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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8:58:40

사도신경

사도신조에서 넘어옴
1. 개요2. 유래3. 원문 및 번역4. 종파별 사용
4.1. 가톨릭4.2. 성공회4.3. 개신교4.4. 동방교회에서
5. 논란
5.1.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5.2. 라틴어 'inferos'의 해석 문제5.3. '사흘 만에' 번역 문제5.4. 거룩한 '공회'?5.5. 성인의 '통공'5.6. 성경에 수록되지 않았다
6. 사도신경 외의 신앙고백문

1. 개요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했다는 점에서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신경은 로마 교회의 세례를 위한 옛 신경이다. 이 신경의 막중한 권위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다.”[성 암브로시오, 「신경 해설」, 7: CSEL 73, 10(PL 17, 1196).]

가톨릭 교리서 제194항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신앙고백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보통 사도신경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한결같이 고백했던 참신앙의 요약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순수한 사도적 가르침으로부터 추론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 칼뱅, 『제네바 요리문답』 제15항
한자 使徒信經
라틴어 Credo/Symbolum Apostolicum
영어 Apostles' Creed
사도신경(使徒信經), 사도신조(使徒信條) 또는 종도신경(從徒信經)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문 중 하나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기본적으로 믿어야 할 교의를 요약 정리한 것으로, 언뜻 보면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간략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오래된 기원을 가진 별도의 신앙고백이다. 주로 가톨릭 등 서방교회에서 사용하고, 정교회 등 동방 교회에서는 이를 채택하고 있지 않다.

2. 유래

[Credis in Deum Patrem Omnipotentem?][1]
Credis in Christum Iesum, Filium Dei,
qui 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
et crucifixus sub Pontio Pilato et mortuus est et sepultus, et resurrexit die tertia vivus a mortuis, et ascendit in caelis et sedit ad dexteram Patris, venturus iudicare vivos et mortuos?
Credis in Spiritu Sancto, et sanctam Ecclesiam et carnis resurrectionem?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당신은 믿습니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습니까?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로마의 히폴리토, 「사도전승」, 215~17 저술[2]
본래 로마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던 신앙고백문에 기초하여 발전했다고 추정한다. 하느님의 전능함, 창세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죽음의 과정과 부활, 승천, 심판에 대한 예언, 성령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믿음,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차례로 약속한다.

2세기 무렵부터 영지주의 및 몬타누스주의 등 이단 사상이 대두되자 그리스도교가 신앙을 정립하고자 정했다고 보고, 이 신조에 의거하여 이단을 구분한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파문된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외워 이에 대한 믿음을 선서하지 못하면 곧 이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서 효과적인 신앙 검증 도구로 기능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이나이다."(마태복음 16장 16절)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하며, 사도의 신앙고백이라는 말을 사도적 권위의, 즉 성경의 내용을 잘 요약하여 권위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사도신경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방으로 선교를 위하여 흩어지기 전에 한 구절씩 붙여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에서도 이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3. 원문 및 번역

4. 종파별 사용

4.1. 가톨릭

미사 통상문에 포함된다.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 중 말씀 전례 때 강론 후 신경을 바친다. 본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암송하는 게 원칙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특히 사순 시기부활 시기에는, 이른바 사도 신경 곧 로마 교회의 세례 신경을 바칠 수 있다"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유럽이나 미국 가톨릭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미사 중에 사도신경을 들을 일이 별로 없다. 서구권 신자들 대부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익숙하고 이를 외우기 때문이다. 미사 중에 세례성사 예식이 포함될 때에는 세례서약이 사도신경을 대체한다.

4.2. 성공회

성공회도 가톨릭과 비슷하다. 일요일 감사성찬례에서는 일반적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외운다. 사도신경은 저녁때 바치는 이븐송에서 외우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이븐송에 참례하지 않는다면 별로 들을 일이 없다.

