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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1:44:24

이케다 리요코

이케다 리요코
池田理代子 | Riyoko Ikeda
파일:201910_08_01.jpg
본명 이케다 리요코 ([ruby(池田理代子, ruby=いけだ りよこ)])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생 1947년 12월 28일 ([age(1947-12-28)]세)
오사카부 오사카시 아베노구
직업 만화가, 성악가
수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2009년)
서명 파일:이케다 리요코 서명.jp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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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colbgcolor=#fff,#1f2023>도쿄교육대학 (문학부 철학과 / 중퇴)
도쿄음악대학 (성악과 / 졸업)
혈액형 AB형
고향 치바현 카시와시
거주지 시즈오카현 아타미시
배우자 카쿠 가게히데[1](賀来景英)(1995년 결혼)
데뷔 장미 저택의 소녀 (1967년)
장르 순정만화 (역사물)
활동 기간 1967년 – 현재 }}}}}}}}}

1. 개요2. 생애3. 작품 특징, 화풍4. 주요 작품5. 여담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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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만화가, 성악가.

순정만화계의 전설 중 한 명. 대표작은 베르사이유의 장미오르페우스의 창으로, 이 작품으로 일본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를 휩쓸었다.

2. 생애

원래 학자가 꿈이어서 도쿄교육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지만 '여자 주제에'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보수적인 아버지가 학비를 1년만 주었고 결국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이 만화였다.

젊은 시절 한때는 일본공산당의 청년조직 민주청년학생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78년 일본공산당 서기당장이었던 후와 테츠조의 선거 팸플릿을 그려준 적도 있다. # 이렇게만 들으면 극좌 운동권이었나 싶겠지만, 이케다 리요코가 대학생이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일본공산당과 그 산하조직 민청은 학교본부 편에 서서 전공투 운동권을 각목으로 때려잡던 반권 집단이었다. 동갑내기인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이런 행태에 환멸해서 민청을 탈퇴하고 전공투로 전향했다.

이 점은 이케다 리요코가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가 흔히 68운동이라고 불리는 학생운동의 전성기였다는 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미국+서유럽=제1세계 국가>의 학생운동에서 공산당이나 사회당 등 기성 좌파정당의 산하조직은 온건파 또는 개량주의자나 타협주의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고 보다 급진적인 강경파 성향을 가진 학생들은 흔히 신좌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의 예를 보자면 무당파 성향의 전공투나 좀 더 강한 이념적(이론적) 지향을 보인 경우 일본 신좌파에 속하는 조직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시대 출신 인물로 극좌 과격파라는 딱지를 달고 싶으면 이케다 리요코와 동년배(2살 차이)인 시게노부 후사코처럼 도시 게릴라에 가담해서 총기 탈취하고 경찰과 무장항쟁 정도는 벌여 줘야 하고 그 정도는 하기 싫고 그냥 운동권 소리만 듣고 싶으면 전공투 등에 참여해서 경찰과 가두 전투를 벌이거나 시설을 점거하는 정도의 활동을 한 번쯤은 해 주어야 한다. 우경화된 기성 정당의 청년조직에 들어가 활동했다는 정도면 이 시대 기준으로는 그냥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평범한 젊은이 수준이었다고 봐야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슈테판 츠바이크마리 앙투아네트 전기를 읽고, 그것에 감명받아 평소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 흥미를 갖고 있던 그녀는 이를 작품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부 편집자에게 "그런 건 여자아이들에게 먹히지 않아"란 소리를 들었지만 "인기 없으면 바로 끝낸다"는 조건으로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는 "반드시 히트해 보이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의 다짐대로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1972년 첫 연재 후 약 2년간의 연재기간 동안 빅히트를 했으며, 순정만화계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등극했다.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주인공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앙드레 그랑디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age(1972-01-01)]년이 지난 지금까지 음료, 의류, 자동차, 빠칭코의 광고 모델로 등장하며 작품을 모티브로 한 화장품까지 상품화될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문제는 너무 라이센스를 남발해서 뜬금없는 성형외과 광고에도 오스칼 캐릭터가 이용되는 등 좋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오르페우스의 창 이후로는 단편 위주 혹은 성악가 활동을 하고 있다.

다케미야 케이코 등과 함께 일본 소녀만화계의 방향성을 확립하였다고 일컬어지는 24년조(24年組)에 소속했다.

이른 나이에 불임과 갱년기 장애가 와서 삶의 목표를 잃고 고민하다가, 47세의 나이에 성악에 입문해 음악대학[2]에 들어간 뒤 졸업하고 성악가로도 활동한다. 이제는 성악가로서의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으며, 개인 공식 홈페이지에도 꾸준히 성악활동에 관한 글을 올리고 있다. 이 때문에 잠시 절필하기도 했으나 1999년 니벨룽겐의 반지를 만화화하면서 다시 복귀해 지금도 성악활동과 겸하며 꾸준히 그리고 있다.

