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州商團事件 |
Canton Merchants' Corps Uprising |
1. 개요
1924년 8~10월 광저우의 상단과 중국국민당이 충돌한 사건을 말한다. 장제스가 지휘하는 황포군관학교 생도들과 경위군이 광저우 상단을 제압하고 복속시켰다. 줄여서 상단 사건, 광저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광저우 상단 사변(廣州商團事變)이라고도 한다.2. 배경
일찍이 광동성은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고, 인근에 영국령 홍콩과 포르투갈령 마카오가 생긴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외국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자본의 축적으로 인하여 광동성의 재원은 다른 성에 비해서 매우 풍족했고, 이 때문에 여러 군벌들이 광동의 지배권을 놓고 군침을 흘렸다.쑨원이 광저우에서 호법정부를 설립하였을 때 운남군벌 양시민, 광서군벌 유전환 등이 호응한 것도 이들이 혁명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광동의 재물을 탐했기 때문이었다. 광동의 혼란상 때문에 1913년 광동상회는 정부의 허가를 얻어 광동상단이라는 것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면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무장 자위대였다.
광동상단은 광저우에만 6,000~1만 2천명이, 광동성 전체에 5만명이나 되는 대규모 부대였다. 1919년 광동총상회 회장을 지냈던 영국 회풍은행 광저우 지점장 천롄보(陈廉伯, 진염백)가 상단의 단장에 추대되어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여 광동성의 각 현과 진에 모두 상단조직을 설치했다.
한편 쑨원이 1922년 천중밍의 영풍함 사건으로 축출되었다가 1923년 다시 돌아와 3차 광동정부를 수립한 이후, 쑨원은 다시 북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광저우의 세입은 1921년에 4,349만원, 1922년에 3,671만원이었던 것에 비해 1923년 1,660만원, 1924년 1,208만원으로 급락하고 있었고, 쑨원은 재정난을 타개하고 북벌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광저우를 비롯한 도시 지역에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여기에 광동정부가 노동운동을 합법화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려 하자, 상인들은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군다나 상인들은 영풍함 사건으로 축출되었던 쑨원이 중국의 근대화를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라 여기지 않고, 그를 '쑨 대포'라고 부르면서 조롱하고 있었다.
1924년 5월 광저우시는 <도로변 상점운영방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점포의 토지소유권과 영업권을 일원화하여 과세하려 했는데, 이에 상인들은 "관행을 무시한 것"이라고 반발하여 광저우에서 상단을 집결시켜 무력시위를 했다. 천롄보는 영업세 징수에 대한 반대를 청원하며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철시, 파업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5월 26일 광동성장과 광저우 시장은 도로 영업권 통일안을 철회했다. 상단의 유용성에 대해 인식한 상인들은 1924년 5월 28일 100여개 상단 조직의 대표들을 모아 단무회의를 개최, 상단연방총부를 조직하여 상단의 지휘 기구로 삼았고 천롄보를 상단연방 총장으로, 덩제스(邓介石, 등개석)와 천공쇼우(陈恭受, 진공수)를 부총장으로 추대하여 조직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맞서 광동성장 랴오중카이는 연방총부 설립을 불허하였고, 해당기관에 연방총부의 성립을 엄금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광동의 노동자들도 1924년 5월 광저우 노동자 대표대회를 소집하여 공단군을 조직했고 쑨원은 이들에게 제복, 단검, 소총과 일당 35센트를 지급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들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하는 광동정부를 경계하고 있었는데, 광동정부는 1922년 홍콩 선원 파업과 1924년 사면 파업 등 열강의 이권과 연관된 사건에 개입하여 노동운동을 지원한 바가 있었고, 공산주의를 표방하진 않으나 궁극적으로 볼셰비키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열강은 광동정부의 경쟁자인 동강 지역의 천중밍을 지원하는 한편, 광동정부의 노동정책에 맞서 파업을 교사하고 천롄보에게 "상단을 이용하여 쑨원을 타도하고 상인 정부를 조직하라"고 부추겼다. 이에 천롄보는 월한철로국 국장이며 상단요원인 허숭호를 매수하여 군 병기 수입 허가증[1]을 위조하여 총기 밀반입을 시도하였으며 홍콩에서 총기 9,841정과 탄약 337만 발을 구매하는 한편, 유럽에서도 각종 무기를 사들였다. 상단의 움직임이 불온해지자 광동정부 역시 실력행사로 나아가게 되었다.