4.3. 개신교

교독문 낭송과 함께 예배의 초반에 암송한다. 전통 전례를 중시하는 교단에서는 설교/강론 후에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회한국기독교장로회의 일부 교회[3]에서는 사도신경보다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낭송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개신교의 일부 극단적 근본주의 교단(이를테면 성경침례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등)은 사도신경을 가톨릭의 잔재로 보고 배격한다. 칼뱅주의 교회는 사도신경을 배격하지 않지만 오전 예배 때 십계명을 낭송하거나 외우는 것이 교리적인 전통이었다. 한국에서도 오전 혹은 1부 예배 중에 십계명을 외우는 개혁교회가 소수 있긴 하다.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등 그리스도교에서 파생된 이단들도 나름의 이유에 따라 사도신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침례회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예배 시간에 암송하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침례교는 성경제일주의를 강조하기 때문에 신조를 거부하는 반(反)신조주의적 전통이 있다. 성경보다 신조를 더 우위에 둘 위험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이 절대적인 권위를 얻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암송함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사도신경이 성경에 없다는 점, 천주교 종교회의의 산물이라는 점도 사도신경 암송 거부의 이유이다. 그래서 많은 침례교회들이 사도신경 암송을 하지 않는다.[4] 하지만 그렇다고 침례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한다더라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사도신경 암송 거부는 침례교회의 전통일 뿐 강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 암송을 매우 강조하는 성향이 있는 한국에서는 사도신경 암송을 예배 중에 하는 침례교회들이 꽤 있다.

4.4. 동방교회에서

정교회를 비롯한 동방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쓰지 않는데, 동방교회의 전승으로 사도신경의 연원이 사도시대에 닿아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만을 사용한다.

1054년 동서 대분열 전에는 정교회와 가톨릭이 한 교회였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같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매체가 전무한 시절이었다. 따라서 동방과 서방은 각각의 관구를 세운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의 전승 계보에 따라서 시간이 지나도록 강화된 정보와 또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거나 없어진 정보의 종류가 제각각 달랐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연원에 대한 정보가 서방과 동방이 달랐다.

따라서 동서방의 1054년 동서 대분열 후 이를 봉합하기 위한 피렌체 공의회에서 동방의 에페소 대주교였던 마르코 에우제니코가 동방교회의 전승으로는 사도신경의 연원이 사도시절까지 닿아있음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미 4세기 즈음부터 사도신경이 사도시대로 연원이 닿는다고 믿었던 서방교회와 달리, 동방교회는 그러한 연원 자체를 입증할 수도 없어서, 즉 사도신경의 구절을 12사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삽입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어서 사용하지 않는다.

라틴 가톨릭에서도 미사의 기본 신앙고백문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다. 단지 사도신경을 독송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다수의 성당에서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 사도신경을 독송해왔고, 그래서 많은 신도들이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일 뿐. 다만 2013년도를 '신앙의 해'로 선포하면서 매 주일미사 때 니케아 신경을 독송하여 많은 신자들이 이 신경의 존재하는 줄 알게 되었고,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은근히 니케아 신경을 쓰는 성당이 적지 않다. 한편 대한성공회에서는 매주 감사성찬례마다 니케아 신경을 독송한다.

5. 논란

현대에 들어서는 구원파, 여호와의 증인이나 성경침례교 등과 같은 그리스도교계 신흥종교[5]를 중심으로 사도신경을 부정한다. 개신교에서도 사도신경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예배에 필요 없다는 주장은 종교개혁 시기부터 나왔다.[6]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근거로 삼는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신경을 인정하지 않는 자신의 교파를 이단으로 취급하는 다른 교파들을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 맞느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교리해석이 담겨 있기에 자유주의 신학이나 진보적 신학의 입장에서도 썩 좋아하지 않는 신앙고백일 때가 많다. 침례교에서도 사도신경을 사도신이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주기도문과 달리 사도신경이 성경에 없음은 분명하므로 사도신라고 여기며 성경보다는 덜하지만 권위는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파악한다.