역사를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안중근과 같은 훌륭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1996년 출간한 ‘역사의 그림자 속의 남자들’이 바로 한국 영웅들에 관한 책이다.#

2007년에는 한국 드라마 <태왕사신기> 만화판을 그리기도 했다.

2008년 베르사이유의 장미프랑스의 문화를 알린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파일:이케다리요코1.jpg

젊은 시절엔 연예인 뺨치는 미모와 몸매로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에이스를 노려라의 야마모토 스미카 작가나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타케우치 나오코 등등 리요코처럼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주로 활동한 여성만화가들은 재색을 모두 겸비한 실력파가 많기로 유명했다.

2010년대 기준으로는 만화보다는 일러스트와 성악 위주로 활동했다. 주로 영화 관련 콜라보레이션 일러스트를 그렸다. 아시가르 파라하디의 누구나 아는 비밀 일본 개봉 축전을 그리기도 했다.

1970년대 때 비에른 안드레센을 처음 접했을 때 그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그의 얼굴에 무언가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후 그를 모델로 베르사이유의 장미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오르페우스의 창유리우스 폰 아렌스마이야[3]를 만들었다. 디어 브라더의 아사카 레이는 전작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에 비에른영향은 간접적으로 받았다. 2010년대 초반에 한 미국 남성이 비에른에게 그가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의 모델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는 농담으로 여겼으나, 2021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이케다 리요코와 만났을 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케다 리요코는 처음에는 긴장을 했지만 이후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줬고, 그림 2장을 선물했다. 한글 번역

개인 사생활이지만 이혼을 3번 했으며 일본의 고위관료와 불륜을 2번이나 했다. 본인의 만화 캐릭터들처럼 격정적인 사랑을 하는 것 같다. 특히 내각관방 부장관을 역임한 마쓰야 소이치로와의 1984년 불륜 소동이 유명하다. 해당영상 (영상 시작부터 1분 6초까지가 관련 내용)

3. 작품 특징, 화풍

근세 유럽을 배경으로 삼아 격정적인 로맨스를 담아내는 것은 당대 일본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방식 중 하나였고 그녀도 일단은 이 노선을 따라갔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역사의 격동 속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밀어 넣고 실제 역사 속의 인물들을 담아내면서 여타 작가들과 차별되는 면모를 드러냈고 이를 통해 캐릭터들의 비극적인 로맨스 역시 실제 역사적 사건들과 결부시키면서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가 만드는 비극으로 승화시켰다.

그녀가 보여준 역사성과 순정만화적 요소의 적극적 결합은 1980년대에 등장하는 한국 순정만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순정만화 하면 딱 떠오르는 화려하고 '샤방샤방'한 분위기이면서도, 디테일이 매우 뛰어난 편은 아니고 캐릭터들에게 해칭 표현도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간단하고 깔끔한 그림체를 가지고 있다. 순정만화 그림체들이 도장 찍기라며 까이는 반면 이케다의 만화를 보면 모든 캐릭터들의 외모에 개성이 있는 편이다.

극도로 마른 체형의 캐릭터들을 추구하는데, 그녀가 그리는 모든 미형 캐릭터들은 7~8등신 내지는 9등신 비율이다.

놀라운 점은 베르사이유의 장미 연재를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그림 공부를 해 봤다는 것이다. 보통 그림 공부를 하고 데뷔하는 것에 비해 그녀는 순서가 거꾸로였던 셈이다. 본인의 그림 실력에 부족함을 느껴 석고 데생부터 유화까지 차례대로 배웠다. 그래서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보면 초기에는 약간 동글동글하던 그림체가 중반부터 조각상처럼 상당히 섬세하고 유려해진다.

파일:스칼작화비교.jpg

1970년대에 그린 오스칼과 2010년대의 오스칼.

그러나 말년에 접어들어 특유의 매력적인 그림체가 변해 버려서 전성기 작품의 팬들은 안타까워한다. 역변 수준을 넘어 아예 다른 사람이 그린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구체적으로 1970년대말~1980년대부터 그림체가 무너진 것으로 보이며 오르페우스의 창의 3부가 연재되던 시기이다.

특히 오르페우스의 창은 작화가 점점 불안정해지는게 적나라하게 느껴지는데, 선화가 얇아지며 불필요한 선이 많아지고 캐릭터들의 얼굴이 빅토리아 시대 인형처럼(...) 평평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일반적으로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작화, 그리고 평가 면에서도 그녀의 최고작으로 뽑힌다.

4. 주요 작품

파일:1704ikeda.jpg

5. 여담

6. 외부 링크



[1]일본은행의 국장이자 야마토총연 부이사장.[2] 이때 조수미를 동경했다고 2024년 인터뷰에서 밝혔다.[3]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