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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4:01:06

랑발 부인

<colbgcolor=#CDC5BD><colcolor=#000000> 랑발 공비
사보이아카리냐노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사
Maria Teresa Luisa di Savoia-Carignano
파일:Madame_la_princesse_de_Lamballe.jpg
이름 이탈리아어 마리아 테레사 루이사 디 사보이아카리냐노
(Maria Teresa Luisa di Savoia-Carignano)
프랑스어 마리 테레즈 루이즈 드 사부아카리냥
(Marie Thérèse Louise de Savoie-Carignan)
출생 1749년 9월 8일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카리냐노 궁전
사망 1792년 9월 3일 (향년 42세)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배우자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1767년 결혼 / 1768년 사망)
아버지 카리냐노 공 루이지 비토리오
어머니 헤센로텐부르크의 크리스티네 공녀
형제 카를로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레오폴다, 폴리세나, 가브리엘라, 에우제니오, 카테리나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결혼2.2. 왕비의 최측근2.3. 비참한 최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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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세기 프랑스 왕국의 귀족.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충직한 친구로 유명하다.

2. 생애

2.1. 결혼

파일:The Prince of Lamballe.png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
17살이던 1767년 루이 14세의 서증손자인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1747 ~ 1768)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각각 사르데냐 왕가과 프랑스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으로, 둘의 결혼은 이상적인 결합으로 여겨졌다. 일설에 따르면 랑발 공은 미래의 신부가 빨리 보고 싶어 시종으로 분장한 뒤 꽃을 전달하러 왔다고 하며 처음 부인과 만났다고 한다. 결혼식 직전에 신랑을 본 랑발 부인은 깜짝 놀랐는데,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을 느꼈기 때문에 기뻐했다고 한다.

랑발 공은 도박 중독과 여성 편력으로 20살이 되기 전부터 평판이 안 좋았다. 부부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랑발 공은 신나게 애인들을 만들며 문란한 생활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남편인 랑발 공은 성병에 걸려 사망했다. 후계자가 없어 툴루즈 백작+랑발 공작위도 그대로 단절된 것은 덤. 원칙적으로 랑발 부인은 수녀원에 들어가야 했으나 18살에 과부가 된 며느리가 안쓰러웠던 시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1725 ~ 1793)[1]과 시누이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1753 ~ 1821)[2]의 도움으로 궁정에 머무를 수 있었다.

2.2. 왕비의 최측근

파일:Princesse de Lamballe.jpg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게 책을 읽어주는 랑발 부인

1770년 5월 14일 프랑스의 왕세자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했다. 랑발 부인은 촌수 상으로 루이 16세의 8촌 작은할머니 뻘[3]이었으므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가 되었고,[4] 낯선 프랑스에서 외로움과 중압감에 시달리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중하면서 다정했던 랑발 부인을 무척 좋아했다. 왕세자비의 총애와 더불어 왕세자의 남동생들이 연이어 사르데냐 왕가와 통혼하면서[5] 프랑스 궁중에서 랑발 부인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랑발 부인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1774년 루이 16세가 즉위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랑발 부인을 시녀장 바로 위의 직위인 궁녀장[6]으로 임명했다. 왕비와 만나려는 사람들, 왕비에게 전해지는 모든 문서, 서신들은 랑발 부인을 거쳐갔다. 궁인들은 이에 불만을 표했는데, 이런 중대한 자리에 오르기에 랑발 부인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또한 50,000 크라운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연봉도 시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몇몇 사람들의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랑발 부인을 향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임은 굳건했다.

그러나 1776년 이후 폴리냑 공작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까워지면서 왕비의 최측근 자리를 내어줘야 했다. 궁녀장의 자리 또한 폴리냑 공작부인의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랑발 부인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좋은 친구 사이를 유지했으며, 궁녀장 자리와는 상관없이 폴리냑 공작부인과도 나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한편 궁밖에서는 랑발 부인이 왕비의 동성 애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근거는 없는 찌라시였다. 반군주주의 선전 활동으로 랑발 부인과 마리 앙투아네트를 묘사한 음란한 그림이나 글이 민간에서 퍼져나갔다.[7]

2.3. 비참한 최후

파일:Princess_Lamballe_Gaetano_Ferri.jpg
랑발 부인의 죽음, 가에타노 페리 作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많은 귀족들과 왕족들이 해외로 망명했다. 랑발 부인은 소식을 듣자마자 국왕 부부가 연금되어 있던 튈르리 궁전으로 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셨다. 왕비의 최측근이었던 랑발 부인 또한 민중에게 왕족 못지않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1792년 8월에 랑발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탕플 탑에 갇혔다.