5.1.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

한국 개신교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해이다.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부분의 원문 'sub Pontio Pilato'를 직역하면 '본티오 빌라도 아래에서'라는 뜻인데, 라틴어 전치사 sub을 사람 이름 앞에 사용하면 그 사람 치세에, 그 사람 시절 정도 의미가 된다.[7] 가톨릭 번역본에서는 이를 고려하여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라고 옮겼다. 성공회 번역본에서는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라고 나온다. 라틴어 문헌에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이란 뜻으로 sub Augusto라고 하는 등, 흔하게 쓰이는 어법이다.

이 부분은 한국 개신교 번역이 문제이다.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은 예수가 누구 탓으로 죽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언제 어디서를 이야기할 뿐이다. 심지어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는 아예 빌라도를 언급하지도 않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기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라며 예수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였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고 자신도 그 문제로 번민했지만, 결국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여긴다. 만약 누구의 책임으로 예수가 죽었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예수가 수동적으로 살해되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이것을 한국 개신교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빌라도가 적극적으로 예수를 박해했다는 내용이 되고 말았다. 사실 한국 개신교에서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이 고쳐지지 않는 것은 이미 관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5.2. 라틴어 'inferos'의 해석 문제

파일:Andrea di Bonaiuto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jpg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La discesa di Gesù agli inferi
Andrea di Bonaiuto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지옥에 내리사 사흗날에 죽은자 가운데로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 (한국 가톨릭, 옛 번역[8])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한국 가톨릭, 현행 번역)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한국 개신교)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대한성공회)

음부에 내리신 지 사흘 만에 (한국 루터교)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잉글랜드 국교회, Book of Common Prayer, 1662)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미국 가톨릭)

descendu aux enfers; le troisième jour est ressuscité des morts (프랑스 가톨릭)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descendit ad inferos)은 직역하면 "inferus로 하강하시어"라는 의미다. 문제는 이 inferus를 어떻게 번역하냐는 것이다.

일단 inferus는 '지옥'으로 번역되는 infernus의 유의어이자 동일 어원의 단어이기 때문에 '지옥' 내지는 어떤식으로든 '지옥'과 연결이 되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전자의 예로는 영어권 번역(inferus와 infernus를 모두 hell로 번역)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프랑스어 번역(infernus를 enfer[지옥]로, inferus를 enfers[지옥]로 번역)이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 사도신경들에서는 '지옥'이라는 의미에서 나오는 신자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이 구절을 밋밋하게 희석시키거나(한국 가톨릭) 아예 번역을 포기하고 누락하는(한국 개신교) 문제가 있다.

물론 원문은 '예수가 죄를 지었으니 지옥 벌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옥'을 겪었다는 의미이다. 곧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를 온전히 맛봄으로써, 다시 말해 원래는 죄인들이 겪는 상태인 지옥을 '죄 없는' 예수가 온전히 겪는다는 바로 그 부조리를 통해서, 인류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사도신경 원문의 본래 의미이다. 이는 단순 비유가 아니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에선 바로 이렇게 사도신경을 해석한다.
주님께서는 지옥에 내려가심으로써 피조물의 모든 부분에까지 당신의 손길이 미치게 하셨다. (...) 그 이유는 누구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로고스를 발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요, 심지어 사탄의 세계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 흔적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교부 성 아타나시우스, 《De incarn》. 45 (Patrologia Graeca 52,409C)
인간의 잘못에 대한 벌은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영혼의 징계도 포함된다. 게다가 죄란 원래 영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영혼은 하느님을 관조할 수 있는 특권을 박탈당함으로써 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이런 영혼의 형벌은 받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모든 거룩한 영혼들도 '지옥에'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모든 죄인들에게 부과된 벌을 속죄할 양이면, 죽기만을 원할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은 지옥에까지 내려가기를 원해야 했던 것이다. 이미 2세기 교부들은 이런 연대야말로 육화의 목적이요 종착점임을 분명히 표명했다. 예수가 저승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가서 당한 '죽음의 고통'은 오로지 성부께서 그를 다시 살려내심으로써 제거될 것이다.
하느님의 종servus Dei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성삼일 신학》Theologie der drei Tage, 김관희 번역,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20, p.211
그리스도께서 오직 몸의 죽음만 겪으셨다면, 아무 것도 이뤄진 게 없었을 것이다.
장 칼뱅, 《기독교 강요》 II,16,10
그분께서 지옥의 연못이라는 이름을 가진 특정 장소로 갔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9] ... "음부로 내려가셨음"에 대한 더 신뢰할만한 칼빈의 설명은,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겪어야 할 영혼의 고통을 의미한다는 설명이다: "그분께서 단지 자신의 육체만 속죄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저주받고 잃어버린 인간이 당해야 할 끔찍한 고통들을 자신의 영혼이 겪게끔 하여 더 값진 희생을 치르신 것이다!"
최병섭, 〈칼빈의 사도신경 해석〉[10]
이런 표현으로 사도신경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현대인들이 빠지기 쉬운 오해, 곧 '예수는 잠들듯이 편안하게 내세에 가서 안락하게 관광하고 돌아왔다'는 착각을 배제한다. 분명히 예수는 승리자로서 죽음을 정복하려고 지옥에 내려갔지만, 동시에 그 승리는 마치 십자가의 승리처럼 예수의 고통을 전제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단순히 죄인들이 자초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너머 그 아래에 있는 무엇을 겪으신다.”[11]
주님은 우리죄인 구원하시려
어둠의 지옥까지 내려가시어
범죄로 죽어야할 우리들에게
생명의 값진선물 베푸셨도다
가톨릭 성무일도, 성토요일 아침기도

