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호주 오픈 남자 단식 우승자 | ||||
1977년 1월 로스코 태너 | → | 1977년 12월 비타스 게룰라이티스 | → | 1978년 기예르모 빌라스 |
비타우타스 케빈 게룰라이티스 (Vytautas Kevin Gerulaitis) | |
출생 | 1954년 1월 26일 |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 | |
사망 | 1994년 9월 17일 (향년 40세) |
미국 뉴욕 주 사우스햄튼 | |
국적 | 미국 |
프로데뷔 | 1971년 |
은퇴 | 1986년 |
신장 | 183cm (6 ft 0 in) |
사용 손 | 오른손 (원핸드 백핸드) |
ATP 싱글 랭킹 | 최고 3위[1] |
ATP 더블 랭킹 | 최고 43위[2] |
개인전 통산 성적 | 535승 232패 (69.8%) |
복식 통산 성적 | 164승 123패 |
개인전 타이틀 획득 | 26회 |
복식 타이틀 획득 | 8회 |
통산 상금 획득 | $2,778,748 |
1. 선수 소개
1977년부터 1982년까지 5위권을 유지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던 선수. The Lithuanian Lion(리투아니아 사자)라는 별명이 있었다.'횃불(firebrand)'[4]이라고 불렸던 게룰라이티스는 선수 시절 유쾌하고 시원시원하게 할 말 다 하는 성격 때문에 발이 넓었고 친한 동료 선수들이 많았던 한편 이리저리 이슈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당시 여자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를 도발하면서 여자 테니스는 남자 테니스에 상대가 안 된다며 약올리기도 했었다. 나브라틸로바가 남자테니스 100위권 선수에게 패배하는 데에 집 한 채를 걸겠다고도 했다. 이후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게룰라이티스의 도발&조롱에 나브라틸로바가 응수하며 실제로 둘이 복식 매치를 했고, 결과는 나브라틸로바 팀의 승리.[5]
일리에 너스타세가 보드카에 담뱃재, 썩은 빵을 섞어서 만든 폭탄주를 게룰라이티스가 들이켰다는 일화도 있다.
때로는 이러한 막나가는 성격이 지나칠 때도 있어서 경기 중 욕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심할 때는 벌금도 부과받을 정도였다. 라인 판정에 불만을 품고 진행중이던 경기를 그냥 그만둬버린 적도 있다. #
비외른 보리, 지미 코너스, 존 매켄로 등의 당대 톱클래스 선수들에 매번 패배하는 수문장 이미지가 있지만, 주변인들의 언급에 따르면 게룰라이티스 본인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
2. 커리어
- 단식 통산 타이틀: 26회
- 단식 통산 전적: 535승 232패
- 단식 랭킹: 최고 3위
- 복식 통산 타이틀: 8회
- 복식 통산 전적: 164승 123패
- 복식 랭킹: 최고 43위
그랜드슬램 대회
- 호주오픈: 우승 (1977년)
- 프랑스오픈: 준우승 (1980년)
- 윔블던: 4강 (1977, 1978년)
- US오픈: 준우승 (1979년)
기타 대회
비타스 게룰라이티스의 연도별 메이저대회 성적표
연도 | 호주 | 프랑스 | 윔블던 | US |
1971 | 1라운드 | |||
1972 | 불참 | 불참 | 불참 | 2라운드 |
1973 | 불참 | 불참 | 불참 | 1라운드 |
1974 | 불참 | 불참 | 1라운드 | 2라운드 |
1975 | 불참 | 불참 | 1라운드 | 2라운드 |
1976 | 불참 | 불참 | 8강 | 4라운드 |
1977 | 우승 | 불참 | 4강 | 4라운드 |
1978 | 불참 | 불참 | 4강 | 4강 |
1979 | 불참 | 4강 | 1라운드 | 준우승 |
1980 | 1라운드 | 준우승 | 4라운드 | 2라운드 |
1981 | 불참 | 1라운드 | 4라운드 | 4강 |
1982 | 불참 | 8강 | 8강 | 1라운드 |
1983 | 2라운드 | 1라운드 | 2라운드 | 3라운드 |
1984 | 2라운드 | 2라운드 | 4라운드 | 4라운드 |
1985 | 1라운드 | 3라운드 | 3라운드 | 불참 |
3. 선수 경력
1977년 윔블던 4강에서 비외른 보리와 풀세트 접전을 치르면서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명경기를 만들어냈다. 그동안 보리에게 절대적으로 약했던 게룰라이티스가 혈전을 치르며 드디어 보리를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끝내 그 벽을 넘지 못하고 2-3(4-6, 6-3, 3-6, 6-3, 6-8)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2006년에는 이 경기가 DVD로 발매되기도 했다.연말에 열린 호주오픈에서는 미국의 존 로이드를 풀세트 접전 끝에 이기고 첫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1978년에는 세계랭킹 3위에 오르면서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갱신했다.
