 후 감독 재배치 추첨을 통해 이적한 FC 구척장신에서는 초보 티를 탈피하고 2시즌 연속 4강에 머물렀던 팀을 창단 이후 처음으로 슈퍼리그 결승전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FC 월드 클라쓰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첫 대회 SBS 컵대회는 6강에 머물렀으나 시즌 5 슈퍼리그에서는 FC 액셔니스타를 무려 6:1로 대파하고[19] 결승까지 올라 FC 스트리밍파이터마저 3:1로 제압하며 월드클라쓰의 슈퍼리그 우승을 이끈다. 이어 열린 FC 발라드림[20]과의 챔피언 매치마저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더블을 달성한다.6. 지도자 경력
6.1. 파주시민축구단
2023년 12월 22일, K3리그 소속의 파주시민축구단 감독에 선임되면서 본격적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2024년 K리그1, 2, K3리그를 통틀어 최연소 감독이 됐다.
2024년 3월 3일 리그 3라운드 창원 원정에서 류연준의 결승골로 2:1 역전승을 거두며 감독 데뷔 첫 승을 거뒀다.
파주시민축구단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11승 9무 10패로 리그 8위로 마감하였다.
시즌이 끝나고 정경호 감독이 부임한 강원 FC 코치진으로 합류한다고 한다.
7. 논란
7.1. 인맥?
오범석의 아버지 오세권은 1979년 멕시코 유니버시아드 및 메르데카 대회 참가 선발 팀 골키퍼 출신으로 은퇴 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 위원, 내셔널리그 사무국장, 김희태축구센터 감독 등을 지냈으며 현재 대한축구협회 공정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이런 배경 탓인지, 아르헨티나전의 참패 이후 오범석이 인맥으로 뽑혔다는 음모론이 마구 돌았다. 그러나, 오범석은 현역 시절 K리그 풀백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매우 뛰어난 수비수였다.
실제로, 오범석이 포항에서 활약했을 당시 적극 기용했던 감독이 세르지우 파리아스였다. 파리아스가 오범석을 그저 인맥때문에 썼을 리는 없고, 그냥 오범석의 실력과 잠재력을 보고 주전으로 기용한 것이다. 애초부터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에 오범석이 승선한 과정이 해당 위치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선수 2명을 뽑아 놓고 막판에 오범석을 최종적으로 뽑은 것이다.
만약, 음모론이 사실이라면 일단 오범석이 만 37세라는, 축구선수로써 기량이 점점 쇠퇴하면서 대단히 불리해지는 신체조건의 나이까지 K리그와 국외 리그에서 쌓은 활약상과 성적은 전부 다 뻥카였고 날조였다는 말도 안 되는 전제조건도 성립해야 한다. 일단은 기본적으로 K리그에서 보여준 활약만 봤을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도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범석은 고등학교도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일부러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오범석의 아버지 오세권은 울산 학성고등학교 감독으로 있었는데, 학성중학교 출신의 오범석은 학성고로 진학하게 되면 아버지의 빽으로 들어갔다는 등의 인맥 논란이 나올까봐 일부러 포철공고로 진학을 했다.# 게다가 포항은 울산의 동해안 더비가 되는 라이벌 팀이다. 의도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빽이라는 소리가 나오기 힘든 곳으로 진학을 한 것이다. 오범석 본인도 개인 유투브 채널에서 "내가 아버지가 부임했던 학성고로 진학하지 않고 포철공고로 진학한 것이 축구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라고 이야기했다.
한국 축구를 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포철공고같은 프로 유스 선수들이 활약하는 축구 명문 고등학교는 전국구급으로 유명한 유소년 국대 선수들처럼 난다긴다 하는 국내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입학하는 최상위권 수준의 전통이 있는 축구 명문 고등학교인데 과연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었을까? 결국, 비슷한 기량이라면 굳이 인맥 논란이 나올만한 오범석을 뽑았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오범석은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고 항상 성실하게 했던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오범석은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아버지, 저 아버지 빽으로 들어간 거 아니죠?"라고 물어봤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인맥설이 퍼질까봐 항상 노심초사했었고 "포철공고로 진학한 것을 후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아마도 더더욱 본인이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도 분명하다. 월드컵에서 부진함과 미숙했던 인터뷰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인맥 논란 운운하는 것은 그냥 인신공격이나 다름없다.
첨언하자면,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오른쪽 풀백은 이영표였는데,[21] 당시 왼쪽 풀백에서는 김동진이 국가대표팀 감독들에게 중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영표가 오른쪽으로 밀려서 활약하였다.
