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새정치민주연합/2015년
1. 창당
사진 속의 손바닥은 안중근 의사의 손인데, 공교롭게도 창당한 날이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었다. |
민주당의 김한길 대표와 새정치연합의 안철수 중앙위원장의 전격적 합의로 두 당의 합당이 이루어졌고, 2014년 3월 16일 새 정당의 공식 명칭을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정했다. 처음 당명을 정할 때 민주당 측과 안철수 측은 민주(民主)라는 단어의 존치 여부를 두고 약간의 갈등을 겪었다. 통합 정당의 명칭은 국민 공모를 통해서 결정되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1995년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와 비슷하고 민주라는 단어도 빠진 새정치국민연합이 선정되었다. 하지만 군소정당인 새정치국민의당이 창설되어[1]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당명이 유사하다는 답변을 받고 양당대표 합의 하에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으로 결정했다.[2] 다만 약칭에서는 민주가 빠지고 새정치연합으로 결정되었고, 당색은 두 정당(민주당-태극파랑/새정치연합-하늘파랑) 색깔의 중간인 바다파랑으로 결정하고 2014년 3월 16일에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3]
2014년 3월 26일, 중앙당 창당 대회를 열어 안철수 새정치연합 중앙위원장이 단독 대표가 되었다가 3월 27일 민주당이 새정치민주연합으로 합당을 하게 되면 김한길 대표가 공동 대표가 되는 통합 창당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창당 당시 국회 의석 수는 130석으로 민주당의 126석과 새정치연합 2석, 그리고 무소속의 박주선, 강동원 의원(前 진보정의당 소속)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2.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 체제
2.1. 제6회 지선 기초선거 무공천 논란
안철수와 김한길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기초선거의 무공천을 합당 명분으로 정했으나, 기존의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모두가 당론으로 무공천을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야권 후보 난립과 사칭으로 기초선거에서 전패할 것이며, 심지어 새누리당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지원하기로한 무소속 후보와 동명이인을 출마시켜서 혼란을 유발시킬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진행상황/기초자치단체 참고.결국 여론조사와 당원투표를 50:50으로 반영하고, 권리당원 전체에 대한 전화투표와 무당파 및 지지층 2000명에 대한 여론조사로 결정하기로 했다. 조사 결과 당원투표에서 57.14%가 공천 찬성, 여론조사에서 49.75%이 공천 찬성하여 무공천이 철회되었다. 2000명은 두 조사기관에서 1000명씩 나누어 실시하였으며 각 기관별로 새누리당 등 타정당의 지지자와 "잘 모르겠다"를 제외하고 찬반률을 구한뒤 두 기관을 평균했다. A기관은 공천/무공천/잘모름이 362/383/255명씩, 420/405/175명으로 나와서 도합 782/788로 거의 박빙으로 나왔다.
사실 안철수 대표 입장에선 (감정도 좀 섞인) 혈세 낭비라는 여론의 지지도 있고 하니 사실상 기초선거제를 폐지하려는 목적으로 띄운건데, 아무래도 정치 현실상 정계에선 이런 움직임을 달가워할리가 없고[4], 처음엔 여권측도 어느정도 호응했으나[5] 선거가 다가오자 모르쇠로 돌변, 이에 안철수 대표가 공약을 지키자며 청와대를 직접 찾아가 박근혜 대통령 면담도 요청했으나 단칼에 거부당하며 결국 빈손으로 돌아오고 만다. # 어찌보면 나름 정치 신인이었던 안철수 대표가 이상론을 관철시키려다 놀아난 셈.
2.2.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총 15곳에서 실시된 사상 최대 재보궐선거에서 대참패를 겪게 된다. 물론 재보궐 선거 자체가 저조한 투표율로 진보 진영에 좀 더 불리하기도 하고, 선거구 자체도 여권에 좀 더 유리한 지역이 많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 15개 선거구 중 11곳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되는 예상치를 넘어선 참패를 당했다. 제6회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어느 한 쪽이 승리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받았고, 이번 재보궐선거가 사실상의 연장전과도 같은 승부였기에 이 완패는 당에게나 두 당대표에게나 엄청난 타격이었다.선거에서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패배 자체보다 더 뼈아픈 것은 패배하는 과정과 내용도 매우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당선된 4개 선거구 중 3곳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치적 근거지인 호남이었다. 광주 광산을에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서울시 동작을에 기동민을 전략공천하고, 순천 곡성에서는 서갑원 전 의원을 공천했다. 본디 기동민은 광산 을 출마를 준비하고 선거사무소까지 개소했으나 다음날 중앙당에서는 기동민의 동작을 공천을 덜컥 발표하였고, 후보 본인조차 이 사실을 뒤늦게 듣고 허겁지겁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기존 동작 을 출마를 준비하던 예비후보인 금태섭과 허동준 등은 강력히 반발하였고[6] 이런 모습이 유권자들에게 좋게 보였을 리가 없다.