이후 라호루스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9월 대학살 때 군중에 의해 끌려 나왔다. 군중은 랑발 부인에게 혁명의 정당성과 자유, 그리고 평등을 인정하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향한 증오를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랑발 부인은 "전자는 기꺼이 하겠으나 후자는 내 마음이 거부하니 차마 하지 못하겠군요."라고 대답하며 끝까지 맹세를 거부했다.[8] 분노한 군중 중 한 명이 쇠망치로 랑발 부인의 머리를 가격했다. 뒤이어 군중들에게 두들겨 맞고 날붙이에 찔린 랑발 부인은 숨이 끊어졌다. 군중은 랑발 부인의 머리를 꼬챙이에 꽂아 파리를 행진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는 탕플 탑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광경을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랑발 부인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1년 후, 랑발 부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혁명 재판소의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3. 여담



[1] 본명은 루이 장 마리 드 부르봉(Louis Jean Marie de Bourbon). 루이 14세의 손자(몽테스팡 후작부인과의 사생아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1678 ~ 1737)의 아들)다.[2] 오빠 랑발 공이 자손도 없이 죽자 툴루즈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가 되었으며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와 혼인하여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었다. 루이필리프 1세의 어머니이기도 하며 루이필리프 1세 국왕은 부모 양쪽으로 루이 14세의 후손이기도 하다.[3] 그러나 나이상으로는 루이 16세보다 고작 5살,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고작 6살 많았으며 루이 16세의 요절한 이복누나 마리 테레즈(1746 ~ 1748)는 랑발 부인보다도 3살 더 많았다.[4] 유럽의 귀족 여성에게 있어 왕비의 시녀가 되는 것은 가장 큰 영예 중 하나였고, 아무나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전술했듯이 시누이 루이즈가 당시 프랑스 왕정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기혼 여성이었기에 이 인연으로 시녀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5]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 루이는 샤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딸 마리아 주세피나와, 아르투아 백작 샤를은 마리아 주세피나의 동생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했다.[6] 정확히는 왕비 가정 기관 총감(쉬랭탕당트)이며 왕비를 대신해 시녀들에 대한 명령 철회 및 지시도 가능한 큰 직위였다. 그러나 지나친 급여와 특혜 문제로 루이 15세 때 폐지되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부활시켰다. 그만큼 랑발 부인에 대한 마리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7] 사실 당시 혁명파의 선전 활동은 왕비의 모든 여성 측근들이 왕비와 동성애 관계라고 몰아갔다.[8] 이때 시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이 보낸 사람이 맹세를 하라고 말했지만 랑발 부인은 그에게 왕비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답했다고 한다.[9] 1749~1793. 본명은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 남편은 폴리냑 백작 쥘 드 폴리냑(1746~1817). 3남인 쥘(1780~1847)은 철저한 왕당파가 되어 샤를 10세 휘하 외무장관으로서 공화파 타도에 힘을 기울이다가 7월 혁명으로 모든 권력을 잃고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가석방되어 살다가 죽었다.[10] 샤를로트는 이후 무도회에서 공작에게 강제로 손키스를 당하자 이성을 잃고 투신자살하며 짧은 생을 마감한다.[11] 작중 묘사로 봐도, 경박하다는 것 말고는 그냥 흔히 쾌활하고 신나는 것들을 즐기는 외향적인 친구로 묘사된다. 왕실 전문 헤어 디자이너 레오나르와도 말 놓고 수다를 즐기는 등, 소위 인싸력도 좋은 편이다.[12] 한편으로는 프티 트리아농에서는 마리 일행과 농가 생활에 무척 즐거워하는 등, 의외로 소박한 것에도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인다.[13] 바스티유 탈환 이래 가장 선호된 귀족 처형법은 목을 잘라 매다는 것이고 랑발 부인의 경우 정도가 과해서 세간에 회자된 것인데, 그마저 능가한 엽기 처형을 했다면 당연히 전 유럽에 보도되었겠지만, 프랑스 상황을 예의주시한 주변 왕정 혹은 공화제에 호의적인 유럽 국가들을 통틀어 나라 밖에선 단 한 건의 공식 보도조차 없었다.[14]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주리 사형수 감옥에 수감되어 처형되기 전까지 기른 빠삐용 품종의 강아지를 함께 보살피고 식사를 배식해 주는 잡무를 맡아 잠시 머물렀던 여성이 있는데, 로잘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랑발 부인의 죽음을 전해듣고서 그 충격으로 하혈하고 말수가 줄어든 앙투아네트를 가엾게 여겨 머무는 동안 친절히 대해 주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이케다 리요코는 이 실존인물을 대체역사 만화인 베르사유의 장미의 주요 등장인물 로잘리 라 몰리에르로 재창작했다.[15] 그 전에도 망명이 있었지만 랑발 부인의 죽음은 뒤바리 부인의 처형과 함께 동산과 부동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 프랑스 귀족들의 망명러시가 급격히 늘어난 결정타가 되었으며, 오히려 사적 제재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켜 혁명이 끝난 뒤 지도원수들의 추가 처형과 탄핵이 이어지는 뜻밖의 나비 효과가 되었다. 나비 효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파리의 유력 귀족들이 망명해 떠난 자리를 부유한 시골 귀족들이 차지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살롱과 예술, 기술 공임으로 부유해진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세력들이 득세하는 요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