3. 전개
3.1. 상단의 무기 압수
쑨원은 먼저 8월 8일 유진환과 양시민에게 상단의 무기 밀매를 조사하라고 지시했으나, 이들은 모두 대원수인 쑨원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 이에 쑨원은 장제스에게 연락하게 되었다. 1924년 8월 9일 심야, 황포군관학교 교장실에 있던 장제스는 쑨원의 명령서를 수령하였다.무기를 밀수 중인 노르웨이 상선을 포획하기 위해 오늘밤에 등언화[2]에게 강고함을 이끌어 장주로 가도록 명령하였으니, 귀관은 그와 협의하여 공동행동을 취하기 바람. |
천롄보는 영국의 후원을 받아 광동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무기를 밀수하고 있었는데, 쑨원과 친교가 있던 영국 영사가 그 사실을 쑨원에게 귀뜸해준 것이었다. 장제스는 즉각 강고함에 탑승하여 주강의 장주, 사각, 백아담을 순시하였고 8월 10일 새벽 노르웨이 국기를 게양한 덴마크 선박 해브[3] 호를 발견하여 강고함, 영풍함 두 함선에게 해브 호를 황포군관학교로 예인시켜 배 안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압수하여 황포군관학교에 보관하게 했고 해브 호는 밀수혐의로 억류했다. 해브 호에는 4,850 정의 소총, 4,850정의 권총과 탄약 350만 발이 실려 있었다. 쑨원은 8월 11일 천롄보가 위조한 무기 구입 허가증을 취소하였다.
이에 천롄보는 8월 11일 저녁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한 이후, 8월 12일 모든 상점의 일제 파업을 지령하고 해브 호의 석방, 무기의 반환을 요구하며 1~2천명의 상인들로 조직된 청원단을 대본영에 보내 항의했다. 하지만 쑨원은 무기 밀수가 불법임을 지적하며 "상인군은 1천명에 지나지 않는데 9천정이나 총을 사들인 이유가 무엇이냐? 그대들이 만일 우리를 공격하겠다면 무기를 반환할 수는 없다. 무기의 처분은 필요한 조사를 마친 후에 하겠다."라고 대답하며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해브 호의 경우, 단순한 수송계약을 집행한 것이기 때문에 곧 풀어주었고 무기를 제외한 물품은 금수품이 아니었기 반환하게 되었다.
8월 15일, 광저우에서 대연단 개막식이 열렸는데 여기에 참여했던 상단 대표들은 다시 대원수부로 가서 총기의 반환을 요구했고, 8월 18일 상단은 은행의 파업을 선동하는 한편, 광동성 정부가 발행한 지폐의 수령을 거부했다. 8월 19일, 쑨원은 상인단에 서한을 보내 "압수된 무기 중에 상인단이 자금을 모아서 구입한 무기는 법에 따라 반환하겠다"고 밝히면서 "천롄보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지적하며 상인단에게 "반역도당이 되지 말라"고 경고했다.
천롄보는 엄청난 음모를 계획하고 있다. 그는 상인단의 힘을 빌어서 정부를 전복시키고, 제2의 베니토 무솔리니 역할을 연출하고 있다. 요즈음 천롄보의 영향을 받은 신문 등은 광저우 상인단을 파시스트당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이탈리아 자본가의 완고하고 자각없는 분자를 뜻하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획책하는 자 중에는 외국인도 있다. 그들의 계획은 8월 14일 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천롄보가 스스로 광동의 지도자가 되어 독립을 취소하고 북방에 항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관대한 조치를 취하겠다. 스스로 잘못을 회개하는 자에 대해서 정부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 |
8월 20일에는 랴오중카이가 천롄보에게 지명수배령을 내렸으며, 상단 연방총부는 불산으로 이전하여 불산의 대지주인 천공쇼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3.2. 광동정부와 상인단의 대치
상인단은 8월 20일 광동정부에 2가지 사안을 요구했다.- 1. 정부가 압수한 무기를 전부 무조건 반환하라.
- 2. 상인단의 통일적인 군사기구로서 연방총부를 조직하는 것을 인정하라.
8월 23일 천공쇼우가 다시 3가지 요구를 전달했다.
- 1. 압류된 전 무기를 무조건 반환하라.
- 2. 상단의 연방총부 성립을 허락하라.
- 3. 천롄보에 대한 지명수배를 취소하라.
쑨원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상인단은 광동성의 100여개 곳에서 파업을 선동하고 각 현의 현장을 몰아내자는 선동을 하며 반항했다. 천공쇼우는 불산과 남학 등 14개 현의 상단, 향단, 토비 등 3천명의 병력을 석만에 집결시켜 공성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영국이 이를 지지한 덕분에, 상단은 사면에 지휘기구를 설치하여 광저우 공격을 준비했다.