오해를 막기 위해 사도신경의 '지옥'을 '저승'으로 의역하거나(한국 가톨릭) 아예 번역을 누락하는 것(한국 개신교)도 그 의도가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몇 분짜리 간단한 교리교육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아예 원문을 희석하거나 누락하여 번역해버리면, 원문의 어감이 전달되지 않을 뿐더러 신학적 엄밀함이 떨어지게 된다.

가령 '저승에 가시어'이라는 한국 가톨릭 번역을 보자. 신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내세관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한 가톨릭 교리의 '연옥'이든)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이다. 비록 대중신심에서 내세를 공간적으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베드로는 천국으로 갔다"라는 공간적 표현은 "베드로는 하느님과 지복직관의 상태에 있다"라는 실제 상태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descendit ad inferos"(지옥에 내리사)라는 표현 역시도, 언명 자체는 공간적인 표현이지만 죽어있는 그리스도가 맛본 비참한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사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의 최종적인 내적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분의 이타존재(Pro-existentia), 우리를 위하심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분의 자기비움과 낮춤(Kenosis)이 어느 끝까지 이르는지, 그에 대한 결정적 대답이 바로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기 때문이다. 이타존재로서 예수는 이 절대적 케노시스의 하강을 죽음이라는 깊은 심연 속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실현한다. 이로써 그분이 인간과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연대하셨는지 하는 구원 경륜의 신비가 밝혀진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인간과 연대하셨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묻힌 뒤의 현실이 가리키는 죽음 그 자체의 상태마저도 남김없이 맛보심으로써 인간의 운명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신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따라서 온전히 죽은 이로서 죽은 이들에게 가심,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온전히 겪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성금요일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곧 마지막으로 영을 아버지께 내어드림으로써(요한 19,30 참조)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정점에 도달했다면, 이제 성토요일[12]에 그분은 죽은 다음의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남김없이 맛보셔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의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 지옥 체험은 밀도에서 보면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지옥을 질적으로 넘어선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체험하는 하느님 단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단순히 죄인들이 자초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너머 그 아래에 있는 무엇을 겪으신다.”[13] 그리고 그 너머의 무엇은 발타살에 따르면, 임의의 어떤 상실이나 단절이 아니라 그 상실과 단절의 “본질적 근거”, “죄 자체”(Sünde an sich)[14]를 말한다. 여기에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 갖는 유일무이한 특성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들만이, 아버지의 품에 계신 분으로서 십자가 죽음과 그 모든 귀결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다 비우신 아들만이 아신다.”[15]