이 모든 사단은 결국 광산 을에 권은희를 전략공천하기 위한 포석이었는데 여권에서는 이를 '대가성 공천'이라는 프레임을 잡아 비난했고 그 결과 광산을이 아닌 타 지역구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면서 김한길-안철수 두 대표의 무리수로 남게 되었다.게다가 지도부는 이 난리통을 수습하느라 순천·곡성에서 벌어진 경선 선거인단 부정 논란에는 대처할 겨를도 못 냈다. 그렇게 공천받은 서갑원은 민주당계 정당의 절대적인 우세 지역구에서 새누리당 이정현에게 패배하는 대참사를 일으키고 만다.
수원에서는 수원시 정에 공천을 신청했던 백혜련을 뜬금없이 수원시 을로 보내서 전략공천을 한 결과 19대 총선에서 승리했던 지역구를 새누리당에게 헌납하고 말았다.[7] 정작 백혜련 대신 수원시 정에 공천을 받은 박광온도 해당 지역구에 연고가 없었다는 점이 코미디. 그리고 김두관의 경우도 후보 개인의 인지도만 믿고 연고가 전혀 없는 김포에 공천했다가 패배를 자초하기도 했다.[8]
한편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가 야권 연대를 제안했지만 김한길-안철수 지도부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진전이 없자 여섯개의 지역구에 후보들을 독자적으로 출마시키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의당 측은 단일화 요구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야권연대에 대한 문은 선거 직전까지 열어 두겠다고 했지만 투표용지 인쇄일인 21일까지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야권연대 제안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그러나 노회찬 후보가 "사전투표 첫째날인 7월 25일 전까지 단일화에 진전이 없을 시 사퇴하고 기동민 후보를 지지하겠다"며 초강수를 내세운 것이 시발점이 되어 7월 24일 하루만에 무려 세 곳의 지역구에서 새정연-정의당 간의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 지역구는 노회찬 후보, 경기도 수원시 정 지역구는 새정연 박광온 후보, 수원시 병 지역구는 새정연 손학규 후보가 각각 해당 지역의 새정연-정의당 단일후보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단일화가 당대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정의당은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단일화에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후보 개개인이 성사시킨 단일화라 당 차원의 협력은 어려울 것으로 보였으나,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 및 문재인 의원 등이 동작을 노회찬 후보의 지원유세에 참여했고, 수원정에 출마했다가 단일화로 사퇴한 천호선 정의당 대표 또한 새정치민주연합 박광온 후보의 지원유세에 참여했다.
그러나 노회찬 후보는 새누리당의 나경원 후보에게 상당히 적은 표차로 석패하고 말았다. 뒤늦은 단일화와 노동당 표 분산 효과라는 평이다. 다른 지역 무효표와 비교할 때 대략 1200표가 사퇴한 기동민 후보를 찍은 표로 추정된다. 이는 단일화가 늦게 이뤄져 투표 용지에 기동민 후보가 그대로 인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기동민 후보의 공천 과정의 잡음을 생각하면 허탈하기 그지없는 부분.
그런데 이번 보궐선거에서의 노회찬 후보가 처했던 상황은 2010년 노회찬이 출마했던 서울시장 선거와 그 양상이 똑같다. 노회찬은 출마한 후보 중 유일한 동작구 기반 정치인이기도 한 노동당 김종철 후보에게 단일화를 제안하지 않았다. 김종철 후보는 바로 통진당 후보가 힘을 실어줬다. 통진당은 노동당과 정치적 노선도 다르지만 일련의 사태로 인해 앙숙과 다름없는 사이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지만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김종철 후보는 그대로 선거를 강행해 1000표 가까이를 얻었다. 2010년 서울 시장 선거에서 한명숙 당시 후보가 노회찬 후보의 독자 출마로 인해 패했다는 의견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순천곡성의 경우 지도부가 서갑원 후보를 쳐내지 않음으로서 문제를 자초했다. 비록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라고는 하지만 부정경선 논란 및 부패전력을 지닌 후보를 쳐내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물론 이 경우 서갑원 후보 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잇따른 공천 논란으로 당 내부가 시끄러워진 상태에서 또 다른 공천 논란이 나오는 것은 당 지도부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여론조사 경선을 통해 선출된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여러 논란(비리 의혹, 노무현 前 대통령의 자살과 관련된 태광실업 표적 세무조사)으로 인해 부적격으로 판단, 후보에서 배제한 것과 대비된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와 유병언의 검거 실패 등의 유리한 이슈가 있음에도, 수도권은 물론 텃밭조차 지켜내지 못한 것에 비판이 많다. 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공천 논란(낙하산 공천 등), 대안 정당으로서의 비전 및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점, 세월호 정국에 과도하게 의존한 점, 지역 현안에 무심해 지역 민심을 얻지 못한 점 등이 거론된다.
선거 참패 후, 김한길 - 안철수 공동대표와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았던 주승용 사무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는 김한길 의원은 자신만 사퇴하고 안철수 의원은 대표직에 남겨두려고 했지만 안철수 의원이 김한길 의원을 따라 함께 사퇴하기로 했다.