1979년에 US 오픈 결승에 오르지만 같은 뉴욕 출신의 존 매켄로에게 패배하여 준우승했다. 그해 연말 왕중왕전 준결승에서는 상대전적 0승 16패였던 지미 코너스를 드디어 잡아내며 문서 상단에 소개된 그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결승에서 만난 비외른 보리는 넘지 못했다.
1980년 롤랑가로스 오픈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적이었던 지미 코너스를 다시 한 번 잡아내고 결승에 올랐으나, 이번에도 비외른 보리에게 밀려서 패배하고 말았다.
1981년 US오픈에서는 준결승전에서 존 매켄로와의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패배한다. 연말 왕중왕전에서는 다시 한 번 결승까지 올랐지만 이번에는 젊은 신예 이반 렌들에게 2-0에서 2-3으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며 대역전패했다.
4. 은퇴 이후
1986년 은퇴 이후, 1988년부터 미국 방송사에서 테니스 정규 해설위원으로 자리잡아 사망하기 전까지 해설하는 일을 했었다.4.1. 사망
1994년 9월 17일, 4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당시 게룰라이티스가 사우스햄튼에 위치한 친구 집에 놀러갔었는데, 수영장 물을 데우는 히터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일산화탄소가 계속해서 배출되었고, 자고 있었던 게룰라이티스의 방까지 가스가 퍼져서 결국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이다.
게룰라이티스의 사망 이후 그 히터를 설치한 기사와 히터를 제작한 회사가 기소되었지만,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무죄 판결받았다.
5. 플레이 스타일
당시 대부분의 선수가 그랬듯이 서브앤 발리 스타일의 게임 방식을 선호했다. 빠른 반응속도로 네트에서의 플레이가 좋았던 한편, 발도 아주 빨라서 코트 커버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선수였다고 한다. #6. 여담
- 리투아니아 이민자 출신의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 덕분에 리투아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게룰라이티스의 사망 이후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에서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기기도 했고, 그를 기리기 위한 테니스 센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 1994년 로마 오픈 대회 동안 피트 샘프라스의 코치를 잠깐 맡은 적이 있었다. 게룰라이스의 코칭이 효과가 있었는지 흙에서 약했던 샘프라스가 다시는 없을 로마 오픈의 우승컵을 차지했다.
- 컬럼비아 대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지만 1975년에 테니스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했다.
7. 외부 링크
- (영문 위키백과) Vitas Gerulaitis
- (한글 위키백과) 비터스 제럴라이티스
- (ATP 홈페이지) Vitas Gerulaitis Overview
- (ITF 홈페이지) Vitas Gerulaitis
- (데이비스컵 홈페이지) Vitas Gerulaitis
- Findagrave_Vitas-Gerulaitis
[1] 1978.2.27.[2] 1985.05.20.[3] 1979년 ATP 파이널스 4강전에서 게룰라이티스가 16전 17기 끝에 지미 코너스를 이긴 후 남긴 명언. 현재까지도 해외 각종 스포츠 커뮤니티에서 종종 쓰일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문구다. 게룰라이티스가 지미 코너스에게는 끝내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비외른 보리를 상대로는 승리 한 번 없이 패배를 거듭했고, 2년 후 1981년에는 끝내 17연패를 당하고 말았다...[4] 사회적으로 언행이 과격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5] 참고로 당시 게룰라이티스의 파트너 바비 릭스는 67세였다. # 바비 릭스는 과거 빌리 진 킹과의 성별 대결로 유명했다.[6] 과거에는 연말 왕중왕전 대회가 2개였다. 현재까지도 열리는 ATP 파이널스 말고 다른 한 대회가 이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