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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근(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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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도근
金都根 | Kim Doh-Keun
출생 1972년 3월 2일 ([age(1972-03-02)]세)
강원도 강릉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78kg
직업 축구선수(유틸리티 플레이어[1] / 은퇴)
축구 감독
학력 강릉성덕초 - 강릉중 - 강릉상고 - 한양대
소속 선수 전남 드래곤즈 (1995~2000)
베르디 가와사키 (2000)
세레소 오사카 (2001)
전남 드래곤즈 (2001~200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5)
경남 FC (2006)
감독 한양대학교 (2007 / 코치)
광양제철고등학교 (2008 /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09~2011 / 2군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12~2014 / 코치)
상주 상무 (2015 / 코치)
경남 FC (2016 / 코치)
안후이 허페이 구이관 FC(2016~2017)
중남 코디온 FC (2017~2020 / 총감독)
허베이 FC (2021 / 수석 코치)
강릉시민축구단 (2022~)
기타 강원 FC (2023~ / 홍보대사)
국가대표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2경기 1골 (대한민국 / 1993~2003)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기타

[clearfix]

1. 개요

전남 드래곤즈에서 10년간 선수 생활을 했던 레전드. 현재 허베이 FC 수석 코치를 거쳐 강릉시민축구단의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고등학교까지는 공격수였지만 한양대에서 수비수로 전환했다. 1학년 때 올림픽 대표팀에 처음 차출되었는데, 수비수로 차출된 것이다.

대표팀에서 입은 부상으로 4학년 때는 1년을 통째로 쉬었다.

전지 훈련에선 대우 로얄즈와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그 당시 대우가 꼴찌였기 때문에, 김도근은 대우에서 그를 지명할 줄 알았다고 하지만, 전남 드래곤즈전북 다이노스가 창단하면서 지명권 3명을 할당받게 되었고, 김도근은 전남으로 가게 되었다. 여담으로 전북으로 입단하게 된 선수가 바로 김도훈.

2.2. 전남 드래곤즈 1기

파일:Kimdokeun2.jpg

전남 드래곤즈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다만 첫 해에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 개막전 후반에 투입되었고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경기가 끝난 후 통증을 느끼고 당시 감독인 정병탁에게 부탁해 대구광역시에 있는 스포츠 센터로 가서 재활[2]을 했다.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전남 드래곤즈에 새로운 감독이 부임한다. 이 부임한 감독이 바로 허카우터. 허정무는 수비수였던 김도근을 설득해 측면 공격수로 활약하게 만들었다.

1999년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고 최용수 같이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낚시였다(...) 김도근의 말에 따르면 영국으로 가서 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된다고 해서 갔는데, 1주일 정도 훈련을 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시즌 중이라 1군 선수들은 경기를 뛰러 가고 나머지 잔류군과 같이 훈련을 했었다.

그렇게 10골을 집어넣고, 아디다스 컵에선 중반기까지 득점 1위를 하는 등 맹활약했는데, 한양대 후배인 이원식과 함께 대한화재 컵 득점왕 경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최문식과의 콤비 플레이가 빛을 발하던 때였다.

김봉길노상래와의 호흡이 굉장한 시너지를 만들어 내었고, 대한화재컵은 부천 SK에 내주며 준우승을, 골은 5골을 기록했지만, 이원식에게 득점왕을 내주며 2등을 기록했다. 콩라인

2.3. J리그

전남 드래곤즈에서의 활약을 보던 베르디 가와사키[3]에서 이적 문의를 해 왔다. 사실 베르디 가와사키 말고 세레소 오사카와 이미 이적 논의가 되어있는데, 무슨 일인지 바로 오사카로 가기 힘들어서 베르디로 이적했다.

당시, 베르디에는 재일교포인 이국수 총감독과 장외룡 감독, 김현석이 있어서 적응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스타일도 다르고 선수들과의 호흡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주전으로서 활약했다. 김현석이 공격을 주도하고, 김도근이 가운데에서 공격을 막으면서 볼을 배급해주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 량규사베르디 가와사키에서 데뷔했다. 2000년 후반기에 베르디로 가서 6개월을 뛰고 당초에 가려고 했던 세레소 오사카로 갔다.

세레소 오사카 시절 한솥밥을 먹은 선수들이 윤정환노정윤이다. 2001년 전반기를 소화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세레소 오사카 감독이 외국인 선수를 교체해달라고 요청[4]을 했었고 2001년 7월, 노정윤과 김도근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구단이 정함에 따라 전남 드래곤즈로 돌아오게 된다.