...하느님의 아들이 지옥에 내리심으로써 신적인 구원을 인간 운명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가져오신다. 그분이 남김없이, 그 이상으로 하느님 상실, 하느님 부재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그 자리가 이제 하느님께 이를 수 있는 열린 자리로 반전을 이룬다.
김혁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 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no.179(2012)

하지만 '저승'이라는 공간적 표현은 그저 공간적 표현일 뿐, 지복직관의 상태인지 '하느님을 볼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인지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3의 '공간'이라는 신화적인 언어만이 남기에 그리스도가 편안히 사후세계를 관광하고 온 것 같은 이상한 어감으로 전해진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가 24,26, 공동번역)

원문의 번역 자체를 포기하고 누락한 한국 개신교에서는 일부 학자와 목사들이 해당 구절의 원문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16]가 근거로 든 것이 바로 대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다. 대교리문답은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후에 묻힌바 되어, 제 삼일까지 죽은 자의 상태로 사망의 권세 아래 계셨다. 이를 다른 말로,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선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해,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다’고 밝히고 있다.

이 교수는 “대교리문답은 죽은 자의 상태로 사망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음부로 내려가사’로 보았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역시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을 지옥의 고통으로 해석하고 있다”며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음부’를 문자적인 혹은 장소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신조 모두 예수님이 죽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신조에 근거해 해석한다면, 이 고백이야 말로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선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창장을 역임한 바 있는 故 이정석 박사는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구가 한국교회 사도신경에서 삭제된 것에 대해) 교인의 절대다수가 이러한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 구절을 삭제해야 될 분명한 신학적 이유도 없이, 이를 회복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음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어 그는 ‘이 구절은 우리 구원의 총체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만일 이 구절을 삭제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주는 은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칼빈의 해석을 언급하며 “성경이나 신경의 해석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이 다양하거나 난해한 것이 삭제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크리스천투데이 2011-08-16 기사
사도신경과 관련해 본고는 신앙 교육의 측면에서 다음을 제안한다. 첫째로 “음부에 내려가사”가 포함된 사도신경의 원문을 회복하여야 한다. 초대 교부들이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점이 있었더라도 절대 다수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음부행에 관해 언급하고 가르쳤으며 사도신경에서 결코 누락시키지 않았다. 둘째로 “음부행”의 의미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음부행이 지닌 신학적 함의는 참으로 풍부하다. 십자가의 보혈, 매어 달림, 못박힘, 장사지냄의 항목들만이 아니라 음부행도 구속에 대한 중대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음부행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을 말하고 동시에 우리가 받아야할 지옥의 형벌을 훨씬 더 고통스럽게 받으신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어감이 좋지 않은 ‘음부’라는 표현 대신 예를 들면 ‘낮은 곳’이나 ‘지하처소’ 등의 순화적 용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이천 년 동안의 역사에서 해석이 달랐을지라도 이 구절이 등한시 된 적은 없었다. 초대 교회는 늘 설교와 양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음부행을 가르쳤고 음부에서 이루신 주님의 대속의 고난과 승리를 누렸다. 종교개혁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리문답을 통해 이를 교육하였다. 오늘날의 신앙교육은 기초적인 신앙의 진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김동주, 〈사도신경 “음부에 내려가사” 고백의 신학적 의의와 신앙교육적 제언〉 기독교교육정보 no.47(2015) :논문 초록.

한국의 개신교 교단 대부분은 이 구절이 아예 삭제된 감리회식을 따르는데[17][18] 예장 통합 새번역 사도신경에서는 삭제하면서도 이 부분을 "'장사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본문에는 없다."라는 각주로 처리했다. 이 구절을 복원해야 하지 않냐는 주장 때문에 100주년 기념교회와 예장통합 간에 싸움(이단 시비)이 일어나서 결국 100주년 기념교회가 예장통합 교단을 탈퇴했다는 비화가 있다.