8월 25일 상단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쑨원은 무력대응을 결심하고 압수한 무기로 황포군관학교 생도들과 농단군을 무장시켜 상단군과 대치하는 한편 "폭격으로 상업지구를 파괴하겠다"고 상인들을 위협하였다. 이에 각국 영사단이 항의했으며, 8월 27일 영국 광동 총영사가 "중국 정부가 만일 광저우 시내를 향해서 발포한다면 모든 영국 해군부대는 즉각 행동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경고하며 개입했으며, 8월 28일 영국 함정 9척이 대원수부를 향해 함포를 조준했다. 이에 쑨원은 9월 1일 대외 선언을 발표했다.
과거 12년 간을 제국주의 열강은 정신적으로, 또 각종 차관에서 시종 반혁명을 지원했다. 오늘날 우리 정부에 대한 공공연한 반란의 동향도 그 배후자는 중국에 주재하는 영국 제국주의자의 유력한 기관의 대리인이다. |
또한 쑨원은 램지 맥도널드 영국 수상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 '제국주의적 내정간섭'에 대해 항의했다. 쑨원의 강경한 대응에 상인단이 일단 파업을 취소하고 물러서면서 사태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중국국민당이 열강과 대치했다는 소식에 소련인 고문들은 크게 기뻐했고, 중국 곳곳에서 민족주의자들이 환호했다.
3.3. 쌍십절 충돌
그러던 중 북방에서 우페이푸의 직예군벌과 장쭤린의 봉천군벌, 돤치루이의 안휘군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장쭤린은 우페이푸를 타도하기 위해 쑨원과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했고, 쑨원은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벌을 결심하고 9월 3일 강절전쟁이 터지자 9월 4일 북벌을 선포하고 탄옌카이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9월 12일 후한민에게 대원수대리에 임명하여 광저우를 맡기고 소관으로 북상했다. 1924년 9월 16일 2차 직봉전쟁이 시작되면서 쑨원은 다시 북벌을 할 기회라 여겨 9월 18일 북벌과 제국주의 타도를 선언했다.중국공산당은 상단이 광동정부의 '심복지환'이라고 하면서 상단을 해체해버리자고 주장했지만, 후한민 등이 "총기 1정당 60원의 세금을 매기자"는 유화책을 주장했고, 쑨원은 일단은 타협점을 찾기로 하였다. 전계군벌 범석생과 료행초의 중재 끝에 쑨원은 9월 20일 천롄보와 천공쇼우에 대한 지명수배령을 취소하고 50만원의 벌금과 건물세를 무기와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광저우에 주둔한 병력이 줄어든 것을 확인한 상단은 다시 공세적으로 나와 10월 9일 파업을 선동하여 광저우는 혼란에 빠졌다. 당황한 쑨원은 광저우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고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냈다.
광저우가 만일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즉시 학생 전원을 데리고 황포를 철수하여 소관으로 오되, 무기, 탄약은 남김없이 거두어 올 것. |
하지만 장제스는 철수를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답신했다.
본관은 맹세코 황포를 사수할 것이며 신성한 혁명 근거지를 포기할 수 없다. |
10월 9일, 황포군관학교에 보관 중이던 무기들이 상단에 전달되었다. 이튿날인 10월 10일, 무창봉기 13주년을 기념하여 황포군관학교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허잉친이 열병식을 지휘했고, 생도들은 오후에 광저우 각계 대표들과 시가지에서 신해혁명 기념 축하행진을 거행하기로 했다.
오후 3시, 행렬이 성하(省河)의 서쪽 강기슭에 이르렀을 때에 상인단은 광동정부로부터 인수한 무기들을 뭍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생도, 농민, 노동자들의 가두행진을 본 상인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무기를 빼앗으려는 시도로 알고 행진을 저지했다. 충돌 끝에 상인단이 발포하였고 6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이후 최소 3배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왔다.[4] 상단군은 즉각 병력을 출동시켜 상업 지구의 추위를 폐쇄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10월 11일, 상인단은 선전 삐라를 뿌리며 광동정부를 공격했고, 파업을 선동하며 쑨원의 사임을 요구했다. 천중밍이 이에 호응하여 동강 지역에서 출병하여 광동정부를 위협했고, 영국 군함들도 백아담에 정박하여 상단을 지원했다.
