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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4 22:40:33

비타스 게룰라이티스

파일:호주 오픈 로고.svg
역대 호주 오픈 남자 단식 우승자
1977년 1월
파일:미국 국기.svg 로스코 태너
1977년 12월
파일:미국 국기.svg 비타스 게룰라이티스
1978년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기예르모 빌라스
파일:vitas_gerulaitis_sportsthat.jpg
비타우타스 케빈 게룰라이티스
(Vytautas Kevin Gerulaitis)
출생 1954년 1월 26일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
사망 1994년 9월 17일 (향년 40세)
미국 뉴욕 주 사우스햄튼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프로데뷔 1971년
은퇴 1986년
신장 183cm (6 ft 0 in)
사용 손 오른손 (원핸드 백핸드)
ATP 싱글 랭킹 최고 3위[1]
ATP 더블 랭킹 최고 43위[2]
개인전 통산 성적 535승 232패 (69.8%)
복식 통산 성적 164승 123패
개인전 타이틀 획득 26회
복식 타이틀 획득 8회
통산 상금 획득 $2,778,748
Nobody beats Vitas Gerulaitis 17 times in a row!
비타스 게룰라이티스를 17번 연속으로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3]

1. 선수 소개2. 커리어3. 선수 경력4. 은퇴 이후
4.1. 사망
5. 플레이 스타일6. 여담7. 외부 링크

1. 선수 소개

1977년부터 1982년까지 5위권을 유지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던 선수. The Lithuanian Lion(리투아니아 사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횃불(firebrand)'[4]이라고 불렸던 게룰라이티스는 선수 시절 유쾌하고 시원시원하게 할 말 다 하는 성격 때문에 발이 넓었고 친한 동료 선수들이 많았던 한편 이리저리 이슈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당시 여자 테니스 스타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를 도발하면서 여자 테니스는 남자 테니스에 상대가 안 된다며 약올리기도 했었다. 나브라틸로바가 남자테니스 100위권 선수에게 패배하는 데에 집 한 채를 걸겠다고도 했다. 이후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게룰라이티스의 도발&조롱에 나브라틸로바가 응수하며 실제로 둘이 복식 매치를 했고, 결과는 나브라틸로바 팀의 승리.[5]

일리에 너스타세가 보드카에 담뱃재, 썩은 빵을 섞어서 만든 폭탄주를 게룰라이티스가 들이켰다는 일화도 있다.

때로는 이러한 막나가는 성격이 지나칠 때도 있어서 경기 중 욕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심할 때는 벌금도 부과받을 정도였다. 라인 판정에 불만을 품고 진행중이던 경기를 그냥 그만둬버린 적도 있다. #

비외른 보리, 지미 코너스, 존 매켄로 등의 당대 톱클래스 선수들에 매번 패배하는 수문장 이미지가 있지만, 주변인들의 언급에 따르면 게룰라이티스 본인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

2. 커리어


그랜드슬램 대회
기타 대회
비타스 게룰라이티스의 연도별 메이저대회 성적표
연도 호주 프랑스 윔블던 US
1971 1라운드
1972 불참 불참 불참 2라운드
1973 불참 불참 불참 1라운드
1974 불참 불참 1라운드 2라운드
1975 불참 불참 1라운드 2라운드
1976 불참 불참 8강 4라운드
1977 우승 불참 4강 4라운드
1978 불참 불참 4강 4강
1979 불참 4강 1라운드 준우승
1980 1라운드 준우승 4라운드 2라운드
1981 불참 1라운드 4라운드 4강
1982 불참 8강 8강 1라운드
1983 2라운드 1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
1984 2라운드 2라운드 4라운드 4라운드
1985 1라운드 3라운드 3라운드 불참

3. 선수 경력

1977년 윔블던 4강에서 비외른 보리와 풀세트 접전을 치르면서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명경기를 만들어냈다. 그동안 보리에게 절대적으로 약했던 게룰라이티스가 혈전을 치르며 드디어 보리를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끝내 그 벽을 넘지 못하고 2-3(4-6, 6-3, 3-6, 6-3, 6-8)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2006년에는 이 경기가 DVD로 발매되기도 했다.

연말에 열린 호주오픈에서는 미국의 존 로이드를 풀세트 접전 끝에 이기고 첫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1978년에는 세계랭킹 3위에 오르면서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갱신했다.

1979년에 US 오픈 결승에 오르지만 같은 뉴욕 출신의 존 매켄로에게 패배하여 준우승했다. 그해 연말 왕중왕전 준결승에서는 상대전적 0승 16패였던 지미 코너스를 드디어 잡아내며 문서 상단에 소개된 그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결승에서 만난 비외른 보리는 넘지 못했다.

1980년 롤랑가로스 오픈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적이었던 지미 코너스를 다시 한 번 잡아내고 결승에 올랐으나, 이번에도 비외른 보리에게 밀려서 패배하고 말았다.

1981년 US오픈에서는 준결승전에서 존 매켄로와의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패배한다. 연말 왕중왕전에서는 다시 한 번 결승까지 올랐지만 이번에는 젊은 신예 이반 렌들에게 2-0에서 2-3으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며 대역전패했다.

4. 은퇴 이후

1986년 은퇴 이후, 1988년부터 미국 방송사에서 테니스 정규 해설위원으로 자리잡아 사망하기 전까지 해설하는 일을 했었다.

4.1. 사망

1994년 9월 17일, 4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당시 게룰라이티스가 사우스햄튼에 위치한 친구 집에 놀러갔었는데, 수영장 물을 데우는 히터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일산화탄소가 계속해서 배출되었고, 자고 있었던 게룰라이티스의 방까지 가스가 퍼져서 결국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이다.

게룰라이티스의 사망 이후 그 히터를 설치한 기사와 히터를 제작한 회사가 기소되었지만,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무죄 판결받았다.

5. 플레이 스타일

당시 대부분의 선수가 그랬듯이 서브앤 발리 스타일의 게임 방식을 선호했다. 빠른 반응속도로 네트에서의 플레이가 좋았던 한편, 발도 아주 빨라서 코트 커버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선수였다고 한다. #

6. 여담

7. 외부 링크




[1] 1978.2.27.[2] 1985.05.20.[3] 1979년 ATP 파이널스 4강전에서 게룰라이티스가 16전 17기 끝에 지미 코너스를 이긴 후 남긴 명언. 현재까지도 해외 각종 스포츠 커뮤니티에서 종종 쓰일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문구다. 게룰라이티스가 지미 코너스에게는 끝내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비외른 보리를 상대로는 승리 한 번 없이 패배를 거듭했고, 2년 후 1981년에는 끝내 17연패를 당하고 말았다...[4] 사회적으로 언행이 과격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5] 참고로 당시 게룰라이티스의 파트너 바비 릭스는 67세였다. # 바비 릭스는 과거 빌리 진 킹과의 성별 대결로 유명했다.[6] 과거에는 연말 왕중왕전 대회가 2개였다. 현재까지도 열리는 ATP 파이널스 말고 다른 한 대회가 이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