5.3. '사흘 만에' 번역 문제

'사흘 만에'라는 번역 때문에 신자들조차도 흔히 예수가 저승/지옥에 3일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결코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교의 전승과 믿음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아 금요일 오후 3시 무렵에 숨을 거두었고 일요일 해뜨기 전 언젠가에 부활하였다. 그렇다면 이를 '사흘 만에' 부활하였다고 표현할 수가 없다. 이해가 안 가는 이들을 위해 풀어보자. 예수가 금요일 오후에 처형되었으므로예수가 금요일에 숨을 거두어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믿으면서 사도신경에선 이를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표현하였기에 믿음과 문구가 서로 엇나간다. 금요일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어 일요일 일출 전 언젠가에 부활했다고 하므로, 정확하게 따지면 만 하루+α시간이다. 만 하루는 넘지만 만 이틀에는 못 미치고, 통상적인 한국어식 날짜 세기로는 '이틀 만에' 부활했다고 표현해야 맞는다.

이는 라틴어로 '세 번째 날'을 뜻하는 tertia die를 곧이곧대로 옮겨서 생기는 문제이다. 원래 라틴어에서는 계산을 시작하는 날을 포함하여 헤아린다. 라틴어 표현법으로 금요일로부터 세 번째 날을 헤아린다면 금요일 당일을 첫 번째 날로 친다. 따라서 토요일은 두 번째 날, 일요일이 세 번째 날이 된다. 라틴어식 날짜 세기 방법으로는 아무런 문제의 여지가 없다.

다만 한국어에서는 계산의 시작점이 되는 날은 빼는데, 라틴어 표현을 직역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한국어로는 금요일로부터 '사흘 만에'라고 하면 당연히 월요일이 된다. 한국 가톨릭은 이 문제를 '사흗날에'라고 번역함으로써 절묘하게 넘겼다. 생각해보자. 이튿날의 다음날이 사흗날이다. 그리고 금요일의 이튿날은 토요일이니, 당연히 금요일의 사흗날은 일요일이 된다. 한국어의 구조와 라틴어 표현법 사이에서 절묘하게 해결책을 찾은 번역이다.

5.4. 거룩한 '공회'?

'거룩한 공회'의 라틴어 원문은 '(Credo)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즉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는다'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교단이 제시한 새 사도신경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과거에 '공회'라고 옮겼던 부분을 '공교회'라고 바꾸었다. '거룩한 공(교)회'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교파에 따라 상당히 민감한 분쟁거리가 된다. 보편교회 항목 참조.

위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지만, 엉뚱하게도 이 거룩한 공회가 예수를 죽게 만든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면서 사도신경을 쓰는 교단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몰고 가는 집단이 있다. 네이버에서 '사도신경 산헤드린'으로 검색하면 이 교단의 주의주장을 담은 블로그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개역성경에서 산헤드린을 '공회'라고 번역했기 때문이다(마태 26,59 참고). 물론 사도신경의 이 공회는 ecclesia, 즉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라틴어 성경에서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의회는 concilium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5.5. 성인의 '통공'

'성인의 통공(성도가 교통한다)'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보편교회 측의 해석은 전구(기독교)를 참조.

성공회에서는 이 구절이 지상 성도끼리의 교제 및 지상 성도와 천상 성도(다른 말로, 성인)와의 상통 모두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는 가톨릭과 동일하며, 그래서 성공회에서는 천주교처럼 지상 교회의 신도들과 하늘의 성인들이 서로 통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각 신도마다 세례명을 가지고[19] 각 성당마다 주보성인이 있는 것이다[20]. 또 1965년판 성공회기도서의 감사성찬례 부분에서는 '죄의 고백' 때에 외는 전구 기도문이 나온다.[21]

개신교에서는 전구에 대한 성경에 직접적 언급이 없으므로 전구를 인정하지 않고, 위의 내용을 '성인이 아닌 모든 성도와의 교제' 내지는 '지상 성도간의 교통'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예장통합 새번역 사도신경에서는 이 구절을 "성도의 교제"라고 번역하였다. 특히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교파들에서는 전적타락에 의한 이신칭의를 바탕으로 성인에의 전구를 인정하지 않는다.