3.4. 상단군 진압
광동정부는 미하일 보로딘이 출석한 가운데 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쑨원이 회장을 맡고 랴오중카이, 왕징웨이, 장제스, 쉬충즈, 천유런, 탄핑샨(谭平山, 담평산)이 전권위원에 임명되었으며, 보이틴스키가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저우언라이 등도 출석했다. 랴오중카이와 장제스는 무력토벌을 주장했고, 쑨원은 이를 수용하여 광저우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상단은 10월 12일 철시, 파업을 선동하며 쑨원을 타도할 것을 주장하고 10월 13일 사면에서 비밀집회를 열어 반란 확대를 꾀했다.혁명위원회는 후한민에게 광저우 상단을 일괄 해산할 것을 명령했고, 10월 13일 소관에 주둔하고 있던 우톄청이 경위군을 이끌고 귀환했고, 탄옌카이가 지휘하는 3천명의 호남군도 귀환하면서 상단군과 무력대결을 할만한 병력이 갖추어졌다. 농민운동강습소 주임 펑파이도 휘하의 학생 200명을 무장시켜 농민자위군으로 편성하였다. 10월 14일, 쑨원은 장제스에게 전군 지휘를 맡겨 상단군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다. 장제스는 즉시 병력을 동원해 광저우 주변에 배치했다. 14명으로 구성된 기관총 부대와 2개 포병연대가 배치되었으나 산포탄이 부족하여 동일한 구경의 야전포탄 통을 짧게 잘라서 임시로 조달했다. 황포군관학교의 4개 중대 중 2개 중대는 학교를 방위하고 2개 중대가 시내로 파견되어 상단군 토벌에 나서기로 했다. 이에 맞서 상단군도 오후 7시, 대규모 부대를 내세워 정면대결을 걸어왔다. 장제스는 이들을 포위섬멸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준비했다.
10월 14일 저녁, 광저우 서부에서 2~3시간 동안 소규모 교전이 있었고, 상단군은 서관 일대로 물러나 바리케이트를 치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10월 15일 새벽 4시, 정부군이 군사작전에 돌입했다. 정부군의 포격이 상업지구 출입구를 파괴했고 경위군이 기관총을 발사했다. 상단군은 거리에 가교를 설치하며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상단군은 곳곳에서 개별적으로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격파당했다. 결국 반나절 만에 상단군 대부분이 투항하면서 상단군은 하루만에 진압당했고, 정부군은 상단군의 무기를 모두 회수했다. 상단의 주요 지도자들은 홍콩으로 도주했다. 장개석비록은 황포군관학교 교군의 엄정한 군기에 대해 칭송하고 있지만 "군벌군으로 구성된 객군의 경우, 노략질과 방화를 일삼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정부군은 30~284명의 전사자를 냈고, 상단군은 50~200명이 전사했으며, 300명의 민간인 피해가 있었다. 700~1천 채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총 수백만 달러 어치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외신은 광저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공기 중에는 코를 찌르는 자욱한 연기와 나무 타는 냄새가 가득했고 (...) 모든 연령대의 중국인들, 하지만 주로 노인과 여자와 어린이들이 폐허가 되어버린 그들의 집에서 울고 있었다. |
이어 정부군은 10월 19일 불산의 상단본부를 제압하고 불산상단을 해체했으며 광동상단 본거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3.5. 상인단의 항복
10월 16일 상인단 부단장이며 불산의 대지주인 천공쇼우가 직접 황포에 나타나 정식으로 화의를 요청했다. 광동정부는 이를 수락하였으나 주모자인 천롄보 등 9명에게 체포령을 하달했다. 천롄보는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10월 23일에는 우페이푸 휘하의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축출하면서 11월 초에 직예군벌이 패배하고 2차 직봉전쟁은 봉천군벌의 승리로 돌아갔다. 10월 30일 쑨원은 광저우로 귀환했고 북방군벌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북상선언을 발표, 베이징으로 향하게 된다.
4. 결과
상단군이 제압됨에 따라 광저우는 광동정부의 확고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황포군관학교의 교군은 첫 승전을 거두었고, 영국 공산당을 비롯한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라"고 칭송했다. 중국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혁명대중의 지지 아래' '제국주의와 지주 매판 계급 세력을 강하게 타격하고 광동혁명의 위급한 정세를 돌려세운' 일이라고 고평가한다.하지만 북양군벌들은 이 사건을 쑨원의 난동으로 폄하하면서 "만약 베이징에서 쑨원이 상인들에게 한 짓을 비난한다면, 쑨원의 '불평등조약을 폐지하겠다'는 허풍도 끝날 것"이라고 비웃었다.
한편 북상했던 쑨원이 1925년 3월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국민당은 쑨원의 후계자를 놓은 대권투쟁과 국공갈등으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국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6. 관련 문서
- 2차 호법운동
- 1922년 홍콩 선원 파업
- 1차 직봉전쟁
- 영풍함 사건
- 회선 사건
- 1차 국공합작
- 강절전쟁
- 2차 직봉전쟁
- 북경정변
- 제노전쟁
- 선후회의
- 국민당의 1차 동정
- 1925년 객군 반란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국민당의 2차 동정
- 중산함 사건
- 국민혁명
- 쑨원
- 장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