3.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결국 재보궐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와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원래 김한길 대표는 본인만 사퇴하고 안철수 대표는 남겨두려고 했지만 안철수 대표가 동반 사퇴를 결정했다. 그리고 박영선 원내대표가 대표 대행 겸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으며, 비상대책위원회는 국민공감혁신위원회로 이름을 정했다. 그러나 당소속 신계륜, 김재윤, 신학용 의원이 입법로비 스캔들에 휘말려 대한민국 검찰청 수사를 앞두고 있고, 눈물로 비대위원장을 맡았다던 박영선 위원장은 논산훈련소에 가서 왜 카투사에 안갔냐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말다툼을 하더니 결국 세월호 특별법에서 새누리당에게 유리한 안에 합의를 해주는 등 깽판을 저질렀다. 이제 국민들은 짜증나니 새정치민주연합을 없애버리라(...)는 비난까지 나왔고 이 와중에 야권 승리를 위해 정의당과 합당하자는 주장도 나왔다.새누리당과 다시 특별법 재협상에 나섰지만 유가족들은 여야 합의를 거부하고 원안 고수의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재재협상이 불가능한 만큼 합의안 처리를 강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유가족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재재협상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박영선 대표의 리더십은 무너진 상황이며 도리어 유가족과 단식에 동참 중인 문재인 의원에게 시선이 더 집중되었다.
결국 9월 11일, 박영선 원내대표는 비대위원장 겸임을 내려놓고 외부 인사를 위원장으로 영입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비대위원장 사퇴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영입 대상이었던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새누리당 당원 전력이 걸림돌이 되었다. 지난 19대 총선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이기도 했으며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반역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다. 때문에 외부 인사 위원장 추대는 물 건너가버렸고, 여기에 원내대표직 사퇴까지 압박을 가해오자 박영선 위원장이 돌연 탈당을 거론하면서 그야말로 격랑에 휩쓸리고 말았다. 거기다 문재인 의원의 이상돈 교수 영입에 있어서의 애매한 스탠스도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특별법에 마지노선을 그어버리자 결국 박영선 원내대표는 탈당을 철회하고 당무에 복귀했다. 비대위원장직은 분리하기로 해 결국 문희상 의원이 1년 4개월 만에 또다시 비대위원장이 되었다. 박영선 원내대표는 세월호 특별법을 처리한 후 사퇴하기로 했지만 이미 리더십이 끌어내려진데다 박근혜 대통령이 초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김현 의원과 세월호 유가족 대표들이 폭행 사건에 휘말리는 등으로 인해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문희상 위원장은 비대위원으로 박지원, 정세균, 문재인, 인재근, 박영선 의원을 위촉하는 이른바 초강수를 띄우며 당 혁신작업에 나섰다. 새롭게 위촉된 비대위원은 거의 다가 이른바 새정치민주연합 내 계파를 대표한다던 보스급 의원들이었다. 이른바 비대위원회 체제에서 당 내 실세들이 비대위원으로 대거 참가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참고로 민주당에서는 2010년 경선을 통해 손학규 대표체제가 출범했을 때 정동영, 정세균 등 당 내 계파실세들이 최고위원으로 함께 지도부를 이끌던 경험은 있다.
그리고 2015년 2월 8일에 전당대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4. 지지도
[1] 엄밀히 따지자면 기존의 희망한나라당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여담으로 이 정당은 훗날 밝은당과 개혁국민신당을 거쳐 친박연대로 이름을 바꿨는데, 당명이 하나같이 다른 정당들을 연상시킨다.(...)[2] 참고로 4년 후인 2018년에도 안철수 등을 중심으로 여기서 분당된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통합하여 바른미래당으로 출범할 때에도 '미래당'이라는 명칭 때문에 우리미래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3] 링크[4] 특히 기초선거제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정치 신인들 입장에선 청천벽력스런 발언이었을 것이다.[5] 애초에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기도 했다.[6] 안철수의 측근 그룹이었던 금태섭은 전략공천에 승복은 했으나 이후 안철수와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고 이듬해에 있었던 국민의당 분당 때도 안철수를 따라가지 않았다. 허동준의 경우는 동작을 지역위원장을 오래 지냈으나 하향식 전략공천에 무려 4번이나 밀려서 출마 한번 못해보게 되었고, 결국 울분이 폭발한 나머지 기동민의 기자회견장에 난입해서 당 지도부를 강력히 규탄했는데, 기동민과 허동준은 20년된 친구 사이였기에 안타까운 장면.[7] 지역구를 옮겨 공천할 거면 빨리 결단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늦게 공천하는 바람에 백혜련은 주소지조차 옮기지 못했다. 다시 말해 선거 당일에 투표도 못 했단 얘기.[8] 김포의 경우 지역 연고가 있으면서도 경쟁력 있는 인물이 없긴 했다.