2.4. 전남 드래곤즈 2기

일본으로 이적한 당시 완전 이적으로 갔었던 터라 아무 팀이든 마음대로 입단할 수 있었다. 당시 부산 아이콘스의 사령탑이던 김호곤 감독을 비롯해 몇몇 구단에서 제의가 왔었고 전남 드래곤즈 보다 더 높은 연봉을 제시했지만, 김도근은 당시 전남 감독이던 이회택 감독과의 인연과 전남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결국 몇 천 만원 손해 보더라도 전남으로 갔다.

하지만, 시즌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전북 현대 전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1년여에 걸쳐 재활을 해서 2005년에 다시 복귀했다.

당시 김도근은 2002년에 3년 재계약을 했으니 2005년에 끝나는 계약을 했고, 김도근은 2년 정도 전남에서 더 뛰다가 은퇴할 계획이었다. 창단멤버로서 끝까지 뛴 다음에 은퇴하고 그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전남 프론트의 생각은 달랐고 마침 수원 삼성차범근이 김도근에게 이적 제안을 하면서 현역 연장을 원하던 김도근은 이적하게 되었다.

2.5. 수원 삼성 블루윙즈

클럽 월드컵을 노린 수원이 영입한 2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차범근 감독과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미 감독과 선수로 만난 적이 있던 점이 작용한 듯.

하지만 당시 수원은 여러 선수들 손정탁, 송종국, 마토, 김남일 등 다양한 선수들을 영입해 조직력이 약해져 있었고,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다보니 팀워크가 약했다. 결국 수원은 10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 된다. 김도근은 수원에서 그런 선수들을 잡아주는 리더십을 발휘하길 원했던 것 같지만, 김도근 역시 수원에선 이적생이라서 큰 힘을 발휘할 순 없었다.

2.6. 경남 FC

한편 경남 FC가 창단하면서 박항서 감독은 팀을 이끌 수 있는 경험 많은 선수를 원했다. 경남으로 이적한 김도근은 창단 첫 해에 주장을 하면서 경험 많은 선배로서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선수들 실업에서 온 선수들, 프로 경험이 없는 선수들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박항서는 주문했고 김도근은 묵묵히 수행했다.

경남에서도 김도근은 여러 포지션에서 경기를 수행했다. 본인은 나이를 들면서 경기를 보는 눈이 좋아졌다고 한다. 어, 혹시 이분[5]인가?
그렇게, 김도근은 K리그에서 통산 241경기에 출장해 34골-24도움을 남기고 그렇게, 현역에서 은퇴했다.

2.7. 국가대표 경력

연령별 대표팀은 거치지 않았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에 뽑힌 것이 처음이었다. 이 당시 정용환을 보고 그의 몸관리 비법[6]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 올림픽 대표팀에 뽑혔을 당시에 막내 라인[7]이었다.

모로코, 파라과이, 스웨덴과 한 조였는데, 당시 국내 여론은 해 볼만하다였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고, 결국 3무로 탈락하게 되었다.

1993년도엔 김호 감독의 부름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캐나다로 갔다. 이 당시 센터백으로 뽑혔다. 하지만 경기를 뛰지 못했다.

이후 한동안 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하다가 차범근 감독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차출했다. 대전에서 열렸던 홍콩을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른다. 이색적인 기록이 있는데 1997년 당시 한국 선수로써는 처음으로 공식 A매치에서 카나리아 군단을 상대로 골을 넣은 적이 있다.

파일:98frecnhworldcup.jpg

그리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고,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하석주의 퇴장을 커버했다.네덜란드와의 경기에도 출전했는데, 중앙에서 김도근과 마주한 선수가 바로 에드가 다비즈였다. 그리고 경기는 0:5로 처참하게 패배했다.