조광래 감독이 레바논 쇼크로 인해서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도중에 경질이 된 다음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맥으로 국가대표에 뽑히는 선수가 있다고 폭로하였다. 하지만, 축협에선 "왜 이 선수 안 뽑냐!"라고 대놓고 난리를 쳤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고 그 선수가 누군지는 언론에서 쉽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네티즌들이 "국대 뽑힐 당시의 상황" 및 기타 등등 상황을 추정해볼 때 거의 오범석으로 굳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레바논 쇼크로 말미암아 끝내 조광래 감독이 경질되면서, 작심한 듯 언론을 통하여 대한축구협회를 디스했고 협회 역시 이를 해명이라고 쓰고 사실상 반박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오범석 논란이 다시금 점화되었다.
조광래는 "이회택이 거의 강제로 오범석을 쓰라고 했으며, 이를 거부하자 행정지원 제한 등 보복성 조치가 가해졌다." 라고 주장했으며, 이회택은 "조광래가 측면 수비수가 없다고 하길래 오범석을 거론하면서 한 번 써보는 게 어떠냐?" 라고 추천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일단 확인된 사실로만 놓고 보면, 조광래가 변명할 거리는 전혀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여론이다. 해당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조광래는 리그 정상급 중미 김재성을 오른쪽 풀백으로 기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면서 말로는 '오른쪽 풀백이 없다' 라고 언플을 한 것이다.
이 때, 기술위원회가 오범석을 추천한 것이 외압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원래 기술위원회라는 조직은 이런 상황에서 경기와 선수들의 스탯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좋은 인재들을 추천하는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기관이다. 게다가, 오범석이 당시 조광래의 말대로 국대 선발이 힘든 상태였던 것도 아니라는 것도 K리그를 보는 골수 팬들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당장에 오범석 군입대를 한 이후부터 수원의 우측 수비가 구멍이 뻥뻥 뚫린 것만 봐도 그렇다.
종합하면 조광래의 주장에 불과하다. 확실히 확인할 수 없는 보복성 조치는 차치하고 오범석 기용 논란에 대해서는 적어도 기술위원회가 소임을 다한 것이라 이 부분만큼은 조광래가 대놓고 불평할 거리가 못 된다.
이전부터 FC 코리아들은 선수 발탁을 가지고 인맥이다 뭐다 징징거리면서 히딩크와 비교하면서 축협이 간섭하는 탓에 축구 발전이 안 된다면서 사실을 호도하는 중이다. 이는 2021년 현재도 여전히 축사국 등의 한국 축구에 대해 잘 모르는 인간들이 축협과 선수 및 감독들을 욕하면서 쓰는 궤변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K리그 및 축구를 오랫동안 지켜본 팬들은 조광래의 감독 시절의 이런 점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
7.2. 러시아 진출 논란
2007년 파리아스 감독 아래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던 오범석에게 국내외 여러팀들이 관심을 보였고, 당시 J리그 요코하마 FC에서 6개월 임대 제의가 온다. 포항에서는 잡으려 했지만, 선수 측에서 가겠다는 의지가 강했고[22] 결국 포항은 10억원 이상의 이적료를 부르다가 요코하마의 6개월 임대 제의를 수락했다.그런데 임대 복귀 후 겨울 이적 시장 기간에 뜬금없이 언론사에서 '오범석, 러시아 사마라와 협상 중'이라는 기사가 났고, 계약기간이 남아있던 소속팀 포항에서는 금시초문이었다. 포항에서는 이전부터 팀을 떠나고 싶어하며 계속 잡음을 일으키는 오범석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K리그의 대표적인 악법으로 불리는 로컬 룰[23]을 이용해 성남과 협상을 진행하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오범석 입장에서는 이에 수긍할 수 없었고, FIFA에 제소하겠다는 오범석과 임의탈퇴를 신청하겠다는 포항 사이 언플과 진흙탕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범석 사태에 대한 정리
결국 오범석은 본인이 원하는 러시아 진출을 이루었다. 포항은 이 여파로 성남에게 거액의 위약금까지 지불해야 할 상황이 되었고, 당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던 유망주 골키퍼 정성룡을 헐값에 보내게 된다.
게다가, 이후 국내로 복귀할 때 포항의 최대 라이벌인 울산으로 이적하여 복귀전에서 골을 넣는 등 또 한 번 친정 팀에 비수를 꽂았다.
위 사건으로 인해 포항 팬들에게는 통수라며 금지어 취급을 받는다. 오범석 기사가 뜨면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일단 까고 시작한다.
