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 2012년 아웃룩 잡지에서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인도인’ 명단이다. 단,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그의 큰 영향력 때문에 선정인물에서 제외되었다.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 압둘 칼람 |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 자와할랄 네루 | 마더 테레사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J. R. D. 타타 | 인디라 간디 | 사친 텐둘카르 |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 라타 망게쉬카르 | |
※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color=#fff>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 ||
<colbgcolor=#000034> 본명 | 한국어 |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
영어 | Sardar Vallabhbhai Patel | |
구자라트어 | સરદાર વલ્લભભાઈ પટેલ | |
힌디어 | सरदार वल्लभ भाई पटेल | |
국적 | [[인도|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875년 10월 31일 | |
인도 제국 봄베이 주 나디아드 (現 구자라트 주 나디아드) | ||
사망 | 1950년 12월 15일 (향년 75세) | |
인도 봄베이 | ||
직업 | 정치인, 독립운동가, 법률가 | |
경력 | 인도 초대 부총리 겸 내무장관 (1947년 – 1950년) 인도군 초대 총사령관 (1947년 – 1950년) | |
정당 |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 회의 ]] ''' | |
학력 | Inns of Court[1] | |
종교 | 힌두교 | |
별칭 | 철의 사나이 | |
배우자 | 자베르바 파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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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초대 부총리 겸 내무부장관을 지낸 정치인. 간디, 네루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다.2. 상세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이지만 상대적으로 가려져있다.구자라트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파텔은 어릴적부터 재정적 어려움과 싸우면서 학교를 다녔다. 인내심이 강하고 금욕적인 성격과 별다른 욕심이 없었기에 딱히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고 주변사람들에게 별다른 기대를 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식민지 상태의 조국을 위해 무언가 큰 뜻을 품는 것 없이 그 시대의 대다수의 인도인들이 그랬듯 자신의 가족과 씨족의 자랑이 되는 것이 파텔의 목표였다. 당시 그의 목표는 일반적인 출세코스였던 영국으로 유학가서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고 역시나 자신의 힘으로 그 꿈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파텔은 남들에게 인정받는 성공한 변호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구자라트 주에는 가래톳 흑사병이 유행했는데 파텔은 병에 걸린 주변 사람들을 앞장서서 보살펴줬고 자신이 감염되었을 때는 혼자 외딴 곳으로 떠났다가 폐허가 된 힌두 사원에서 회복되었다고 한다. 파텔의 외유내강적이고 인정많은 모습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
이렇게 개인의 삶에 집중하던 파텔이지만 마하트마 간디를 만나고 나서 인생의 방향이 180도 바뀌어서 인도의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파텔과 네루의 관계는 독특했다. 날때부터 금수저 집안에 영국 귀족식 영어를 구사하던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던 네루와 자수성가한 파텔은 출생부터 정반대였는데 개인적인 성향도 그랬다. 네루가 귀족적이고 자존심이 강했던 반면 파텔은 철저하게 공적인 인물로 자신이 맡은 일이라면 궃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대할때는 차별이 없었고 항상 앞장서는 리더십으로 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처럼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을 붙여놓을 수 있던 것은 간디라는 거대한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파텔이 네루에게 정말 많은 정치적인 양보를 해왔기에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가장 극적인 예로 인도의 독립을 앞두고 초대 총리릋 정할 때 콘그레스내부 투표에서 15표 중 13표가 파텔을 지지했다. 나머지 2표는 무효였으니 사실상 몰표를 받은 셈이니 파텔의 리더십이 주변 동지들에게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자 자존심 강한 네루는 절대 이 결과를 승복할 수 없었고 따를 의사도 없었다. 파텔 밑에서 2인자가 될 바에는 당을 떠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고 간디의 경고에도 네루는 뜻을 굽힐 의지가 없았다. 그러자 간디는 파텔을 찾아갔고 파텔은 리더의 뜻에 따라 네루에게 총리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부총리로서 네루를 보좌했다. 참고로 파텔이 네루보다 14살 연상이다. 사실 콘그레스 내부에서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파텔 총리와 네루 외무장관이었다.