5.6. 성경에 수록되지 않았다

사도신경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신념(Credo)[22]을 표현하는 정형문이다. 본래 '신경'이란 것은 세례 때 세례를 받을 후보자가 교회의 가르침에 합치하는 신앙을 믿노라 공적으로 확인하고자 사용하는 문구로, 신경의 각 구절을 세례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질답 형식으로 나누어 말하였다. 가령 성직자가 "당신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심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세례받는 이가 "나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와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답하는 식인데, 신경의 모든 구절을 이런 식으로 묻고 답하였다. 이렇게 세례 때 사용하는 신앙확인문답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구체적인 문구가 달랐는데, 이중 사도신경은 로마市 교회에서 사용하던 신앙확인문답에서 유래하였다.

세례 때 세례받는 사람의 신앙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문답하던 신앙고백이므로, 편지와 행전, 복음서 등으로만 구성된 성경에 없음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암송하면 된다는 주장은 억지이다. 빌라도 문제는 신경의 원문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아니라 '언제'인지를 설명한다는 점, 공회가 일반적인 성도의 모임을 의미하는 점 등을 들어서 사도신경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반 영국이나 미국, 서유럽 개신교 교회들 중에도 사도신경 말고 독자적으로 신앙고백문을 만들어 사용하는 곳도 있다.

한 마디로 권위 있는 신앙고백이자 성경의 해석이므로 교회에서 암송하면 안 된다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거꾸로 말해서 반드시 암송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역사적으로 명망 있는 신학자들의 저서는 연구의 가치가 있지만 그 자체가 성경으로 지정된 기록들은 아니며 그만한 권위를 줄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심지어 가톨릭에서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이후 전례개혁을 할 적에,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에서 사도신경을 합송하는 절차가 중세시대에 생겼음을 이유로 들어 미사에서 사도신경을 외우지 말자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성경 자체보다 이성적 분석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서도 전통적 권위를 지닌 신앙고백에 무조건적으로 얽매일 필요는 없다. 결국 성경은 아니지만 중요한 신앙고백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교단에 따라 중요성은 다소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걸 넘어 산헤드린 공회를 거룩하게 일컫는다는 억측을 주장하며 사도신경을 쓰는 교파를 한순간에 적그리스도로 몰아세운다고. 그런데 10년 전만 해도 사도신경을 외는 장면이 PD수첩에 나온다. 뭐 강제사항은 아니니까 암송하든 안 하든 자기들 맘이긴 하다.

다만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암송하지 않는다 해서 전부 이단은 아니다. 전통 개신교 교단 중에 침례회에서도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고, 구세군에서는 자체적으로 만든 고백문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6. 사도신경 외의 신앙고백문

사도신경/사도신조 외에도 그리스도교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 신앙고백문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성 아타나시우스 신경이 있다.

한편 개신교 교파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가를 더욱 확실히 표현하기 위하여 사도신경 대신 따로 신앙고백을 만들어 암송하는 경우도 있다. 개신교에서 신앙고백문을 새로 작성하는 의의에 대해서는 여기 참조. 이러한 현대적 신앙고백문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I believe in the inspiration of the Bible (both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s); the creation of man by the direct act of God; the incarnation and virgin birth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 His identification as the Son of God; His vicarious atonement for the sins of mankind by the shedding of His blood on the cross; the resurrection of His body from the tomb; His power to save men from sin; the new birth through the 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 and the gift of eternal life by the grace of God.
나는 성령 감동 감화의 성경(구약과 신약);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간 창조; 우리의 주님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화와 처녀로부터의 탄생;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신분;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인간의 죄를 대속; 무덤으로부터 예수 육신의 부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예수의 능력; 성령의 의한 다시 거듭남;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영생의 선물을 믿습니다.