2020 시즌 여름 이적 시장에서 포항 스틸러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8. 여담
- 부친이 대구광역시 출신이고, 오범석 본인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경상도에서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고교 대선배 이동국처럼 영남 방언 억양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 표준어를 구사한다.[24]
- 2015년 5월 16일, K리그 클래식 11라운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제주 유나이티드의 경기에서 제주의 정영총이 헤딩 경합 상황에서 같은 팀의 강수일과 충돌해 기절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25] 바로 옆에서 상황을 목격한 오범석이 신속한 응급 처치로 기도를 확보하고 의료진 투입을 요청하면서 정영총은 경기장에서 의식을 회복하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1] 한국프로축구연맹 자체 중계[2] 2005~2007, 2021[3] 2020[4] 2003~2004[5] 2011~2012[6] 2014[7] 2015[8] 후에 이 이적에 대해 오범석이 본인 유튜브 채널에서 직접 밝히길 원래는 요코하마측에서 당시 아시안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오범석의 바이아웃인 6억원으로 완전영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이에 본인또한 첫 해외진출을 원했으나 당시 포항에서 한창 시즌중 이적은 절대 안된다며 실랑이를 하게 되면서 결국 어찌어찌 임대로 가게 된것이라고 하였다.[9] 이 이적썰도 밝히기를 요코하마에서 포항으로 복귀하고 12월에 바로 러시아에서 오퍼를 받게 되면서 다시 이적을 준비하던 와중에 갑자기 포항에서 당시 K리그 로컬룰의 의해 느닷없이 성남 일화로 강제로 보낼려고 시도를 하여 이에 오범석 본인과 구단간에 계속 힘든 싸움을 펼치다가 결국 이적시장이 닫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러시아로 가게 된것이라고 밝혔다.[10] 이때 구단과 계속 마찰을 벌인 일때매 현재까지도 포항팬들이 이 시기 본인의 해외이적에 관해서 많은 오해들을 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11] 참고로 앰뷸런스는 늑장 대응으로 비판을 받았다. 여기서 듣다 보면 심판이 계속 손짓을 하는데도 안 오고 늑장 부리다가 관중석에서 빨리 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겨우 들어왔다.[12] 정확히 말하자면, 오범석은 발이 느린 선수가 절대로 아니고 오범석 이상으로 발이 빠른 축구선수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렇다.[13] 선수 측에서 먼저 출전 부족을 이유로 계약 해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기사[14] 둘 다 접촉은 있었으나 신형민은 10억 정도의 연봉을 제시한 친정 팀 전북에 재입단했고, 정재용 역시 포항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한 부리람 유나이티드를 선택했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연봉을 삭감한 오범석과 계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오범석 본인은 "연봉 삭감하고 가지 않았고 더 받고 이적했다" 라고 해명했다.[15] 그러나 현재는 신형민과 정재용 모두 각 소속팀에서 좋지 못한 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면 오히려 오범석 영입이 더 이득이라고 볼수도 있다.[16] 사실, 오범석은 축구 팬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절대로 발이 느린 선수가 아닌데도 이렇게 말을 한 것이다.[17] 결국 이청용은 상대 골키퍼와 수비진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볼을 가로채서 골을 넣었다.[18] 은퇴 후 前소속팀의 홈구장에서 첫 해설이다. 은퇴 전 마지막 경기 상대가 FC 서울이었다.[19] 이전까지 월드클라쓰는 액셔니스타한테 4전 전패를 당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한풀이를 했다.[20] 컵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나왔다.[21] 송종국의 경우에는 2005년 수원 입단 이후 부상에 시달리면서 폼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토고전에서도 매우 부진했다. 그리고 토고전 이후 좌측 김동진, 우측 이영표를 출전시키면서 경기에 나오지도 못했다.[22] 포항 팬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에 태업한다는 설도 도는 등 팀 분위기를 상당히 흐려 놓았다고 한다.[23] 리그 내의 타 팀이 현 소속 팀에서 주는 연봉보다 높은 연봉을 부를 경우, 구단 간 합의가 된 후에 선수는 이적을 거부할 수 없다. 윤빛가람, 김호남 사태 등의 원조격.[24] 정확히는 이동국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표준어를 구사한다.[25] 달려오던 강수일과 몸통, 머리가 같이 부딪치면서 중심을 완전히 잃고 머리부터 그라운드에 떨어진 아찔한 상황이었다.
분류
- 1984년 출생
- 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축구 선수 자녀
- 학성중학교(울산) 출신
- 포항제철고등학교 출신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선수
- 풀백
- 센터백
- 수비형 미드필더
- 2003년 데뷔
- 2021년 은퇴
- 요코하마 FC/은퇴, 이적
- PFC 크릴리야 소베토프 사마라/은퇴, 이적
- 울산 HD FC/은퇴, 이적
- 수원 삼성 블루윙즈/은퇴, 이적
- 경찰 축구단/전역
- 경찰 축구단/역대 주장
- 저장 FC/은퇴, 이적
- 강원 FC/은퇴, 이적
- 강원 FC/역대 주장
- 포항 스틸러스/은퇴, 이적
- 포항 스틸러스/역대 주장
- 대한민국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참가 선수
- 대한민국의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
-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참가 선수
-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참가 선수
-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참가 선수
- 대한민국의 FIFA U-20 월드컵 참가 선수
- 2003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아랍에미리트 참가 선수
- 축구 해설자
- 대한민국의 남성 방송인
- 운동선수 출신 방송인
- 대한민국의 남성 유튜버
- 운동선수 출신 유튜버
- 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