벨기에에 와의 경기에도 출전해서 팀은 벨기에를 1:1 무승부 탈락시켰고, 김도근은 98년 월드컵 3경기에 모두 출전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2년 CONCACAF 골드컵 골드컵에도 출전 경험이 있다. 히딩크 감독이 이끌고 있었는데 2002 한일 월드컵의 시험 같은 대회였고, 4강에 진출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김도근은 당시에 경기에 내보내지를 않기에 히딩크에게 면담 요청을 했었다. 그랬더니 히딩크가 혼쾌히 받아들이면서 한국 선수는 시키는 대로만 하는 줄 알았다며 고맙다는 말도 했었다. 그래서 김도근은 "게임을 뛰고 싶은데 왜 기용을 안해주느냐?”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고 히딩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다음 소집명단에서부터 김도근은 제외되었고, 결국 월드컵 출전도 무산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다가 코엘류 감독 시절에 잠시 대표팀에 뽑혔고 이후로는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데뷔 당시엔 센터백이지만, 공격을 풀어나갈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정용환홍명보가 이름을 올리고 있는 국가대표팀에 김호가 불러들였다.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면서 측면 공격수로 전향했는데, 허정무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면서 수비수 뿐만 아니라, 미드필더, 인사이드 포워드를 소화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점이 평가절하 당하기도 했다. 학창시절부터 프로에서까지 포지션 이곳 저곳을 누비던 김도근은 그저 땜빵용 선수라던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김도근은 좋은 의미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인정받은 것이라며 웃어넘겼다.

결론을 보면 유상철과 비슷한 의미의 유틸리티 플레이어지만, 유상철이 어떤 포지션에도 평균 이상, 완숙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뽑혔다면, 김도근은 K리그에서 먹힐 수 있는 수준급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는 의미다. 유상철이 오프더볼과 강한 피지컬, 체력 등을 바탕으로 중원을 누볐다면 김도근은 조금 더 온더볼에 치중한 플레이를 보였다.

다양한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전술이해도에 센터백 출신다운 좋은 경합능력으로 준수한 탈압박과 수비를 보여주었다. 측면과 중앙을 가리지 않고 드리블로 선수 한 두명은 제낄 수 있는 발재간도 갖추었고 무엇보다도 최고의 강점은 킥력으로, 환상적인 발리슛도 심심치 않게 나왔으며 롱패스나 스루패스에도 능한 선수였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직후 한양대학교에서 코치를 시작했다. 대학 선수들에게 프로 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위주로 코칭했다고 한다. 한양대 코치를 하면서 AFC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전남 드래곤즈에서 유소년 부터 프로까지 차근차근 코치 경험을 쌓았다가, 2015년 상주 상무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15년 12월, 김종부 감독의 부름으로 경남 FC의 코치로 부임했다.

2016년 중국 4부리그 신생팀인 허페이 크라운 FC 감독으로서 억대 연봉을 받고 부임하나, 을급리그 승격에 실패하고 감독자리에서 물러났다.[8]

2017년 중국 유소년 축구단인 하이먼 코디안 감독으로 부임하며 중국 풀뿌리 축구에 기여했는데, 이 클럽은 장쑤 중난 코디안 FC로 구단 명칭을 변경하였고, 2019년 성인팀도 창단하며 4부리그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9]

2021년 김종부 감독을 따라 허베이 FC 수석 코치로 부임하였다.

그러다가 허베이의 재정상황 악화로 팀 해체 가능성이 높아지자, 2022년 K3리그에 고향 팀인 강릉시민축구단 감독으로 부임했다.

2022년 11월 7일, 대한축구협회 P급 지도자 강습회 수강생으로 선발되었다. #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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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인 포지션은 미드필더지만 선수 시절 유상철 다음가는 유틸리티 능력을 보여줬다.[2] 당시 재활과정은 선수는 물론 구단에서도 잘 인지하지 못한 방법이기 때문에 구단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3] 그리고 조선적 선수인 량규사와 한솥밥을 먹는다.[4] 일본은 성적이 나쁘면 감독이 아니라 외국인 선수를 먼저 교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김도근이 인터뷰에서 언급했다.[5] "몸은 느려지는데 머리는 더욱 빨라진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완숙해지면서 볼 수 있는게 늘어나고, 수행하는 역할이 늘어난다는 것이다.[6] 술과 담배는 일절 하지 않고, 쉬는 시간엔 다음 경기를 위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7] 이 당시 멤버가 노정윤, 서정원, 신태용 등이 있었고 막내에는 김도근과 곽경근이 있었다. 가장 막내가 바로 이운재.[8] 구단은 17시즌 준우승으로 을급리그(3부)로 승격하나 재정문제로 2018년 해체한다.[9] 중난 코디안 FC의 연령별, 성인팀에 소속된 선수는 300여명에 이르며 왠만한 프로산하 유스보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