개신교 교파 중 하나인 구세군에서는 사도신경 대신 구세군교리문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구세군 교리문

01. 우리는 신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임을 믿는다.
02. 우리는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만물의 창조자, 보존자, 통치자이시며 예배의 참 대상이심을 믿는다.
03. 우리는 하나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가 있으며 이는 본질상 동일하시고 권능과 영광으로도 동등하심을 믿는다.
0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합하여 있으며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심을 믿는다.
05. 우리는 인류의 시조가 본래 죄 없이 창조되었으나 그들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정결과 행복을 잃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것을 믿는다.
06.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는다.
07.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은 구원에 필요한 것임을 믿는다.
08.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믿는 자마다 그 안에 증거를 갖게 됨을 믿는다.
09. 우리는 구원의 상태의 지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을 계속 가져야 함을 믿는다.
10. 우리는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은 모든 신자의 특전이며 저들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 없게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살전5:23)
11. 우리는 영원한 생명, 육체의 부활, 세상 끝의 총 심판, 의인의 영원한 행복과 악인의 영원한 형벌을 믿는다.
출처 : 구세군대한본영

[1] 「히폴리토의 법규집」Canones Hippolyti을 토대로 복구한 부분.[2] 본문의 그리스어 원문은 소실되었으나 5세기 무렵의 라틴어 번역은 남아있다. 발췌한 라틴어 본문 및 한국어 번역은 『하인리히 덴칭거 :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 제10항을 따랐다.[3] 대표적으로 경동교회[4] 기독교한국침례회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인 연세중앙교회에서도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 암송을 하지 않는다.[5] 이들 집단 모두 주요 개신교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았다.[6] 그리스도의 교회(환원파)에 속한 일부 교회들도 사도신경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 대신 마태복음에 명백하게 나와있는 베드로의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을 외운다.[7] 프랑스어에서 온 수쉐프가 쉐프의 지도를 받는 요리사요, 수비드가 비드(진공)상태에서 하는 요리 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된다. 한마디로 영향권을 표현하는 전치사다.[8] 천주교요리문답[9] (발췌자 주석) 즉 지옥은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이는 칼뱅이 지옥 교리를 (혹은 최소한 사도신경의 문맥에서 '지옥' 문구를) 희석시킨 게 아니다. 아래에서 설명하듯, 가톨릭 신학에서도 개신교 신학에서도 '지옥'은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 개념이다.[10] 아울러 이 논문에선 “이 문구가 성도들에게 혼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구 자체의 책임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사람의 책임”이라며 “이번 기회를 통해 ‘음부에 내려가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다른 신조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보다 관심을 가진다면 교회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1] 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Ⅳ, Einsiedeln: Johannes, 1983, 252[12] (발췌자 주석) 이 논문의 문맥에서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과 '죽어있는 상태'를 각각 가리키는 표현이다. 곧 여기서 말하는 성토요일은 금요일 23시 59분 후의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어있는 예수를 의미한다.[13]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Ⅳ, Einsiedeln: Johannes, 1983, 252[14]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Von Balthasar antwortet Boros”, Orientierung 34, 1974, 38.[15]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Die Schlüssel des Todes und der Hölle”, SKZ 14, 1969, 198.[16] 발췌자 주석: 고신대 이성호 교수[17] 감리회에서는 '성자의 음부강하' 교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감리회로 형식화된 초기 웨슬리안 운동에서는 성공회 39개 신조에서 일부를 삭제하여 신앙의 25개 신조를 구성하였다. 이때 제거된 교리 중 성자의 음부강하가 있다.[18] 한국 개신교 선교 초창기에 장로회 측과 감리회 측 간의 합의에 의해 그 부분이 빠지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며, 그 부분이 가톨릭의 연옥 교리를 암시하는 게 아니냐는 거부감도 일부 작용하지지 않나는 설도 있다.[19] 세례명은 대개 성인들의 이름에서 따온다.[20] 예를 들어 서울주교좌성당의 주보성인은 성모 마리아와 성 니콜라고, 대학로교회의 주보성인은 성 베다이다.[21] "내가 전능하신 천주와 유복하신 마리아와 모든 성인과 너희게 고하오니, 내가 생각과 말과 행실에 죄를 많이 지었나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이러므로 유복하신 마리아와 모든 성인과 너희는 나를 위하여 천주께 기구하셔지이다."[22] 라틴어로 신경을 credo라고 하는데, 그 자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인 1인칭 단수 현재형 동사이다. 무엇을 믿는지 체계적으로 요약한 것이니, 당연히 성경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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