독립 후 수많은 소왕국으로 분열될 위기의 인도를 인도 공화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기여했다. 565개의 토후국이었던 인도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번왕들을 만나 협상했는데 내탕금으로 평생 연금 지급이라는 당근과 거부할 시에는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채찍을 구사해 설득함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그 외에도 여론과 등질만한 사안들, 국민들의 반감이 있을만한 정책은 다 파텔이 나서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네루에게는 정치적 흠결이 될 만한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서 2인자로서도 할 일을 다 해냈다.
하지만 카슈미르에 출병하는 문제를 두고 네루와 반목하며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은퇴를 결심한다. 이제 막 독립한 나라의 1인자와 2인자가 공개적으로 다투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파텔의 생각에 따라 간디에게 뜻을 전했고 두 사람은 만남을 가졌다. 1948년 1월 30일 뉴델리에서 간디는 새로운 인도에는 네루와 파텔 두 사람이 다 필요하다며 은퇴를 만류했다. 그리고 만남이 끝나고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간디는 암살당한다. 파텔은 간디가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대화한 사람이었다.
간디의 암살은 내무부 책임자였던 파텔의 책임이며 무능력의 결과라는 여론의 질타로 돌아왔다. 안그래도 평생의 구루를 잃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심장마비를 겪을 정도였는데 온 국민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니 심신이 피폐해진 파텔은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네루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30년간 독립 투쟁을 해온 동지애를 상기시키며 자신은 파텔을 누구보다 신뢰한다는 것, 간디를 잃은 지금 우리 두 사람이 갈라져서는 결코 안된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이에 파텔은 자신은 총리가 될 의사가 없음과 함께 네루에 대한 지지를 공개선언으로 화답하고 다시 한번 두 사람은 결속하게 된다.
그러나 힌두교 중심주의 성향이었던 파텔은 이슬람교가 다수인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찬성했고 파키스탄이 독립한 후에도 파키스탄을 적대시했다. 실제 간디, 네루와 함께 인도의 독립을 이끌긴 했지만 셋의 성향은 각자 달랐다. 간디는 힌두교, 이슬람교 등 종교간의 통합을 중시한 반면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였던 네루는 통합을 중시하되 철저한 세속주의를 지향했다. 반면 파텔은 힌두교를 중심으로 하여 인도를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1970년대 발흥한 힌두 극단주의의 시조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파텔은 힌두 중심주의이긴 했어도 극단주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힌두 극단주의자들이 일으킨 간디 암살 사건과 관련해 주동자 및 RSS 간부들을 전부 감옥에 넣었고 RSS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그럼에도 파텔은 현실주의자이자 통일 인도의 재분열을 막기 위해 간디에 충성하고 대신 손에 피를 묻힌 사람이다보니, 무슬림에 온정적이던 간디나 엘리트였던 네루, 대놓고 힌두교를 적대한 암베드카르와 달리 현재의 통일 인도를 만드는 역할을 직접 했고 후대 힌두 극단주의자들에 그나마 지금의 인도를 물려준 공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
3. 기타
그의 이름이 되어버린 별명 ‘사르다르’는 힌디어(또한 페르시아어에서도)로 ‘대장’을 뜻한다.파텔의 소속당은 인도 국민 회의였고 파텔 역시 딱히 오늘날 인도 인민당과는 관계가 없는 인물이지만, 성향 때문인지 지금은 힌두 극단주의 성향이 있는 보수정당인 인도 인민당에서 더 대우받는 모습도 보이며, 인도 총리인 나렌드라 모디도 이 사람을 존경한다고 한다. 얼마나 존경했는지 이 사람의 고향인 구자라트 주에 통일의 조각상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동상까지 세웠다(...).[2] 당연히 인도 내에서도 수천억 혈세 낭비, 개인 우상화라는 비판이 잇따랐지만 힌두중심주의를 자극해 표심을 결집시키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 목적이 컸기 때문에 모디 총리가 밀어붙인 결과 만들어졌다.
아마다바드 국제공항의 또다른 명칭인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국제공항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